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새로운 만남(1)
“오, 자네 왔군.”
“이렇게 초대해주셨는데 와야죠. 그나저나 여긴 매년 더 대단해지는 것 같네요.”
“하하, 당연한 일이지. TV 시장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커질 거야. 그리고 야구는 그런 시장에 딱 맞는 스포츠지. 경기 중간중간 정해진 광고 타임이라니. 그보다 더 좋은 스포츠가 어디 있겠나.”
파티장 입구 Fox-TV의 공동창업자 로저 에일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우리 메츠의 중계권 계약자인 Fox는 이래저래 나와 인연이 많은 곳이었다. 평범한 선수였다면 중계권 계약자고 뭐고 간에 내가 이런 장소에 초대받을 이유는 없었겠지만 전 여자친구인 파멜라 덕분에 쌓인 인맥은 여전히 유효했다.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만 있었다면 파멜라와의 결별 이후 나에게 다시 초대장이 날아오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난 이래 봬도 메이저리그의 MVP 수상자였고 동시에 동양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장 큰 마케팅 수단이기도 했다. 이게 참 묘한 것이 일반적으로 한, 중, 일 삼국은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또 자기들끼리가 아닌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에 한해서는 이상하게 동질감을 갖고 응원을 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나의 인기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처음에 적으로 만나 잠시 팀에서 함께 생활했던 노모 히데오가 일본 방송에서 나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해준 것이 그 원인이었다.
사실 일본에 대해서는 교육받았던 것이 받았던 것인 만큼 좋은 감정보다는 나쁜 감정들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나를 좋아해 준다는데 딱히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한국 이상으로 야구에 인기가 높은 나라인 만큼 나의 시장성 자체도 굉장히 커진 것은 분명 나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이번에 쇼를 하나 새로 런칭 하는데 말이지.”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시즌 중이라서요. 누가 뭐라고 해도 야구 선수한테는 야구가 제일 우선이죠,”
에일스의 은근한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솔직히 말해 나의 연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영어도 프레스톤과 붙어 다니면서 익히는 바람에 남부 사투리가 섞인 발음이었다. 뭐 현지 사람들은 동양인 특유의 발음과 남부의 발음이 섞여 묘하게 섹시한 느낌을 준다고 좋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 에일스가 쇼에 출연하기를 권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파멜라와 나의 성적인 관계를 궁금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놈의 비디오는 대체 언제까지 궁금해할 생각인지.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제시 통해서 연락 주게.”
“네. 알겠습니다.”
LA 원정의 결과가 좋았기에 파티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솔직히 파멜라와 헤어진 이후 너무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개인적인 연애사에 외부의 시선이 모여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조금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 그런 경험을 하는 것과 이번 경우는 그 차원이 달랐다. 결별 이후 가볍게 여자와 술이라도 한잔할라치면 바로 다음 날 타블로이드에 나의 새로운 열애설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다저스와의 이번 시리즈도 오늘의 승리로 최소 위닝 시리즈로 결정 난 상황이다. 오늘은 아주 찐하게 한 번 놀아볼 생각이었다.
‘아,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지······.’
약 한 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난 여전히 혼자였다. 언론에서 계속 띄워주고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이 호들갑을 떨어댄 덕분에 자신감이 너무 과대해졌던 것 같다. 한 시간 전의 내가 부끄러웠다. 애당초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있던지, 최소한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장래성을 인정받은 인물들이다.
‘그래도 야구를 좋아한다던지, 내 연봉이라도 어디서 들어봤다면 이렇게 무관심하긴 힘든데 말이지.’
확실히 조던이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NBA에게 완벽하게 밀리고 있는 MLB의 현주소를 실감했다고 해야 할까? 어찌 됐건 간에 아무래도 오늘은 그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칵테일 한잔을 홀짝이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한 구석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응?’
사실 이런 곳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분쟁들은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괜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나 하고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여성들의 미모가 심상치 않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다수의 여인들.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나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어머, 쟤는 여긴 어쩐 일이야?”
“그러게, 쟤 이번에 Fox에서 하는 쇼 짤리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쇼 자체가 폐지 된거지.”
“아, 맞다 그렇지? 기획 단계에서 엎어졌었나?”
“오디션 부터가 좀 이상한 쇼였어. 제시 너를 짜르고 저런 애를 붙였으니 망할 수밖에.”
“그러니까 말이야. 역할 자체가 양갓집 미모의 아가씨인데 쟤 얼굴 좀 봐. 그런 역할이 말이 된다니?”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몸. 바비인형과 같은 여자들이 모여 수근거린다. 특히 그들의 중심에 선 제시라는 여성의 경우 확연히 눈에 띄는 미모를 자랑했다. 각진 턱 같은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점요소였지만 그런 턱을 미모의 조건 중 하나로 여기는 이곳에서는 100점 만점에 98점 이상은 받을만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 뒷담화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자들. 지금 뒷담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휴, 애새끼들도 아니고. 저게 뭐 하는 짓이람.’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 충분히 그들의 말이 들리는 곳에 있는 갈색머리의 여성. 그들이 수근 거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는 폼이 누가 봐도 저들이 이야기하는 바로 그 ‘쟤’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칵테일 두 잔을 받아들었다. 사실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는 짓거리를 해서 타블로이드에 또 이름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고작 타블로이드에 이름이 한 번 더 오르는 게 두려워서 배알이 꿇리는 것을 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딱히 말은 필요 없었다. 슬쩍 다가가 칵테일을 건넨다. 그런데
‘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새하얀 피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너무 앳되기는 했지만 익숙한 얼굴이다. 분명 이름이······.
“Kang?”
그녀의 입에서 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뭐 파멜라가 워낙 유명한 파티걸이고, 이런 자리에서 언제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인 만큼 그녀와 최근까지 사귀었던 나 역시 어느 정도 유명했으니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여성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유명해질 사람이다. 심지어 물 건너 한국 사람들까지 그 미모를 인정하고 화장품 모델로 초빙할 만큼 말이다.
“저쪽에 꽤 맛좋은 머핀이 있던데, 혹시 배 안 고프세요?”
갑자가 나타나 머핀을 권하는 뜬금없는 나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황당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 황당함이 미소로 바뀐다. 지금 내가 자신에게 말을 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다. 영리한 여자다.
“글쎄요, 배는 안 고픈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권할 정도로 맛있는 머핀이라니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그러면 저쪽으로 가실까요?”
내가 내민 손위에 그녀의 손이 올라왔다. 그녀를 자극하던 제시라는 여자를 비롯한 무리들의 시선이 나의 등에 팍팍 꽂힌다. 하지만 원정경기 5만명의 적대적인 시선 앞에서 홈런을 쳐냈던 나다. 고작 이십대 초반 여자애들 몇몇의 시선 정도야 가렵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그렇게 혼자 있던 겁니까?”
“글쎄요, 그쪽이랑 비슷한 신세죠 뭐.”
“네? 비슷하다니, 아 설마 최근에 누구랑 헤어지기라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아, 설마 모르시는 건가?”
“네?”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 얼굴에 그 몸매에 여자들이 관심도 안 준다는 거?”
“그거야 뭐······.”
“당분간은 안될 거에요. 그쪽 찍혔거든요. 파멜라가 아직 그쪽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이런 파티에서 공공연하게 파멜라의 엑스를 유혹하는 건 진짜 미친 짓이잖아요. 알아서 기는 거죠. 뭐 그쪽이 그걸 무시할 만큼 매리트가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솔직히 그쪽은 우리 업계 사람도 아니잖아요. 반면 그녀는 단독 쇼도 가지고 있고, 이 바닥에 몇 안 되는 ‘여자 단독 주연 배우’니까요.”
아, 단순히 나의 매력에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 이유였다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러면 당신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어차피 전 이제 반쯤 글러 먹은 상황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요. 망할. 오디션에서 밀린 주제에 마치 내가 비겁한 수라도 쓴 것처럼 굴다니.”
그녀의 시선이 잠시 그 여자들 쪽을 향했다. 흉흉하다. 대체 아까는 왜 참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까는 왜 참고 있던 거에요?”
“참아야죠. 반쯤 글러먹은 거지 완전 글러먹은 건 아니니까요. 다음에 볼 오디션이 저 계집애 아버지가 연출하는 쇼거든요. 실력으로는 내가 최고니까, 여기서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따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저 망할 계집애 속이 풀릴 때까지 얻어맞아 줘야죠. 그나저나 이 머핀 정말 맛있네요. 망할 드레스 때문에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이러다가 드레스 터져버리겠네.”
앙상하게 말라 뼈밖에 없어 보이는 그녀가 머핀을 크게 몇 입 물어 삼켰다.
“얻어 맞아야 되는거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 얼굴, 이 몸매의 남자와 그렇게 자리를 떴는데?”
“어머, 생각보다 더 뻔뻔하시네요. 자기 입으로 미모에 몸매라니. 아, 아시안들은 내성적이라는 인종 차별은 아니니깐 오해하지 말고요. 어쨌거나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도와주려고 하신 거 이제 일어나서 저기 저 애들 옆을 지나가면서 ‘무슨 여자가 걸신 들린 것도 아니고 정말 음식 한 번 정떨어지게 먹네.’ 라고 좀 중얼거려 주시겠어요?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실 때도 정말 재수 없다는 듯이 좀 일어나주시고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움직였다. 파멜라와 헤어지고 반년. 생각보다 빠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다저스와 메츠의 시리즈 3차전. 벌써 시리즈 2패를 기록한 다저스인데요, 과연 연패를 끊어낼 수 있을까요?]
[다저스도 전체적으로 나쁜 전력이 아닌데 메츠의 기세가 상당히 무섭습니다. 최근 30경기에서 24승 6패. 어마어마한 승률이에요.]
[사실 그럴만도 합니다. 지난 99년의 사기적인 핵타선은 올러루드가 빠지고, 벤츄라가 부진하면서 조금 약해졌습니다만 대신 99년에는 꾸준히 약점으로 지적됐던 선발진이 매우 단단해졌거든요.]
[제이슨 슈미트, 알 라이터, 케빈 어피어로 이어지는 선발라인은 정말 강력합니다. 5월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 세 선수가 기록한 승리만 무려 17승입니다.]
[게다가 타선이 조금 약해졌다고 하셨는데 솔직히 최근만 봐서는 그것도 아닙니다. 중심타선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어요. 특히 Kang과 프레스톤의 성장이 눈부십니다. 아직 5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각각 14홈런 17홈런을 기록 중입니다.]
[하지만 오늘 선발 투수는 아무래도 다저스 쪽이 조금 무게감이 있습니다. 연봉조정을 통해 5년차 최고연봉을 갱신한 Park이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메츠의 선발인 릭 리드 선수도 최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Park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죠.]
[뭐 98년의 릭 리드라면 Park과 비교해도 떨어지는 투수가 아닙니다만 최근 기록을 보면 확실히 한수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올해를 끝으로 FA자격을 얻는 찬화 선배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합법적 약물이라 불리는 FA로이드의 힘일까? 마운드의 찬화선배가 보여주는 공의 위력이 범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