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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19화 (119/210)

# 119화.

삶의 부채(1)

“세이프!!”

2루로 공이 날아드는 타이밍이 늦었다. 굳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지 않아도 됐음 직한 타이밍. 이상했다.

[어? 마운드의 Park이 이상한데요?]

[어디 다친 건가요?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습니다.]

[다저스쪽 의료진이 올라갑니다.]

마운드의 찬화 선배가 허리에 손을 얹고 몸을 수그린 채 서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워 보인다.

‘설마 허리 부상?’

찬화 선배의 허리 부상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그 부분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찬화 선배에게 그 부분의 관리에 관한 이야기를 몇 차례나 넌지시 건넸었다. 그래서였을까? 본래 역사와 달리 지금쯤 발생했던 찬화 선배의 허리 부상은 터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우리와의 경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기분이 조금 찝찝했다.

[아, 교체, 교체네요.]

[이런, 별다른 징조도 없이 갑자기 부상이 터집니다.]

[본래 투구라는 것이 정말 사람의 몸에 굉장한 무리를 주는 동작이거든요. 부디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하지만 나의 기분은 기분이다. 꾸역꾸역 우리를 막아내던 선발투수가 부상으로 내려가 뒤숭숭해진 다저스를 이제는 그 원한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은 피아자 씨가 마음껏 두들겼다.

***

“아는 사람이 부상 당한 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연락은 된 거예요?”

“네, 끝나고 잠깐 통화 했는데 일단 부상자 명단에 올라갈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같은 팀도 아니었는데 친한 사이었나 봐요?”

재키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난 찬화 선배와 친한가? 그는 한국인으로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구자였고, 개인적으로 존경할만한 선배였고, 현재 셋밖에 되지 않는 한국인 메이저리거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LA와 뉴욕이라는 물리적인 거리는 생각보다 컸다. 나와 찬화 선배 사이의 교분은 그리 깊지 못했다. 내가 찬화 선배의 부상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나로 인해서 찬화 선배가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찬화 선배의 메이저 커리어는 그 기대치에 비하면 그리 좋지 못했다. 2000년 까지만 하더라도 찬화 선배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치는 사이 영 컨텐더 급의 리그 에이스였다. 운이 좋으면 커리어 중에 사이 영도 한 번 정도는 노려볼법한 포텐셜. 하지만 2002년 이후의 선배는 냉정하게 말해 메이저급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배에게 남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메이저리그의 선구자. IMF라는 국가적 재난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아이콘이라는 타이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 명성의 절반 이상을 내가 가지고 온 상태였다. 뭐, 타임슬립을 해서 살아가는 이상 세상이 이전과 똑같게 돌아가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찬화 선배처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가리비아처럼 이득을 보는 이도 존재했다. 그 모든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찬화 선배는 충분히 나의 주변 인물이라고 할 만했고 신경을 쓰지 않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찬화 선배가 지금의 커리어를 쭉 더 이어갔으면 했는데.’

그렇기에 대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찬화 선배가 본래보다 훨씬 더 좋은 커리어를 가진 선수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배가 자신의 몸을 조금 더 관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건강한 찬화 선배는 톰 힉스가 이야기했듯이 텍사스라는 빅마켓에서조차 1선발로 활약 가능한 투수였다.

“그나저나 야구는 뭔가 굉장히 정적이고 부상 위험 같은 거 거의 없이 하는 스포츠라는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다치기도 하는군요.”

“설마 야구 본 적 없어요?”

“음, 오다가다 TV에서 몇 번 해주는 걸 보기는 했어요. 뉴스에서 나오는 하이라이트도 가끔 봤고요.”

“흐음······.”

빅맥과 소사의 홈런 레이스로 인해 조금 붐업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야구는 정적이고 조금 나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다. 미식축구야 뭐 이미 80년대부터 MLB와의 인기 순위가 역전되기 시작해 이제는 미국 최고의 스포츠는 NFL 그리고 두 번째는 FBS(Football Bowl Subdivision, 대학미식축구 최상위 리그)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농구 역시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 이후 꾸준히 치고 올라와 이제는 NBA가 MLB보다 더 인기 있다는 통계도 몇몇 타블로이드에서는 나돌 정도였다. 그렇기에 스무 살 젊은 나이인 그녀가 야구를 제대로 접한 적이 없다고 해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야구는 최고의 스포츠였다. 아마 그녀도 직접 야구를 본다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주에 뭐 해요?”

“이번 주요? 시프트가 어떻게 되더라. 일단 내일이랑 모레는 아르바이트네요. 왜요? 아직 오늘 데이트도 끝나지 않았는데 애프터 신청하려는 거에요?”

“그게 뭐 애프터라면 애프터인데······. 그 아르바이트 뺄 수 없어요?”

“잭슨한테 부탁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진짜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요.”

나의 입에서 약간의 음흉한 속셈을 담은 제안이 흘러나왔다.

***

띵동

“네, 나가요.”

‘대체 누가 온 거지? 마이클 말로는 딱히 올 사람은 없다고 그랬는데.’

최근 몇 가지 일 때문에 뉴저지의 집을 떠나 큰아들의 브루클린 아파트에서 잠시 머무르던 케이트 맥컬리 헤서웨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이 서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우가 되겠다며 LA로 뛰쳐나간 딸의 얼굴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 엄마가 여길 왜?”

“재키. 너야말로 온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맙소사. 너 혹시!!”

앤이 화급히 손사레를 치며 케이트의 말을 부정했다.

“어휴, 뭘 상상하건 그런 쪽은 전혀 아니거든요. 그냥 일이 생겨서 온 김에 겸사겸사 들른 거야.”

“오, 주여. 너 남자 생긴 거구나.”

어머니의 귀신같은 눈치에 앤의 가슴이 덜컥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뮤지컬등으로 단련된 몸이다. 그렇게 쉽게 얼굴에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표정관리가 무색하게 케이트는 이미 앤을 완벽하게 읽고 있었다. 본래 자식이란 아무리 표정 관리해봤자 엄마의 눈치를 이겨낼 수는 없는 법이다.

“맞네, 남자. 어휴, 이 지지배가 대학이나 가라고 했더니 뭐 드라마 단역 하나 맡았다고 덜커덕 LA로 가더니만 그것도 몇 달 만에 끝나고, 이제는 결국 남자라니. 누구야.”

“아, 남자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그 바닥을 몰라? 너 PD나 그런 인종들 사탕발림에 넘어가봤자 떨어지는 것 아무것도 없다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해. 결국, 이 바닥은 실력이라고. 이 엄마도 소싯적에 그렇게 해서 결국 실력으로 배역 따냈다고 말했잖아.”

“엄마가 그런 거 할 때랑 지금은 다르거든? 그리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

LA에서의 원정을 끝내고 돌아온 홈구장. 관중석을 가득 메운 홈팬들의 환호가 반갑다. 익숙한 홈구장의 구조도 구조지만 역시 이런 홈팬들의 열렬한 환호야말로 홈구장에서 조금 더 나은 활약을 보이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오늘은 좀 특별한 것도 있고 말이지.’

뜻밖에도 재키의 고향은 이곳 뉴욕. 브루클린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 뉴저지로 이사를 가긴 했지만 지금도 연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그녀의 오빠 마이클이 브루클린에 아파트를 얻어서 생활 중이라고 했다. 그녀를 초대한 데에는 약간의 음흉한 속셈도 있었던 만큼 조금은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뭐 부모님 집도 아닐뿐더러 보호자의 집으로 꼬박꼬박 들어가야 하는 십 대 청소년도 아닌 만큼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안 왔네.’

구단에 부탁해서 받아둔 자리는 아직 텅 비어있었다. 아주 괜찮은 테이블석으로 그녀의 오빠 몫까지 미리 부탁해서 받아둔 만큼 나의 활약을 지켜보기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성 소수자인 그녀의 오빠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다르게 스포츠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라고 했으니 겸사겸사 내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인지 어필하기도 좋을 테고 말이다.

게다가 오늘 상대는 우리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영원한 호구팀 몬트리올 엑스포스였다. 세계 최초의 10,000패 프로 구단인 필리스, 1년 바짝 달리고 폭풍세일로 꼴찌로 회귀하는 플로리다. 캐나다에 위치한 덕분에 여러모로 답이 없는 몬트리올. 이 세 구단은 브레이브스와 우리 메츠에 치여 매년 처참한 승률을 기록했었는데 올해의 경우 필리스와 플로리다가 제법 괜찮은 보강을 한 덕분에 중부지구의 피츠버그와 함께 양대리그 최저의 승률을 다투고 있었다.

다만 그런 몬트리올이라고 해도 괜찮은 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오늘 선발로 나온 하비에르 바스케스가 그러했다. 올해 나이 24살로 나와 동갑인 이 투수는 나와 마찬가지로 98년 21살의 나이에 데뷔했다. 뭐 냉정하게 말해 그렇게 이른 나이에 데뷔할 만큼의 기량은 아니었다. 실제 98년 그는 33경기에 등판해서 172.1이닝 ERA 6.06 5승 15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몬트리올은 약팀이었고 그것은 그의 성장에 호재로 작용했다. 어린 나이부터 꾸준히 쥐어터지면서도 메이저에 꾸역꾸역 기용되던 그는 얻어터지는 만큼 성장했다. 98년 6.06의 평균 자책점은 99년 5.00을 거쳐 작년 4.05 그리고 올해는 3.17이라는 특급과 일류의 경계 즈음까지 치고 올라왔다. 아마 이대로라면 추후 FA 때 몬트리올이 잡기 힘든 선수로 성장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뻐엉!!

리키 헨더슨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하비에르 바스케스의 피칭이 매우 위력적이며 동시에 과감했다.

‘초구로 커브라니.’

저 녀석의 커브가 일품이라는 사실은 같은 지구 소속인 만큼 이미 몇 차례나 부딪혔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조금 소극적인 인상이 강했기에 지금 그가 보여주는 피칭은 분명 의외였다. 그의 피칭이 이어졌다.

포심과 체인지업 커브가 적절하게 섞여 들어왔다. 타석의 헨더슨이 어떤 것은 쳐내고 어떤 것은 흘려보냈다. 그리고 여덟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또다시 헨더슨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아, 바깥쪽 빠른 슬라이더에 헨더슨 선수가 속아 넘어가네요.]

[올 시즌 하비에르 바스케스 선수가 여러 가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전 그중에서도 이 슬라이더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한 공이에요.]

[작년에도 드문드문 던지기는 했지만, 올겨울 정말 달라졌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공이 좋아졌어요. 듣기로는 그립 자체를 바꿨다는 말이 있던데요.]

[네, 올 시즌 새롭게 부임한 브래드 안스버그 투수코치의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아, 브래드 안스버그라면 양키스와 레인저스에서 뛰었던 투수로군요. 확실히 커리어가 좀 짧긴 했습니다만 슬라이더가 참 괜찮은 투수였죠.]

[타석에 2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바로 이틀 전 다저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15호 홈런을 기록했죠? 올 시즌 몸이 커진 만큼 파워가 확실히 붙었습니다. 지난 99년의 40호 홈런 이상을 기대해볼만 합니다.]

헨더슨이 삼진으로 물러나고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아쉽게도 관중석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타석에서 눈앞의 투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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