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좋은 선수 너머(4)
‘친구 녀석이 저렇게 애를 쓰는데 좀 보태줘야겠지?’
지금 팀에서 진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프레스톤일 것이다. 마이너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이자 라이벌.
‘하여간 욕심쟁이라니까. 뭐, 나쁠 건 없지만 말이지.’
나쁠 것은 없었다. 저 욕심쟁이가 단순히 좋은 선수를 넘어 좋은 리더를 노릴 때에 프레스톤 자신은 좋은 선수 너머에 있는 더 좋은 선수를 노린다면 지금 그와 벌어진 차이는 좁혀질 것이다. 이제는 커리어에서 진호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프레스톤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와의 경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야구는 1, 2년 허겁지겁 달려나가는 것으로 평가받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었다. 10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누가 진정으로 좋은 선수, 혹은 단순히 좋은 선수를 넘어선 위대한 선수였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마라톤이었다. 그리고 마라톤에서 가장 먼저 달려나가는 선수는 언제나 페이스메이커인 법이다.
마운드 아래로 내려가 로진백을 매만지는 매덕스의 시선이 2루에 선 진호에게 향한다. 프레스톤의 마음이 괜찮지 않다. 타석 밖에서 방망이를 가만히 돌려본다. 가볍게 돌아가는 방망이. 마운드의 투수가 그렉 매덕스가 아닌 랜디 존슨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쳐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덕스가 마운드를 밟았다. 마음이 좋지는 않다. 쓴맛을 보여주고 싶던 젊은 놈은 자신의 가장 좋은 공을 외야까지 날려 보냈다. 아직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건만 과신이었다.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지 못한 강진호는 전성기를 지나고 있는 매덕스 만큼이나 강한 선수였다.
‘괜찮아.’
하지만 괜찮다. 점수는 2:1. 아직 이기고 있는 쪽은 브레이브스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1:1 승부에서 시작되는 게임이지만 그 끝은 달랐다. 앞으로 남아 있는 3번의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우위를 계속 가지고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매덕스가 몸쪽 깊숙한 코스로 공을 던졌다. 아슬아슬한 위치로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 프레스톤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됐어.’
결코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오지 않을 공이다. 매덕스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두둥실 떠오른 공이 너무 멀리 날아간다. 3루 폴대와 채 1미터도 채 차이나지 않는 위치를 스쳐 간 대형 파울 홈런. 매덕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런 불안정한 자세로 쳐낸 공이 저런 위치까지 날아가다니. 프레스톤이 피지컬적으로 슬슬 절정에 다다를 나이이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 해도 작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98년의 신인왕, 그리고 99년의 신인왕. 매덕스는 이 두 괴물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배알이 꼬였다. 점점 사그라드는 자신과 화려하게 피기 시작한 젊은 피.
매덕스의 머릿속에서 2루의 진호가 지워졌다. 남은 것은 오직 타석에 서 있는 풍채 좋은 25살의 흑인. 프레스톤 윌슨뿐이다. 오랜 경험속에서 농익은 피칭. 매덕스가 좀전과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는 폼으로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바깥쪽으로 흘러간 74마일 체인지업. 앞서 던진 투심과 14마일이나 차이나는 느린 공에 프레스톤의 배트가 허공을 저었다.
볼카운트 0-2
세 번째 바깥쪽 높은 코스, 91마일 포심 패스트볼. 01시즌이 시작되고 기록된 가장 빠른 공이었다. 다만 구속에 전념한 탓인지 공을 놓는 타이밍이 어긋났다. 매덕스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공 두 개 가깝게 스트라이크 존에서 빠지는 공.
하지만 프레스톤은 배드볼 히터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 공에도 배트를 휘둘렀다.
딱!!
힘이 실리기 매우 힘든 코스였다. 하지만 프레스톤의 타구는 빨랫줄처럼 3루 파울라인 너머 내야 관중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번째 파울.
볼카운트는 여전히 0-2.
매덕스는 이런 형편없는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녀석의 무신경함에 웃어야 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녀석의 괴력에 울어야 할지 종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생소하지 않았다.
‘대단하기는 한데, 그래도 소사나 맥과이어만큼은 아니야.’
그와 전성기를 함께했던 가장 강력한 타자들. 단일시즌 최다홈런을 경쟁했던 홈런왕들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 타석의 프레스톤이 보여주는 괴력은 의미를 잃었다. 다만 문제는 지금 그들이 홈런왕 경쟁을 하던 시절의 그들이 아니듯이 매덕스 자신도 그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던 당시의 그렉 매덕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덕스는 짜증을 섞어 웃었다.
‘지금이 2001년인 게 유감이다. 동시에 지금이 2002년이 아닌 게 다행이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듯 올해와 내년이 다를 것이다. 죽순처럼 성장하는 저 젊은 타자들 앞에서 으스댈 마지막 기회다.
‘2스트라이크에서는 피해가지 않는다.’
90마일의 속구를 던지는 파워 피처 그렉 매덕스가 가장 그렉 매덕스다운 공을 뿌렸다. 89마일 투심 패스트볼. 진호에게 1타점 적시타를 허용했던 바로 그 공이다.
딱!!
‘허.’
프레스톤의 배트가 세차게 움직였다. 우악스러운 움직임. 하지만 그 우악스러운 배트의 끝에 매덕스의 89마일 투심이 걸려있었다. 높게 떠오른 공. 2루에 서 있던 진호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92년 생애 첫 사이 영을 수상한 이후 오랜 시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매덕스의 얼굴에 또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15년.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속에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어려운 순간들 역시 부지기수였다. 물론 그때는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지금은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절망이 있다는 차이는 존재했다. 하지만 이겨낼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분노 대신 절망을 느꼈다면 90마일짜리 속구를 던지는 이 투수는 결코 라이브 볼 시대 최강의 투수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매덕스가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타구를 가리켰다.
아직 공은 그라운드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에는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아니 어쩌면 야구라는 경기가 탄생한 이래 가장 대단한 수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는 중견수가 있었다.
앤드루 존스.
매덕스의 투심패스트볼이 프레스톤의 배트에 걸리는 그 순간 그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인지능력과 판단능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운동능력이 빛났다.
‘더 깊어.’
좌중간. 중견수의 영역이라기보다 좌익수의 영역에 더 가까울 그곳으로 향하는 타구. 하지만 앤드루 존스에게 그곳은 자신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골드글러브 외야수의 2배에 달하는 수비능력. 앤드루 존스의 글러브가 프레스톤의 타구를 잡아냈다.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앤드루 존스가 프레스톤 윌슨의 타구를 잡아냈습니다. 1회 말 잔루는 2루. 메츠가 동점에 실패합니다.]
[정말 몇 번을 이야기하게 됩니다만 앤드루 존스 놀라운 수비입니다. 메츠의 Kang과 저 두 선수는 정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상에서 야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수비를 보여줄 수 있는 걸까요.]
***
세계 최초의 프로야구리그가 메이저리그라는 사실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프로야구리그가 쿠바의 SNB(Serie Nacional de Béisbol)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1960년대 사회주의혁명 이후 강제로 실업리그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쿠바의 프로리그는 미국만큼이나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레이 오도네즈는 그런 쿠바에서 가장 기대받던 유격수 유망주였다. 하지만 쿠바 최고의 유격수가 된다고 해봐야 기대할 수 있는 연봉은 수천 달러에 불과했다. 평생을 뛴다고 해도 메이저에서 1년간 받을 수 있는 최저연봉만도 못한 액수. 그렇기에 오도네즈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망명이라는 도박을 택했다. 그리고 그는 그 도박에 성공했다. 비록 공격력에서는 합격점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수비 하나만으로 벌써 6년째 메이저에 붙어있었고 그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금액은 그가 태어난 마을 사람 수백의 평생 수입을 합친 것보다 컸다.
그렇듯 험난한 과거를 갖고 있었지만, 그 과거가 오도네즈의 천성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순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실수를 미루는 토드 제아일에게 항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순하다고 해서 억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도와준 진호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겨났다. 또한, 자신의 플레이가 훌륭했고, 계속 그런 식으로 해달라는 그의 칭찬에 신이 났다.
본래 뛰어난 수비다. 거기에 수비하는 당사자의 마음이 긍정으로 가득하다. 플레이 하나하나에 힘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오도네즈의 호수비는 1회 초 어이없는 실책에 이은 실점으로 흔들렸던 알 라이터에게 한줄기 단비와도 같았다.
2:1.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더 벌어지지 않는 상태로 6이닝이 흘러갔다. 그리하여 7회 말. 메츠의 공격이 8번 레이 오도네즈부터 시작됐다.
[7회 말. 점수는 여전히 2:1. 타순은 오도네즈 선수부터이군요.]
[오늘 몇 번이나 놀라운 수비를 보여주고 있는 오도네즈 선수. 하지만 타석에서는 여전히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년 부상이 있기 전까진 타석에서도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99년 같은 경우 0.258/0.319/0.317에 2홈런으로 커리어하이의 성적을 기록했었습니다. 물론 커리어하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해 보이는 성적이긴 합니다만, 사실 오도네즈 선수의 수비를 고려한다면 저 정도만 해줘도 정말 훌륭한 거거든요.]
[올해는 현재까지 9경기 총 35타석 34타수 5안타 0.147. 오늘도 역시 무안타를 기록 중입니다.]
[이쯤 되면 여기서는 대타를 고려할법도 한 상황입니다만, 아 오도네즈 선수 그대로 타석에 올라오네요.]
실제 부상이 있기 전 타격에 대해 약간씩 감을 잡아가고 있던 오도네즈였다. 그렇기에 작년 당했던 치명적인 부상은 너무 뼈아팠다. 반년에 가까운 공백,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운동능력.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를 위해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온 나라를 버리는 순간 그의 인생에서 야구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선택지가 돼버렸다. 고작 이정도 부상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
그의 등에는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희생한 수많은 가족들이 걸려있었다. 그가 자라난 마을 수백 명분의 수입은 그를 도왔던 가족들과 함께 나눠야 하는 돈이었다. 수백만 달러의 돈은 많은 금액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모든 가족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할 수 있을까?’
자신감 없는 되내임.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마운드의 전설적인 투수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가장 약한 피식자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을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