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좋은 선수 너머(5)
부웅
오도네즈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잌!!”
몸쪽 체인지업이었다.
드물지만 동체시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은 공의 회전을 읽어낼 수 있다. 예리한 감각으로 극히 미세한 투구폼으로 구종을 읽어내는 타자도 있다. 하지만 던져진 공을 보고 그 미묘한 구속 차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00마일짜리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약 0.4초. 75마일짜리 체인지업도 0.6초에 불과하다. 투수의 피칭 타이밍에 맞춰 타격자세에 들어가고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에게 투수의 손을 떠난 직후 그 공이 체인지업인지 혹은 속구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체인지업은 가장 강력한 변화구였다.
두 번째 바깥쪽 체인지업. 오도네즈의 배트가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7회 말, 선두 타자인 오도네즈를 상대로 매덕스가 2구 연속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몸쪽 체인지업에 이어 존 밖으로 빠지는 바깥쪽 체인지업에 오도네즈 선수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볼카운트 0-2. 매덕스 선수가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오늘 1회를 제외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매덕스였다. 볼카운트는 0-2. 마운드의 매덕스가 흉악한 눈빛으로 오도네즈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작던 오도네즈의 간담이 이제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쪼그라들었다.
‘끝났군.’
그 순간 매덕스가 직감했다. 저 녀석은 이제 끝났다는 것을. 오랜 세월 메이저리그에서 야구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이 바닥에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고개를 쳐들고 바득바득 덤벼대는 놈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아등바등 달려든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들지조차 않는 쓰레기는 이 바닥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타율 0.147의 타자 레이 오도네즈의 숨통을 끊을 매덕스의 마지막 공이 출발했다. 춤추듯 움직이는 몸쪽 투심 패스트볼. 그리고 그 순간 오도네즈의 오른손이 미끄러지듯 방망이의 상단으로 향했다.
기습 번트.
오도네즈를 우습게 여긴 토드 제아일도, 그가 덤벼들지 않는다고 사형선고를 내린 그렉 매덕스도 간과한 사실이 존재했다. 고개를 치켜들고 따지지 않는다고 하여 인정한 것이 아니다. 소리를 높여 다투지 않는다 하여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도네즈는 한순간도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틱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1990년 이후 무려 11년 연속으로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투수다. 사실상 여섯 번째 내야수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오도네즈가 판단하기에 자신이 그렉 매덕스의 공을 제대로 공략해낼 확률보다는 그의 수비를 뚫을 확률이 그나마 더 높았다.
힘이 죽은 타구가 3루 쪽 방향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번트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배트를 내던진 오도네즈가 빠르게 1루로 돌진했다. 그는 오늘따라 1루까지의 거리가 이상하리 만큼 가깝다고 느꼈다.
‘됐어!!’
오도네즈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찼다. 이걸로 저 망할 토드 제아일 녀석은 당분간 찍소리도 못할 것이다. 오도네즈의 오른 발이 힘차게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간발의 차이였어요.]
[11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자 다운 커버였습니다.]
무리가 가지 않는 피칭폼. 공을 던진 직후 곧바로 달려나와 타구를 처리하는 매덕스는 그야말로 투수 수비의 교과서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쓰레기 치고는 제법이었어.’
매덕스가 마음속으로 나름의 칭찬을 보냈다. 물론 그 칭찬이 오도네즈에게 닿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
“아!!”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만약 지금이 2010년대였다면 챌린지를 시험해보고 싶을 정도의 타이밍. 내가 보기에 이것은 충분히 세이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이었다.
‘젠장, 비슷비슷한 상황이면 무조건 매덕스 편을 들어준다고 봐야 하는 건가.’
노골적인 편파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대한 커리어가 만들어낸 위상은 아슬아슬한 순간 하나의 판단지표로 활용되는 것이 분명했다. 풀이 죽은 표정으로 오도네즈가 들어온다. 오늘 경기도 무안타다. 구석의 제아일놈이 마치 자신이 안타라도 친 것처럼 기세등등하다. 망할 자식. 그래 봐야 자기도 오늘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주제에,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자식이다.
“이봐, 오도네즈.”
“어?”
“이 경기 우리가 이길 거야.”
“어, 어······.”
나의 말에 오도네즈의 어깨가 더 수그러들었다. 최근 엉망진창인 자신의 타격을 마음에 걸려 하는 것같았다.
“난 감독님이 네 차례에 대타를 쓰지 않은 것이 우리가 이기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응?”
기습번트 실패로 물러나 아웃카운트를 하나 보태는 것밖에 하지 못한 오도네즈였다. 그런데도 대타를 쓰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다는 나의 말에 오도네즈의 얼굴에 의문이 담겼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말을 들은 주변 다른 선수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다.
“우린 충분히 역전할 수 있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지. 오도네즈, 지금까지 우리가 이긴 경기들에서 네 역할은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컸어. 1점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1점을 내주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해.”
실제로 수비의 중요성은 시간이 흐르고, 객관적으로 수비를 평가할 도구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높게 평가된다. 지금이야 그저 저 선수 수비가 참 좋네, 에러가 없네 정도에 그치지만 오도네즈의 수비는 저 망할 토드 제아일 녀석의 공격 이상으로 팀의 승리에 기여하고 있다.
물론 나의 말을 듣고 있는 선수들은 그저 내가 오도네즈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오도네즈 본인조차도 말이다.
‘수비고 뭐고, 일단 우리가 이기고 있어야 의미가 있지. 2:1로 지고 있는데 수비는 무슨.’
저 멀리 제아일 놈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덕아웃에서 푹 쉬고 있으라고. 내가 뺏어오고, 네가 지키는거야. O.K?”
허세 가득한 나의 이야기에 오도네즈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런 말 따위가 상황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언제나 상황을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런 허세 가득한 이야기들이다. 헐리웃 영화의 주인공들이 마지막 악당을 그냥 말없이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깨부수기 직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세상을 구하러 다녀오자.’ 따위의 오글거리는 대사를 치는 것처럼 말이다.
알 라이터를 대신해 타석으로 들어간 데시 리레포드가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대기 타석에 있던 헨더슨이 타석으로 올라갔고 그 빈자리를 향해 내가 방망이를 뽑아 들고 올라갔다. 마운드의 매덕스는 여전히 흉흉했다. 덕아웃에서 잔뜩 허세를 떨고 나오긴 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덕스는 여전히 지치지 않았고, 나의 타석이 돌아오려면 저 앞의 헨더슨이 어떻게든 출루에 성공해줘야 했다.
[7회 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 메츠의 1번타자 리키 헨더슨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1회 말 내야 안타를 기록했던 리키 헨더슨 선수. 메츠가 점수를 내기 위해선 역시 헨더슨 선수가 나가 줘야 합니다. 피아자 선수가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메츠에서 가장 강한 타자는 누가 뭐래도 Kang이거든요.]
리키 헨더슨이 자세를 잡았다. 앞선 3번의 타석에서 지겨울 만큼 매덕스의 공을 지켜 본 헨더슨이었다. 그 지저분한 공들을 상대로 쉽게 정타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쉽게 당하지 않는다. 파울 파울 파울 그리고 볼 또다시 파울. 다섯 개의 공을 끌어내고 볼카운트는 1-2. 헨더슨이 여섯 번째 공을 파울지역으로 날려보냈다.
[리키 헨더슨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7회 말, 매덕스 선수의 투구수도 슬슬 위험하거든요.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이렇게 되면 실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뻥!!
헨더슨이 또 하나의 공을 골라냈다. 볼카운트 2-2. 이걸로 매덕스의 투구수도 110개를 넘어간다. 볼끝은 여전했지만 구속은 이미 2마일 이상 떨어진 상황. 매덕스가 여덟 번째 공을 뿌렸다.
딱!!
낮게 깔린 타구가 3루 파울 라인을 따라서 흘렀다. 아슬아슬하게 라인 안쪽으로 구르는 공. 치퍼 존스가 재빨리 달려 나왔지만 늦었다. 헨더슨의 발이 한박자 빠르게 1루 베이스를 발았다.
“세이프!!”
***
7회말 2사 주자 1루. 매덕스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혹은 그저 운이라고 생각했다. 투구폼에 문제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자신의 투구폼은 완벽했다.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투구폼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타석의 저 자식은 신기하리 만큼 체인지업을 구분했다. 한번은 운이고 우연이다. 두 번이라도 아주 운이 좋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이라면?
매덕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타석에 저 자식은 그 엿 같은 캡틴 비디오 토니 그윈과 같은 놈이다. 0.4초와 0.6초를 구분하는 괴물.
인상을 찌푸린 매덕스가 주자 따윈 신경쓰지 않은 채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깊숙한 투심 패스트볼.
진호의 배트가 움직였고 공은 1루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괜찮아.’
볼카운트 0-1. 나쁘지 않다. 두 번째. 공 하나 정도 빠지는 몸쪽 높은 코스 포심 패스트볼. 심판이 잡아준다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던진 공에 진호의 배트가 움직였다.
딱!!
매덕스의 가슴이 덜컥했다. 높게 떠오른 타구. 하지만 다행이다. 곧게 뻗을 것 같던 타구가 우측으로 꺾였다. 1루 폴대를 넘어가는 파울 홈런.
‘그 엿 같은 새끼는 그래도 힘이라도 없었지. 젠장,’
과정은 틀렸지만, 결과는 괜찮다. 볼카운트 0-2. 매덕스가 준비해둔 마지막 비수를 찔러넣었다. 재작년 겨울부터 연습했지만 아직 실전에서 단 한번도 던지지 않았던 변화구. 스플리터였다.
***
정확히 후려갈겼다고 생각했는데 코스가 좋지 않았다. 폴대를 살짝 넘어가는 아쉬운 타구. 하지만 언제까지 아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타석에 섰다.
세 번째 매덕스의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살짝 낮은 코스. 하지만 충분히 스트라이크 콜을 받을만한 높이다. 볼카운트는 0-2.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날아드는 공에 맞춰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그런데
‘어?’
홈플레이트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매덕스가 던진 공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플리터!! 스플리터였다. 젠장, 언젠가 구사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분명 작년까지, 아니 올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도 던진 기록이 없던 공이었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최대한 배트를 움직였다. 내가 하고도 믿기 힘든 배트 컨트롤.
딱!!
강하게 떠오른 타구가 좌중간 펜스를 향해 날아갔다.
‘운이 좋았어.’
갑작스러운 스플리터였지만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제구는 나쁘지 않았지만 떨어지는 폭이 크지 않았다. 만약 같은 팀 존 스몰츠의 스플리터와 같은 낙폭이었다면 안타는커녕 헛스윙 삼진이 됐을 것이다.
[아!! 타구 방향 매우 좋습니다. 앤드루 존스, B.J 서호프 쫒아갑니다만 이건 최소 2루타네요.]
[펜스를 직격한 타구!! B.J 서호프 공을 주워 3루로!! 3루에서!!]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7회 말 Kang의 동점 적시 3루타. 7회말 Kang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마운드의 투수가 35살의 베테랑 불펜 마이크 렘린저로 교체됐다. 그 사이 3루의 치퍼 존스가 언제나처럼 말을 걸어왔다.
“너무 혼자 애쓰지 마. 그래 봤자 어차피 오늘 경기 우리가 가져갈 텐데.”
“무슨 소리야. 우리 셋업이랑 마무리 실력 잘 알면서. 너희 이제 점수 못 가져가.”
“여기서 더 못 가져가는 건 너희 쪽이지. 지금 너희 방망이질 제대로 하는 거 너랑 프레스톤뿐이잖아. 지금 너 지나갔으니 남은 건 프레스톤 뿐인데, 끝난거지. 반면 우리는 다음 공격이 라파엘부터 시작이야. 장담하는데 이 경기 우리가 가져간다.”
치퍼 존스의 호언장담에 내가 웃으며 답했다.
“진짜 그렇게 생각 해?”
“그러면, 넌 아니라고 생각 해? 뭐 아니라고 생각하면 내기라도 하던지.”
“내기?”
“어, 뉴욕에 이번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 하나 있던데, 거기서 거하게 한턱 쏘는 걸로 어때?”
“콜.”
치퍼 존스가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이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타석에 에드가르도가 들어왔다. 오늘 경기 3타수 무안타 2삼진.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위축감따윈 없는 과감한 스윙이다. 파울, 그리고 또 파울.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에드가르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잘 좀 해보라고.’
나의 눈빛에서 속마음을 읽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에드가르도의 입술이 삐죽거린다. 네 번째. 렘린저의 공이 날아갔다.
딱!!
3-유간 강습타구. 치퍼 존스가 몸을 던졌다. 하지만 바닥을 찍은 공이 불규칙한 바운드를 보이며 존스의 글러브를 비껴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발이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
터무니 없는 약속 이었다. 역전 선언이라니. 하지만 진호는 약속을 지켰다. 이제 남은 것은 오도네즈 자신뿐이었다. 너무나도 분한 일이지만 방망이를 쥔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왼 손에 글러브를 끼고 있는 순간은 다르다.
[8회 초 1사 주자 1루. 타석에 치퍼 존스가 들어옵니다.]
[오늘 경기 지금까지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한 치퍼 존스 선수. 팀이 1점을 뒤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자, 옥타비오 초구!!]
98마일의 빠른 공이 날아들었다. 선발로서는 별볼일 없는 저 투수는 1이닝에 전념하는 불펜으로는 리그 전체에서 손에 꼽을만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치퍼 존스 자신은 고작 리그 전체에서 손에 꼽을만한 기량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껏 존재했던 모든 삼루수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기량. 치퍼 존스의 배트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그리고 동시에 2루와 3루 사이에 있던 오도네즈의 몸이 튀어 올랐다. 라인드라이브로 날아드는 공을 낚아채는 터무니없는 수비. 최소 중전안타를 기대하던 치퍼 존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6-4-3 병살.
애틀랜타의 8회 초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났다.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오도네즈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동시에 진호를 바라보는 눈빛에 신뢰가 감돌았다. 그것은 믿음직한 팀의 에이스를 바라보는 눈빛보다 조금 더 깊숙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