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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12화 (112/210)

# 112화.

좋은 선수 너머(2)

토드 제아일 저 개자식이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35살. 6피트 1인치에 195파운드. 반면 그 앞에 선 레이 오도네즈는 5피트 7인치에 160파운드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레슬러 앞에 선 일반인 수준. 제아일의 으름장에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오도네즈가 머뭇거렸다.

물론 오도네즈의 송구가 조금 낮기는 했다. 하지만 맨손으로 공을 잡고 그대로 턴을 해서 던진 공이었다. 발 빠른 주자인 라파엘 퍼컬을 잡기 위해 오도네즈가 최선을 다해 보내준 공인 셈이다. 고작 그런 송구를 잡아내지 못한 주제에 오도네즈의 송구가 나빴다고 이야기하는 저 뻔뻔함이라니. 자신에게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오도네즈를 향해 토드 제아일이 비릿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에드가르도는 폭발하려 했고 벤츄라는 그 폭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의지······.’

이대로 지켜본다면 그냥 에드가르도와 벤츄라가 한차례 다투고 마치 없던 일처럼 지나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미루고 그것이 흐지부지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팀 전체로 봐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끝내기에 저 토드 제아일 개자식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 98년 99년 피아자와 한팀에서 생활했었고 함께 플로리다로 트레이드 됐었다는 인연을 내세우며 은근슬쩍 팀에 베테랑인 척 굴고 있는 저 개자식은 11년이라는 긴 커리어에 비해 실제 성적은 별 볼 일 없었다. 아마 WAR로 환산한다면 그의 11년보다 나의 3년이 더 높을 것이다.

“너!!”

“이봐 제아일!!”

에드가르도가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한발 앞서 나왔다. 에드가르도와 벤츄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상 최근 몇 년간 팀 내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선수. 팀 내의 은근한 알력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다툼에 손을 내민 것이다. 그것도 심정적으로 더 가까울법한 팜 선수들 편으로 말이다. 이것은 각자의 라인을 공고히 하고 있던 두 선수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제지하기에도 조금 뭐한 상황이다.

“사과나 좀 하지?”

“사과? 무슨 사과!!”

“이 망할 자식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너 지금까지 라이터씨만큼 좋은 선발 투수 본 적 있어? 대체 어느 팀의 에이스가 수비 하나 잘했다고 일일이 감사를 표시하냐. 그런 라이터씨의 등판에서 이 난장을 부려놓고 무슨 사과? 내가 어지간하면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마운팅도 좋지만 할 일은 하고 하자. 엉?”

나의 지적에 토드 제아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벤츄라를 비롯해 그와 어울리는 무리들 일부가 움찔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제아일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하나, 둘 정도는 나서서 제아일을 옹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건 내 포구가 잘못됐다기보다는 저 자식의 송구가······.”

우물우물 항변하는 제아일을 강하게 노려봤다. 잠깐의 침묵. 우물쭈물 거리던 토드 제아일이 알 라이터에게 다가가 미안하다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올 뻔 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압박했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분명해졌다.

‘피아자의 선택이 옳았어.’

나의 영향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고, 메츠의 선수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존중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중 하나의 편을 드는 것보다 나를 불러서 이야기한다는 피아자의 선택은 옳았다. 피아자가 없는 메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야수는 바로 나였다.

공수 교대 중에 벌어진 잠깐의 헤프닝이 끝나고 우리의 공격이 돌아왔다. 헨더슨이 헬멧을 들고 타석으로 나가며 내 엉덩이를 두들긴다.

“제법인데?”

“뭐, 좀 그렇죠?”

“메이저 올라왔다고 똥오줌도 못 가리고 벌벌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피아자 흉내도 낼 줄 알다니.”

“뭐, 똥오줌 못 가리는 아기도 4년쯤 지나면 뛰어다니니깐요. 그나저나 이제 슬슬 뭐 좀 보여 주셔야죠? 계속 요즘 같은 페이스면 그 기저귀 헨더슨씨한테 선물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니다 기저귀 새로 사야 되려나? 노인용 기저귀는 애들용보다 좀 더 컸죠?”

“뭐 인마?”

나의 농담에 헨더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이내 언제 웃었냐는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라고.”

***

올해 나이 만 35세. 작년 35경기 249.1이닝 19승 9패. ERA 3.0으로 랜디 존슨과 톰 글래빈에 이어 사이 영 3위를 차지했던 투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안 그래도 느리던 구속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성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그렉 매덕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중반에 데뷔했던 두 선수가 21세기에 메이저리그의 그라운드에서 싸우는 모습은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진호가 국민 학생 그리고 중학생 시절 말로만 전해 들었던 전설적인 선수들.

매덕스의 초구 87마일 포심 패스트볼이 바깥쪽 아슬아슬한 곳을 통과했다. 매덕스와 헨더슨의 시선이 심판에게 향했다. 중요한 순간이다. 단순히 이 공이 스트라이크인가 볼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투수가 얼마나 넓게 존을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나오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스트라잌!!”

헨더슨에게는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방금 공은 꽉 차다 못해 거의 실낱같은 차이로 존에 걸치거나 혹은 빠졌던 공이다. 이런 공에 망설임 없이 스트라이크 콜이 나온다는 것은 오늘 심판의 존이 바깥으로 상당히 넓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가볍게 바닥에 침을 뱉은 헨더슨이 다시 방망이를 움켜쥐고 타석에 들어왔다. 왼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상체를 깊숙이 숙인 특유의 타격 폼. 그의 두 눈이 매덕스의 손끝을 향했다.

뻐엉!!

살짝 움직이던 헨더슨의 배트가 멈췄다. 초구보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온 공. 하지만 코스가 높았다. 이번 공까지 잡아준다면 헨더슨으로서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운에 맡긴 타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바깥쪽으로는 아주 후하지만 높은 코스는 그렇지 않다. 뭐 심판이 단순히 존 설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얼간이일 확률도 있긴 했지만, 메이저 리거가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사람이듯이 메이저리그의 심판은 세계에서 가장 판정을 잘 내리는 심판들이다. 그리고 그중에 얼간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몇 개의 공이 들어왔다.

지켜보고 쳐내고 또 쳐냈으며 지켜보고 지켜봤다. 어렴풋하게 짐작되던 심판의 존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볼카운트는 3-2 풀카운트. 헨더슨이 타석 밖에서 한차례 몸을 풀었다.

매덕스는 리키 헨더슨이라는 타자를 잘 알고 있었다. 내야 땅볼을 안타로 만드는 리드오프. 나이를 먹고 장타력이 떨어졌음에도 두 자릿수의 홈런을 만들 한방을 가진 타자.

‘하지만 너무 늙었지.’

작년 메츠에서 방출된 이후 시애틀에서의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출루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표가 말해주고 있었다. 만 42세의 타자 리키 헨더슨은 이제 늙었다는 것을.

공을 움켜쥔 그렉 매덕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카운트의 상황. 매덕스가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을 던졌다. 초구와 같은 코스로 들어가는 86마일의 공. 하지만 달랐다. 매덕스의 투심 패스트볼이 홈플레이트 인근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단순히 코스만 보고 배트를 휘두른다면 스윙삼진. 그게 아니더라도 기껏해야 땅볼이다. 공을 뿌린 매덕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매덕스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이 헨더슨을 잘 알고 있는 만큼 헨더슨 역시 그렉 매덕스라는 투수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헨더슨은 알고 있었다. 매덕스는 가장 중요한 순간 언제나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헨더슨의 배트가 매덕스의 투심을 건드렸다.

[리키 헨더슨 쳤습니다!!]

딱!!

빈말로도 잘 맞았다고 하기는 힘든 타구였다. 하지만 매덕스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타구였다. 마운드 근처로 흘러가는 타구. 마운드에 선 투수가 평범한 투수였다면 유격수까지 굴러갈 타구였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것은 11년 연속 투수 골든 글러브에 빛나는 그렉 매덕스다. 피칭 직후 균형을 찾아가던 그의 몸이 타구를 향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데구르르 구르던 공이 매덕스의 왼손 글러브 안쪽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자세가 좋지 않았다. 균형 감각이 좋은 매덕스였지만 잠시 흐트러진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멈칫하는 순간은 존재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균형을 되찾은 매덕스가 글러브의 공을 뽑아내 1루 웨스 헬름스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리키 헨더슨에게는 그 찰나면 충분했다. 헬름스의 미트에 공이 들어오기 직전 헨더슨의 왼발이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세이프!!”

나이는 속이기 힘들다. 고작 1루까지 달렸음에도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는다. 1루 베이스를 밟고 선 헨더슨이 이제 타석으로 들어오는 진호를 향해 씨익 웃었다. 검은 얼굴 새하얀 치아가 눈부셨다.

***

헨더슨이 매덕스에게 여덟 개의 공을 끌어내고 결국 내야 안타로 출루에 성공했다. 뭐 타석에 들어서기 전 의도적으로 했던 유치한 작은 도발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나의 저 유치한 도발 속에 담긴 마음을 읽고 최선을 다해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지금까지 좋은 선수였다. 그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99년의 MVP뿐만 아니라 작년 역시도 우리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면 MVP 위너는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5위 안쪽으로는 이름을 올릴만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그 성적이야말로 어린 나이, 짧은 커리어, 아시안.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람들이 나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한 힘이었다.

‘부족하다.’

하지만 클럽하우스 리더란 결코 그것만으로 될 수 없었다. 당장 오늘 나선 사람이 리키 헨더슨이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아니 토드 제아일의 그 변명 아닌 변명조차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헨더슨은 클럽하우스 리더와 가장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렇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좋은 리더는 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좋은 리더였다. 그렇기에 오늘 사소한 간섭이었지만 처음으로 팀 내의 인간관계에 공식적으로 개입하여 큰 소리를 낸 만큼 그 개입이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왔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승리였다.

지구 라이벌의 에이스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승리.

호시탐탐 도루를 노리는 헨더슨을 뒤로 하고 마운드의 매덕스가 공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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