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새로운 만남(2)
98년의 첫 만남 이후로 햇수로는 4년, 만으로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만 25세. 얼굴에 아직 앳된 기운이 남아 있던 찬화 선배도 어느덧 만으로 28세. 피지컬적으로 완성된 몸 위에 경험이라는 것이 슬슬 개화하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뻐엉!!
“스트라잌!!”
97마일 포심패스트볼이 존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여전히 좋은 공이다. 하지만 98년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해 더 좋아졌는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찬화 선배는 강해졌다.
뻐엉!!
[초구 스트라이크 직후 공 두 개 연속 볼입니다.]
[Park 선수. 오늘 제구가 조금 불안한데요?]
고질적인 제구 불안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찬화 선배는 분명 강해졌다.
“후우.”
마운드에서 잠시 내려와 로진백을 두들기며 호흡을 가다듬은 찬화 선배가 다시 마운드에 섰다. 볼카운트는 2-1, 타석에 선 타자는 리키 헨더슨. 지난 몇 번의 만남에서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안겨줬던 상대다.
찬화 선배가 네 번째 공을 던졌다.
뻐엉!!
[아, 볼, 볼입니다. 3구 연속 볼. 구위는 참 좋은데 오늘도 제구가 영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피칭 폼이 너무 역동적이다 보니 릴리즈 포인트가 안정되기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저 선수는 구속을 조금 버리더라도 릴리즈 포인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요. 사실 선발 투수가 타자를 잡는데 꼭 100마일짜리 공이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2, 3마일 구속이 떨어지더라도 제구가 잡히는 쪽이 더 좋을 겁니다.]
[볼카운트는 3-1. 상대는 압도적인 수치의 도루 기록을 가진 리키 헨더슨입니다. 게다가 후속 타자는 99년의 MVP 위너 Kang!! 지금 이렇게 허무하게 볼넷을 허용하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장타율이 높은 타자를 상대로 어쩔 수 없이 볼넷을 허용하는 건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Park의 구위와 헨더슨의 파워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냥 복판에 펑펑 던져도 충분하거든요.]
찬화 선배는 여전히 그 좋은 구위에도 불구하고 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커멘드를 추구했다. 뭐 덕분에 컨디션이 좋아서 그 커멘드가 제대로 먹혀드는 날에는 그야말로 전성기 로저 클레멘스 부럽지 않은 위력을 보여주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늘처럼 뜬금없는 볼 질로 투구 수를 낭비했다. 그 결과 던진 공의 숫자에 비교해 적은 이닝을 소화했고 그것은 선발투수에게는 심각한 결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화 선배는 강해졌다.
[제5구!!]
부웅!!
“스트라잌!!”
[몸쪽 꽉 찬 97마일 포심 패스트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선수 정말 구위 하나는 대단합니다.]
[방금 헨더슨 선수의 배트가 거의 1인치는 떨어졌었죠?]
[자, 이제 볼카운트는 3-2 풀카운트입니다.]
여섯 번째, 찬화 선배가 공을 던졌다. 깊숙하게 상체를 낮춘 헨더슨이 그 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체인지업. 마운드의 찬화 선배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체인지업!! 멋진 서클 체인지업입니다. 올해 가장 달라진 점이 바로 저 체인지업입니다. 작년과 비교하면 한층 더 적극적으로 체인지업을 구사하고 있어요.]
[올 시즌 지금까지 투구내용을 살펴보면 체인지업의 비중이 11%가량으로 작년과 비교하면 2배 가깝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Park의 경우 포심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스플리터까지 상당히 다양한 공을 던졌지만, 실제로 쓸만한 공은 포심과 커브 두 가지인 투 피치 투수라고 봐야 했거든요. 다양한 공을 던지기는 하지만 그저 보여주기 수준에 그쳤단 말이죠. 하지만 최근 던지고 있는 이 체인지업은 다릅니다. 이제는 Park에게도 세 번째 공이 생겼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타석에 2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99년 MVP 이후로도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Kang. 특히 올 시즌의 경우 예년과 비교하면 파워가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이제 5월 2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홈런이 14개입니다.]
[현재 리그 전체에서 일곱 번째로 많은 홈런을 기록 중인 Kang. 이대로라면 50홈런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 50홈런이라. 물론 최근 60개, 심지어 70홈런까지 기록하는 선수가 나오는 바람에 조금 빛이 바랜 느낌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한 시즌 50개의 홈런은 정말 어마어마한 거거든요.]
[메이저 역사상 서른 번 밖에 나오지 않았던 대기록입니다. 기록한 선수 숫자로 따지면 열일곱 명밖에 되지 않아요.]
[물론 아직 시즌은 초반이고 벌써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설레발이기는 합니다만, 2년 차에 40홈런, 그리고 3년 차에 35홈런을 기록할 때에 주로 하반기에 몰아치는 경향을 보여줬던 걸 생각해본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헨더슨 씨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체인지업이다. 물론 결정구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리그 평균 수준은 되는 공이다.
‘체인지업이라.’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던져주면 좋긴 하겠지만 나에게 체인지업을 던질 리 만무했다. 현재 리그를 떠도는 나의 별명은 A bastard like Fucking Tony Gwynn. 빌어먹을 토니 그윈 같은 개자식이었다. 브레이브스와의 3차전에서 패배한 매덕스가 언론을 상대로 했던 말이었다. 예전에 했던 이야기인 Except for that fucking Tony Gwynn. 즉, 이 메이저리그에서 오직 그 빌어먹을 토니 그윈을 제외하고. 라는 말에 대구 되는 이야기였다. 그 입이 험한 아저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다.
마운드의 찬화 선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타석에 섰다. 물론 찬화 선배의 답은 없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찬화 선배에게 나는 후배가 아닌 무시할 수 없는 적이었다. 지금 선배는 나를 상대로 세운 마음의 칼날을 그런 인사 따위로 무뎌지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강한 적.
찬화 선배의 각오에 대답해주기 위해 내가 방망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
아직 인터넷이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 통신을 통해 이뤄지던 시절. 메이저리그 야구에 대한 정보를 얻고 공유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박찬화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그 어려운 것을 억지로 해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1998년 ADSL의 전국보급. PC의 대중화. 세상은 빠르게 발전했고 알음알음 모여있던 그 사람들 역시 시대의 흐름 속에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MLB Town.
MLB Mania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메이저리그 팬 사이트. MLB Mania 쪽이 박찬화의 팬들을 기반으로 한 사이트라면 이 MLB Town 쪽은 강진호의 팬들을 기반으로 한 사이트라고 볼 수 있었다. 개인이 운영했기에 강진호가 대단한 활약을 보인 날에는 종종 트래픽 초과로 뻗어버리는 일이 잦았던 이 사이트가 마침내 메이저라고 볼 수 있는 대기업의 후원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햐, 확실히 돈이 좋기는 좋아. 뭐 배너는 좀 거슬린다만 그래도 강진호랑 박찬화 맞대결인데 서버가 쌩쌩하네.”
MLB Town의 초창기 멤버인 형석은 역시 야구는 누군가와 함께 응원해야 제맛이라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엠타(MLB Town)에는 형석과 같은 신념의 소유자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경기 날에는 하나의 게시물을 만들고 그 밑으로 주르륵 댓글들을 달아가며 경기를 응원하곤 했는데 강진호가 활약하는 날에는 시스템상 한계치인 999개의 댓글을 채우는 게시글이 대여섯 개 이상씩 생성되고는 했다.
오늘 역시 형석은 강진호 응원 글에 댓글을 작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아직 진호의 타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강진호의 타점을 위해선 그 이전 타자인 리키 헨더슨이 출루에 성공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 이 새끼 이거 또.”
상쾌하게 댓글을 작성하고 게시판을 훑어보던 형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들어 늘어난 분탕 종자 중 하나의 글 때문이었다.
-스즈키 이치로 25경기 연속 안타!! 동양인 타자의 새로운 역사를 쓰다!!-
올해 시애틀에서 데뷔한 NPB 출신의 타자에 대한 과도한 찬양의 글. 내용은 그의 세부적인 기록들과 사진들을 바탕으로 진호의 타율이 그보다 훨씬 적다는 점을 교묘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야알못(야구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
-아직 메이저에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마이너급 선수가 1달 반 반짝 활약했다고 MVP 위너와 비교하는 건 좀 아니죠. 이치로 재능이 괜찮아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강진호랑 비교하려면 최소한 지금 같은 활약을 시즌 내내 해주고 와야 하는 겁니다. 커리어에서 한 달 반만 잘라서 보면 강진호 선수도 지금 이치로만큼 타율 보여주는 기간 있습니다.-
-증명 같은 소리 하네. NPB면 AAA급이거든? 거기서 MVP 찍고 온 애가 이만큼 날뛰는데 어휴, 야알못 같으니. 내가 야알못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인터넷 예절 따윈 지키지 않는 무례한 말투였지만 괜찮았다. 참을 수 있었다. 멍청한 내용 역시 멍청한 것은 죄가 아닌 만큼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야알못 자식이 감히 나한테 야알못이라고?”
형석의 가슴 깊은 곳, 키보드를 사용하는 전사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볼카운트 3-1. 찬화 선배의 공이 번번이 존 밖으로 빠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구가 영 되지 않는 날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찬화 선배의 투지는 조금도 사그라들지않았다.
들쭉날쭉한 제구력을 가졌음에도 정교한 커멘드를 추구하던 선배는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것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과 훌륭한 커브를 가졌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구종을 원하던 선배는 여전히 확실한 써드피치를 손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 선배는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공이 들어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터프함, 그리고 위험한 순간에도 조금 부족한 변화구를 과감하게 집어넣을 수 있는 담대함을 손에 넣었다. 98년에 비해 한층 더 강력해진 멘탈리티. 그렇기에 2001년의 박찬화는 1998년의 박찬화보다 강했다. 하지만 01년의 찬화 선배가 98년의 찬화 선배보다 강해졌듯이 01년의 나 역시 98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찬화 선배처럼 정신적인 부분의 성장이 아니었다.
따악!!
[Kang!! 몸쪽 빠른 공을 그대로 잡아당깁니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 넘어갔습니다!!]
시즌 열다섯 번째 홈런이 다저 스타디움의 담장을 넘어갔다.
***
“Kang이라고? 엄청 대단하지. 2년 차에 MVP. 게다가 메츠에서 작정하고 밀어주는 선수잖아. 연봉협상자격도 없는 선수한테 7+1년 83mil짜리 계약은 유례가 없는 계약이었어.”
“풉!! 잠깐만.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83million? 맙소사. 8,300만 달러라고요?”
“어우, 갑자기 왜 마시던 걸 흘리고 그래? 더럽게. 어서 이걸로 닦아.”
헐리웃 최고의 스타인 브루스 윌리스가 99년 식스 센스에 출연료로 받은 것이 1,400만 달러다. 그리고 지난 2년간 그에 근접한 계약이라고는 올해 개봉할 영화 오션스 일레븐에 출연하는 브래드 피트의 1,000만 달러 계약이 전부였다. 물론 러닝 개런티를 더할 경우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올라간다지만 야구 선수 역시 각종 스포츠 협찬을 더할 경우 금액이 뛰는 것은 마찬가지다.
“야구 선수가 그렇게 고액연봉자였어요?”
“뭐, 메이저리거는 경기가 매일 있기도 하고, 상위권 선수는 대체 불가 자원이니까. Kang정도면 배우로 치면 거의 브래드 피트나 톰 크루즈급이지.”
“허, 진짜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 사람.”
“근데 갑자기 Kang은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네. 데이트 하기로 했거든요.”
“응?”
엉뚱한 것은 알고 있었다. 99년 인기도 없던 TV 드라마에 잠깐 얼굴을 비춘 것이 전부인 배우 지망생. 매일같이 오디션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웨이트리스. 얼굴 역시 특출난 것도 아닌 동료의 농담에 잭슨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