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좋은 선수 너머(3)
이마를 타고 흐르는 찐득한 땀방울을 닦아냈다.
4월 초. 아직 날씨는 쌀쌀했고 경기는 이제 고작 1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렉 매덕스였다. 사이 영 4회. 저 로저 클레멘스와 더불어 이 시대를 양분하고 있는 최고의 투수.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긴장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강진호.
아시아에서 온 MVP 외야수. 데뷔 초만 하더라도 그저 그런 수비형 외야수로 남을 것 같던 녀석은 고작 3년이라는 시간 만에 그조차 긴장시키는 대단한 외야수로 성장했다.
76년생. 아직 생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고작 스물네 살. 2년 차, 스물두 살 시즌에 MVP를 차지했던 그에게는 앞으로 어마어마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올타임 No. 1 중견수 윌리 메이스만큼이나 대단한 중견수가 될지도 몰랐다.
그에 반해 서른다섯. 빈말로도 전성기를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기 힘든 나이. 특별히 단련하지 않아도 불끈거리던 근육들은 사그라들고 이제는 배가 불룩 튀어나온 영락없는 아저씨였다. 그의 미래는 결코 과거보다 찬란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는 결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찬란한 재능을 축하하며 과거의 전설이 박수를 치는 광경 따위는 사양이다. 저 찬란하게 빛날 녀석의 미래가 배 아프다. 누구보다 찬란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더 잘하지 못했던 것이 속이 쓰리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이 지나고 후년이 지난다면 저 찬란한 재능은 더욱 더 크게 꽃피어 늙어버린 자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양 밟고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렇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점이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갈지 모르는 저 젊은 재능에게 90마일밖에 나오지 않는 공으로 메이저리그의 그 어떤 투수보다 위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던 투수가 있었음을 새겨줄 가장 좋은 시점.
이제는 저물기 시작하는 가장 찬란했던 전설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악력으로 누런 공을 움켜쥐었다. 초구는 그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바로 그 공.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
88마일 빠른 공이 날아들었다. 몸쪽 낮은 코스. 가장 매덕스 다운 공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핀포인트 제구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공이었다. 헨더슨을 통해 심판의 존을 정확히 파악했음에도 헷갈릴 수밖에 없는 코스. 반쯤 돌아간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잠깐의 침묵. 마운드의 그렉 매덕스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본다.
“스트라잌!!”
젠장. 내가 보기엔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분명 존을 벗어난 공이었다. 룰이나 일반적인 기준에서의 존이 아니다. 앞서 헨더슨이 뽑아낸 8개의 공으로 유추한 오늘 주심의 존을 벗어난 공이었다.
‘역시.’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렉 매덕스였다. 86년 데뷔한 이래 15년 동안 네 번의 사이 영을 받아내며 라이브볼 시대 그 어떤 투수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금자탑을 쌓아 올린 위대한 투수. 그의 커리어는 심판의 판단조차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위대했다.
‘아직 0-1이야. 괜찮아.’
카운트가 몰린 상황이었다면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는 공이었다. 초구 병살타라는 최악의 상황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기에 좋지 않은 공을 보냈을 뿐. 심판이 이정도로 애매한 공까지 잡아준다는 것을 확인한 셈 치기로 했다.
‘안쪽 공을 이만큼 잡아준다는 건 안 그래도 후한 바깥쪽도 어느 정도 잡아준다는 이야기일텐데. 젠장.’
고개를 흔들고 다시 타석에 섰다. 1루의 헨더슨이 입을 벙긋거린다.
‘기저귀? 이런 망할.’
자신이 타석에 올라가기 전 내가 했던 농담을 그대로 되갚아 주겠다는 강한 의지. 아마 내가 허무하게 물러난다면 정말 나에게 아기용 기저귀를 선물할지도 몰랐다.
‘그런 망신을 당할 수는 없지.’
마운드의 매덕스가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왼쪽 다리가 올라오고 그의 오른손이 머리 뒤로 숨는 순간 1루의 헨더슨이 달려나갔다.
[1루 주자 2루로!!]
완벽한 타이밍. 하지만 매덕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도루를 허용한다고 해도 점수를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담대함. 그의 두 번째 공이 세차게 날아들었다.
뻐엉!!
체인지업. 이전에 던지던 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세에서 튀어나온 바깥쪽 낮은 코스 아주 약간 존을 벗어나는 체인지업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유인구. 하지만 99년과 00년 나는 리그에서 체인지업에 가장 강력한 타자였다. 뭐라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의 나는 아무리 같은 폼으로 던지는 체인지업이라 해도 투수의 손을 출발하는 순간 무언가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그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다.
[리키 헨더슨이 단독 도루에 성공합니다. 2:0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노아웃 주자 2루. 볼카운트는 1-1. 이제 외야로 나가는 안타 하나면 점수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구 우승을 다투는 라이벌팀의 경기답게 경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경기 정말 재밌게 흘러갑니다.]
2루에 선 헨더슨의 눈빛이 매섭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나의 몫이라는 눈빛이다. 세 번째 바깥쪽 투심 패스트볼을 흘려보냈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볼카운트 2-1.
매덕스가 네 번째 공을 뿌렸다. 존 안으로 걸치는 빠른 공.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젠장.’
매덕스를 매덕스로 있게 만들어준 투심 패스트볼. 예상한 궤적을 벗어나는 그 현란한 움직임이 배트의 스윗스팟을 벗어났다. 최대한 손목을 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타구가 3루 쪽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 2-2
마운드에 선 매덕스의 눈이 빛났다.
‘스트라이크를 던져 올 거야.’
많은 타자들이 예측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2스트라이크의 매덕스는 피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음 공은 분명 존을 통과하는 공이 올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아슬아슬한 코스, 배트를 휘두른다고 해도 제대로 힘이 실린 타구가 나오기 힘든 그런 더러운 곳으로 말이다.
매덕스의 다섯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존에 살짝 걸치는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낮은 공을 퍼올리기 쉬운 타격폼을 장착한 나에게 가장 까다로운 공이었다. 홈플레이트 근처 매덕스의 투심이 만드는 특유의 테일링이 나를 현혹 시켰다.
‘지금!!’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아갔다. 마지막 순간 안쪽으로 파고 들어온 공의 움직임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98년과 99년 00년을 지나온 나에게는 그때에는 없던 새로운 무기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힘’이었다.
오랜 기간 경험으로 완성된 땅볼을 강요하는 매덕스의 몸쪽 깊숙한 투심패스트볼을 박살 낼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빛을 발했다. 현란한 테일링 무브먼트가 방망이의 스윗스팟을 벗어났다. 그렇기에 힘차게 돌아가는 배트의 힘은 공에 온전히 실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의 힘은 그 온전하지 못한 파편만으로도 내야를 벗어난 공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이루수의 키를 슬쩍 넘기는 타구. 더 가깝게 서 있던 우익수 브라이언 조던보다 빠르게 앤드류 존스가 달려왔다. 하지만 늦었다. 제아무리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대단한 수비를 보여주는 중견수라고 해도 내야수의 키를 살짝 넘겨 외야 복판으로 떨어지는 안타를 아웃으로 둔갑시킬 수는 없었다.
[Kang 안타!! 우중간 내야수의 키를 살짝 넘기는 중전안타. 헨더슨이 홈으로 들어옵니다. 1회 말, 메츠가 1점을 따라잡네요.]
[여전히 아웃 카운트 없이 주자는 1루. 타석에 에드가르도 알폰조 선수가 들어옵니다.]
[1루 주자 리드폭이 상당히 큽니다. 이건 언제라도 도루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강진호 선수, 지난 3년간 도루가 무려 154개에 도루실패가 28개밖에 되지 않는 선수거든요. 얼마든지 단독으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선수입니다.]
[다만 꾸준한 증량의 여파인지 98년 99년에 비해 작년 도루성적은 소폭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작년보다 공식적으로 10파운드나 몸이 더 불어났어요.]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벗어 건네고 도루 장갑을 받아 끼었다. 대부분의 언론과 팬, 그리고 모든 팀원들이 입을 모아 어글리 글러브라 놀리는 벙어리장갑이지만 조금이라도 부상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면 그 정도 놀림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98년과 99년 5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하며 86%라는 터무니없는 도루성공률까지 기록하던 나는 작년 1개 차이로 50도루에 실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루 성공률 역시 81%로 감소했다. 일각에서는 98년에 비해 35파운드 이상 늘어난 나의 몸무게를 그 원인으로 지적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의 몸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도루 성공률이 낮아진 것은 시즌 막판 3년 연속 50도루를 욕심낸 나머지 몇 차례 무리한 도루를 시도했던 탓이 더 컸다.
2루까지 90피트. 약 27미터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다. 체인지업을 구분할 때도 느꼈지만 이것은 오늘 나의 몸 상태가 좋다는 의미다.
‘달리자.’
3걸음 반. 오른 다리에 서푼 더 무게를 실었다. 매덕스가 나를 힐끔 바라봤다. 그도 아마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달릴 생각이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달리는 것을 자신, 그리고 지금 마스크를 쓰고 있는 레이 로페즈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렉 매덕스의 두 번째 공. 몸쪽으로 파고드는 투심패스트볼.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질주했다. 로페즈가 던진 공이 이루수 퀼비오 베라스의 글러브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듯이 내가 더 빨랐다.
“세이프!!”
[2루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230파운드의 몸이라고는 믿기 힘든 민첩성입니다.]
[Kang의 단독도루!! 1회 말 노아웃 점수는 2:1 볼카운트 1-1 상황. 메츠의 동점 주자가 마침내 스코어링 포지션에 들어갔습니다.]
에드가르도의 타격이 이어졌다. 파울, 파울. 그리고 또 파울. 에드가르도가 매덕스의 까다로운 투심을 꾸준히 커트해냈다. 벤츄라와 함께 여러모로 골치를 썩게 만드는 녀석이었지만 배트 컨트롤 하나만큼은 확실히 일품이었다.
[볼카운트 1-2 그렉 매덕스 제6구!!]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렉 매덕스였다. 매덕스의 서클 체인지업이 녀석의 배트를 끌어냈다. 스윙 삼진. 에드가르도의 뒤를 이어 벤츄라가 타석에 들어왔다. 연평균 800만 달러라는 거액에도 불구하고 99년 가장 성공한 FA로 꼽혔던 벤츄라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00년을 지나 01년. 가장 성공한 FA라 평가받던 그의 계약은 슬슬 먹튀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고 이번 타석 역시 그 선회에 힘을 보태 주었다.
아직까지 높은 연봉 때문에 상위타순에서 기용되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하위타순으로 내려가는 것도 그리 머지않아 보이는 지리멸렬한 스윙 끝에 벤츄라가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아, 노아웃 주자 2루에서 매덕스가 순식간에 두 개의 삼진을 잡아냅니다.]
[달아오르던 메츠의 기세에 아주 시원하게 찬물을 부어버리는군요.]
[하지만 여전히 발 빠른 주자는 득점권에 있습니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어요.]
[자, 타석에는 5번 타자. 프레스톤 윌슨. 프레스톤 윌슨입니다.]
[윌슨 선수가 타율이 그리 좋은 선수는 아닙니다만 한 방이 있는 선수입니다. 99년 30홈런으로 신인왕을 작년에도 34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이 선수 매덕스 선수와의 상대전적이 상당히 좋아요.]
작년보다 더 커졌지만, 작년보다 더 날렵해진 몸으로 프레스톤이 타석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