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새로운 만남(3)
“기분 안 좋아 보이네요? 이상하네. 분명 오늘 홈런 쳤다고 들었는데.”
“어! 그걸 어떻게? 야구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일하는 친구가 관심이 좀 많아서요. 대충 듣고 왔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분이 시더라고요. 우리로 치자면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급 정도 되신다면서요.”
“글쎄요, 그쪽보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쪽이 더 적절한 비유일 것 같네요.”
“더 젊고 더 잘생긴 라이징 스타쪽이라 이 말씀이시군요.”
그녀가 짓궂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이 여자 얼굴은 선하게만 생긴 주제에 직설적인 동시에 성격이 좀 고약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그렇죠. 더 젊고 더 잘생긴 라이징 스타쪽이죠.”
“우와, 자기 입으로 더 젊고 더 잘생겼다니. 생각보다 뻔뻔하시네요.”
“이정도는 뻔뻔해야 야유하는 팬들 앞에서 홈런도 치고 그럴수 있거든요.”
“아, 맞다. 홈런. 그거 엄청 좋은 거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그게 말이죠.”
***
1회 초. 진호가 쳐낸 홈런이 담장을 넘어갔다. 안 그래도 노리는 곳으로 공이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서 얻어맞은 홈런이다. 투수에게 이보다 안 좋은 소식이 또 있을까.
‘저 자식, 저걸 넘기네.’
하지만 마운드의 찬화는 웃었다. 작년 스포츠 심리학 박사인 하비 도프만을 만난 이후 찬화는 달라졌다.
‘마운드에 오르면 다음에 던질 공 하나에만 집중해라.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고 좋은 생각만 해라. 최선을 다해 공을 던졌음에도 홈런을 맞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비 도프만의 말이었다. 그는 과도한 부담감에 짓눌려있던 찬화를 해방시켜주었다. 대부분 사람은 찬화가 에이전트를 바꾼 것이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요인은 바로 저 하비 도프만이 보리스 코퍼레이션 소속의 스포츠 심리학자라는 점이었고, 보리스 코퍼레이션이 자신들의 선수를 매우 체계적으로 관리해준다는 부분이었다.
찬화가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신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 타자는 NPC가 아니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패배는 잘못이 아니다. 투수에게 중요한 것은 패배한 그 다음이다.’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올라왔다.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포수. 아니 이제 훌륭함을 넘어서 올타임 포수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이다. 앞서 상대한 진호도 훌륭한 타자였지만, 타석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피아자의 퍼포먼스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쌓아온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메츠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타자는 진호가 아닌 피아자일 것이다.
노리는 곳은 몸쪽 높은 공. 가장 빠른 포심 패스트볼. 찬화의 초구가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뻐엉!!
“스트라잌!!”
원하던 곳에서 조금 비껴나간 공. 하지만 나쁘지 않은 공이었다. 괜찮다. 모든 공을 원하는 곳에 넣을 수 있는 투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찬화가 힘차게 투구판을 밟았다.
***
“짜식이 별것도 아닌 게 덤비기는.”
이치로를 물고 빠는 멍청한 녀석을 가볍게 응징해준 형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저런 류의 인간들이 그렇듯 마지막에는 ‘내 말이 다 맞고 너희는 틀려!! 왜냐하면 내 말이 다 맞으니까!!’ 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정신승리를 하긴 했지만 이건 어떻게 봐도 명백한 형석의 승리였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 엠타(MLB Town)는 강진호의 팬보이들이 모인 사이트였고 이런 류의 논쟁이란 결국 누가 더 많이 편들어주느냐로 승패가 갈리곤 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올해 진짜 우리 진호 뭔가 일 내는 거 아니야? 이제 5월 20일인데 15호 홈런이라니. 보자 오늘 경기가 43차전이니까 아직 119경기나 남은 거잖아.”
-축 강진호 15호 홈런!! 시즌 56홈런 페이스!!-
진호의 홈런 페이스를 계산한 것은 형석만이 아니었다. 벌써 댓글 창에는 진호가 56호 홈런은 물론이거니와 하반기에 타오르는 특성상 60홈런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설레발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보자, 11개라······. 으, 이거 좀 아쉽네. 이번 시즌 지금까지 실패가 1개 뿐이기는 한데 도루 시도 자체가 너무 적은데? 확실히 고액연봉자가 됐으니 팀에서 관리 들어갔다 이건가? 그래도 50-50이라도 떡 해주면 세계 최초잖아. 와, 진짜 그렇게 되면 포스트시즌 못 나가도 MVP 다퉈 볼 만한 기록일 것 같은데.”
홈런이 늘어나면 도루는 줄어든다. 당연한 일이다. 홈런을 위한 몸과 도루를 위한 몸은 다른 법이니까. 실제로 각종 언론에서는 98년 진호의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비교하며 그 몸이 얼마나 불었는지를 통해 그의 도루가 줄어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뛰어난 영어 실력, 매년 70달러가량의 돈을 들여가며 진호의 경기를 지켜보고, 자신이 소지한 비싼 툴들을 통해 그 경기를 편집해서 인터넷에 공유하곤 하는 형석이 보기에 진호의 주루는 그 몸이 불어난 것에 비해 그리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작년 진호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50도루에 성공하지 못하고, 도루 성공률 역시 5% 가깝게 떨어진 것은 98년 99년에 비해 그의 도루에 대한 견제가 심해졌다는 점, 그리고 진호 스스로가 조금은 몸을 사린다는 점이 더 컸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호만한 선수가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는 것보다 도루 몇 개 덜 하는쪽이 팀에게는 이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강진호라는 선수 개인이 만들어가는 위대한 기록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형석은 진호가 올 해 꼭 50-50이라는 성적을 기록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
“아, 그런데 오늘 경기 쉽게 가져가나 했더니, 박 찬화도 만만치 않네. 공이 날리는데도 이정도로 꾸역꾸역 경기를 가져가다니. 이정도면 FA로 진짜 억 소리 나게 받는 것도 꿈은 아니겠는데?”
***
“그래서, 경기에서 져서 기분이 안좋은 거에요?”
“응? 아니에요. 경기는 이겼는걸요.”
“이겼다고요?”
앤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네, 7:2로 이겼어요.”
“그 Park이라는 분이 엄청나게 잘 던졌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야구에 점수를 내는 방법이 투수가 던진 공을 치는 것 말고 또 있는 건가?”
“그건 아니고요. 아, 그보다 해서웨이 양은 좀 어때요? 어제 제가 그 여자들 앞에서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는데.”
“재키에요.”
“네?”
“헤서웨이 양이라고 부르는 건 좀 오글거리니까 재키라고 부르라고요. 친구들은 다 그렇게 부르니까.”
“재키라면······. 재클린?”
“네, 그게 제 미들 네임이에요.”
“알겠어요. 저도 그러면 강 말고, 진호라고 불러줘요.”
“알았어요. 어쨌거나 제 소감은, 진호는 절대 연기하지 말고 야구에 전념하는 걸 추천하고 싶다예요.”
“허, 저 이래 봬도 드라마에 몇 번이나 출연했거든요?”
“알아요. 파멜라 인맥 빨로 몇 번 출연했잖아요. 누군 그런 거 한 번 나가려고 오디션만 수십번을 보는데 말이죠. 아,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유명인이 쇼에 나와주는 건 쇼 입장에서도 이득이니까요. 그냥 내 신세가 처량해서 한 이야기에요.”
미래, 헐리웃에서 손에 꼽히는 스타인 앤 해서웨이의 신세 한탄이라니. 어차피 성공할 그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재밌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조만간 그녀는 프린세스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그리고 로캔틱 코미디로 떴다가 사라진 수많은 여자 배우들과 달리 과감한 작품들을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스타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에 그저 웃으며 이야기 해줄 수 있었다.
“다 잘 될 거에요.”
“어머, 지금 사탕발림 말 하시는 거예요? 흐음, 이건 좀 너무 뻔한데. 이걸 모른 척 넘어가 줘야 하나?”
안 그래도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뭐, 사탕발림 말이라는 거 알아도 기분 좋으니 넘어가 드리죠.”
장래 대스타가 될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일까? 그녀의 발랄함이 정말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니면 어쩌면 이런 발랄함이 있기에 대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이야기에 가볍게 웃었다.
“어!! 웃었다. 드디어 웃었네요. 아까 전부터 시무룩하게 분위기 잡고 있길래 그 날 술취해서 데이트 신청 잘못한 거 후회하고 있는 거 아닌가 엄청 고민 했잖아요. 솔직히 그쪽 같은 사람이 나같은 사람을 파티에서 잠시 어울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제대로 된 데이트 신청 하는 건 좀 웃기잖아요. 귀여운 여인도 아니고 말이에요.”
“진호.”
“네?”
“그쪽이 아니라 진호라고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이 데이트가 귀여운 여인이 아니라 노팅힐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우와, 이건 좀 심장에 다이렉트로 꽂혔네요. 노팅힐이라니. 뭐 둘 다 줄리아 로버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쪽이 저에겐 훨씬 더 좋겠네요.”
“디카프리오가 주연인 노팅힐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나의 능청스러운 이야기에 그녀가 소리내 웃었다. 20살 다운 발랄함. 한참을 깔깔거리던 그녀가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시합도 이겼고, 데이트 신청을 잘못한 것도 아니고. 대체 뭐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던 거에요?”
“그게 그러니까.”
***
6회 초, 찬화 선배의 커브를 밀어쳐 1루로 출루하는 데 성공했다.
[Kang이 시즌 21번째 멀티안타 경기를 만듭니다. 와, 어마어마하네요.]
[1회 초 홈런에 이어 내야의 키를 살짝 넘어가는 안타입니다. 이걸로 타율이 0.341인가요?]
[네. 본래도 대단한 타격이었습니다만 확실히 이번 시즌은 한층 더 성장했다는 느낌입니다. 증량으로 힘이 좋아진 게 효과가 있어 보이네요.]
[그렇습니다. 방금도 배트에 힘이 조금만 약했으면 그대로 내야 팝플라이였거든요.]
1루에 서서 마운드를 바라봤다. 나의 출루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스코어는 2:2. 1회 초부터 찬화 선배의 제구가 흔들리고 있는 걸 고려한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지금까지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찬화 선배가 대단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게다가 내년이 FA라고 승부에 사정을 봐줄 수는 없었다. 세 걸음 반. 암 가드와 풋 가드, 배팅 장갑을 벗고 도루 장갑을 낀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슬쩍 움직였다.
다저스의 수준급 이루수 마크 그루질라넥이 나를 힐끔 바라봤다. 뭐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찬화 선배의 타이밍을 뺏는 것이다. 애초에 투수의 피칭 타이밍만 완벽하게 훔칠 수 있다면 2루는 훔친 것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슬라이드 스텝은 엄청 좋네.’
마운드의 찬화선배가 나를 힐끔 한번 바라보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공을 던졌다. 나무랄 곳이 없는 슬라이드 스텝이다. 정지 동작에서 공을 던지기까지 1.1초 정도? 평균적인 투수들보다 0.2초 이상 빠른 수준급의 동작이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공이 빠른 찬화 선배였다. 이 0.2초는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리그 평균보다 2배 가깝게 높은 도루 저지율은 운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또 한 번 나를 힐끔 바라본 찬화 선배의 양손이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정지. 그리고 물 흐르듯 선배의 투구 동작이 이어진다.
‘지금!!’
찰나의 찰나를 쪼갠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찬화 선배에게 도루를 성공 하려면 오직 지금 이 타이밍 뿐이다.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나의 완벽한 도루 타이밍 때문이었을까? 공을 던지는 찬화 선배의 균형이 조금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다.
‘됐어. 성공이다.’
성공에 대한 확신. 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나의 왼손이 2루 베이스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