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삶의 부채(2)
“정말 내가 따라가도 괜찮겠어?”
“오빠가 시간이 안 된다잖아. 그리고 엄마 야구 보고 싶다며.”
“그렇기는 한데······.”
“어차피 남는 표인데 아깝잖아. 대신 끝나고는 같이 못 있어 주니까 알아서 들어가고.”
“어머, 누가 들으면 내가 같이 있어 달라고 사정이라도 한 줄 알겠네. 예전에 존이랑 데이트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른다고 울며불며 엄마 찾을 때는 언제고. 너야말로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울면서 달려오지나 마.”
“여덟 살 때 이야기를 대체 언제까지 우려 먹을 생각인 거야.”
“나중에 네가 딸을 낳고 그 애가 결혼식을 할 때 축사로 써먹을 생각인데? 아, 물론 네 축사는 따로 준비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런 거 걱정한 적 없거든요.”
역시 어머니는 위대했다. 앤이 이리저리 말을 돌리려 애써봤지만 케이트는 귀신처럼 그녀의 말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했다. 결국 앤은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필 오늘따라 그녀의 오빠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며 함께 야구장에 가는 것을 거절했다. 어차피 다 밝혀진 상황이었다. 앤은 혼자서 낯선 야구장을 가느니 가고 싶다는 엄마라도 데리고 가는 쪽을 택했다.
“햐, 자리 굉장히 좋네.”
“여기가 좋은 자리야? 저쪽에 홈런볼 같은 거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더 좋은 거 아니야?”
좌석표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낸 케이트가 감탄했다. 하지만 앤은 어째서 이 자리가 좋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얘는, 야구를 보려면 포수 뒤쪽이 제일 좋은 거야. 이런 자리는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하기 힘든 자리인데. 관계자가 좋긴 좋네.”
“엄마, 진짜 야구 잘 아는 거야?”
“그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을까. 네 외할아버지가 다저스 팬이셨잖아. 뭐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나 어릴 때 경기도 몇 번 데리고 가셨었다고 하시더라.”
“엄마 어릴 때? 할아버지가 엄마를 데리고 LA까지 갔던 거야?”
“얘는, 엄마 어릴 때는 다저스가 LA가 아니라 브루클린에 있었어. 걔들 이사 갈 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노발대발하셨는데.”
“어서 가서 앉자. 딱 맞춰 왔네. 저기 그 남자 차례야.”
진호가 두 번째 공을 흘려보냈을 때 맞춰 앤과 케이트가 자기 자리에 도착했다.
“어? 쳤다!! 쳤어!!!”
야구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가 쳐내는 운동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진호의 배트가 바스케스의 공을 두들기는 순간 앤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어째 케이트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파울이야.”
“응?”
“파울이라고.”
“그게 뭔데?”
“저기 양쪽으로 하얀 선 보이지? 타자가 친 공이 저 선을 넘어가면 파울이고. 그건 무효야.”
***
하비에르 바스케스의 공들이 구석구석 위험한 코스를 공략해왔다. 스물네 살 답지 않은 노련함.
‘아,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닌가.’
하지만 나와 똑같은 나이에 메이저에 콜업 됐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노련함이 바스케스의 공에 감돌았다.
[어려운 타자를 상대로 바스케스가 경기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 긴 경험이 돋보이는 노련함입니다. 24살. 메이저 4년 차. 국제 유망주 계약으로 열여덟 살부터 마이너에서 뛰었으니 실제 프로 경력은 7년 차라고 봐야 겠군요.]
[뭐 마이너의 경험과 메이저 경험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경험이 풍부한 선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Kang의 장타력만을 의식하다가 볼넷으로 내보내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저 선수 요즘들어 조금 조심하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매 시즌 리그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정도로 많은 도루를 기록하는 선수예요.]
[여러모로 까다로운 선수입니다.]
[호타와 준족을 동시에 갖춘 선수의 무서움이죠.]
하지만 제아무리 많은 경험을 갖춘 투수라고 해도 고작 스물 네 살. 게다가 하비에르의 무서운 점은 다양한 구종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에 있었는데 좌타자인 나에게 우투수인 그의 슬라이더는 그리 위력적이지 못했고, 모두 알다시피 나는 체인지업에 특출나게 강했다. 즉 하비에르로서는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로 경기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 체인지업. 나의 배트가 정확하게 돌아갔다.
따악!!
1, 2루간을 꿰뚫는 강한 타구. 몬트리올의 우익수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서둘러 달려왔지만, 코스가 너무 좋았다. 1루 지나 2루까지. 나의 왼발이 2루 베이스를 밟았다.
“세이프!!”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어있던 관중석 그 자리를 바라봤다.
‘어?’
그녀가 왔다. 하지만 그녀의 옆자리에는 내가 생각하던 그녀의 오빠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여자?’
처음에는 뉴욕에 아는 친구라도 데리고 온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조금 이상했다. 맙소사. 설마 어머님을 모시고 온 건가? 아니 뻔히 데이트 신청한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어머님을 데리고 나오다니.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LA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거절은 아닌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약간의 답답함.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고 시합에 집중했다. 미래의 스타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사람 자체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작 여자에 정신이 팔려 성적을 망치는 것은 작년 그 최악의 경험이면 충분했다.
[타석에 3번,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옵니다.]
[시즌 초 잠시 부상으로 자리를 비웠던 피아자 선수. 하지만 언제 부상이 있었냐는 것처럼 펄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프레스톤 윌슨과 Jin-ho Kang에 이어 팀 홈런 3위, 타율은 Jin-ho Kang 바로 다음인 2위를 기록 중입니다.]
[바로 이것이 Kang의 타격 성적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Kang을 거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뒤로 줄줄이 대단한 타자들이 포진하고 있거든요.]
피아자가 세 번째 공을 밀어쳤다. 내야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우전 안타. 빠듯하기는 했지만 홈까지 들어오기 충분한 공이였다.
“세이프!!”
[피아자의 안타에 2루 주자 홈까지!! 1:0. 1회 말, 메츠가 한 점을 앞서나갑니다.]
[Kang, 피아자, 에드가르도, 프레스톤으로 이어지는 올해의 메츠는 99시즌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좋은 타선입니다. 언제 어디서 한 방이 터질지 몰라요.]
[그도 그렇지만 전 테이블 셰터진인 리키 헨더슨과 Kang의 빠른 발과 높은 출루율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단타를 득점으로 만드는 저 두 사람이 최근 메츠가 보여주는 상승세의 가장 큰 원인이에요.]
[작년 조금 부진했던 메츠. 하지만 99년 그 압도적인 우승의 주역 대부분은 여전히 팀에 있거든요. 심지어 몇몇 선수들은 그때에 비해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게다가 마운드 쪽 99년 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뉴욕 메츠의 올 시즌 결과가 매우 기대됩니다.]
***
“네 남자친구 엄청난데?”
케이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늘 진호는 정말 야구를 혼자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홈런은 없었다. 하지만 5타석 3타수 2안타 2볼넷으로 4번을 출루했고 1개의 도루. 그리고 경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호수비와 레이저 같은 보살을 기록했다.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앤 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시합이었다.
“남자친구 아니거든!!”
“네 외할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시겠다. 마이클이랑 토마스는 어릴 적부터 운동을 워낙 싫어해서 할아버지가 캐치볼 한번 하려고 데리고 나가질 못했잖니.”
“아니, 할아버지가 좋아하긴 대체 왜 좋아한다는 거야.”
“흠, 한국에서 혼자 와있다고 그랬지? 이번 추수감사절에 어디 갈 곳이 없겠네? 운동선수라서 많이 먹을 테니까 평소보다 칠면조를 한 사이즈 큰 거로 해야 하려나?”
“아!! 엄마!!”
물론 케이트 역시 이맘때 남녀가 얼마나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지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Kang이라면 파멜라와 조금 길게 만났을 뿐, 그 이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가볍게 만나고 헤어졌는지 이미 각종 타블로이드들을 통해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 이러는 것은 단지 자신의 말에 발끈하는 딸의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아직 네 남자친구는 아닌 저 남자 나오려면 좀 걸릴 텐데. 요 앞에 화장품 가게에서 쇼핑이나 같이 해줄까?”
“화장품은 왜?”
“너 저런 유명인이랑 있으면 파파라치샷 찍힐 수도 있는데 그러고 찍힐 생각이야? 뭐 그럴 생각이면 엄마는 그냥 들어가고.”
이번에도 역시 어머니는 위대했다.
***
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좋았다. 아마 야구를 잘 모르는 재키라고 해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경기였을 것이다. 간략하게 인터뷰를 끝내고 몸을 씻고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뉴욕. 밤늦게 영업하는 분위기 좋은 가게는 많았다.
“오래 기다렸죠. 어, 그런데 아까 일행 있던 것 같았는데 혼자네요.”
“네, 같이 야구만 보고 헤어졌어요.”
“누구였어요?”
“엄마요. 무슨 일인지 오빠 집에 와있더라고요.”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어머님을 돌려보내고 이렇게 만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전까지 어머님과 함께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담감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껄끄러움은 식사와 함께하는 잠깐의 대화만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확실히 매력적인 여자다.
“사실 처음에는 그쪽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아 또 한 번 말하지만, 인종차별적인 이유는 아니에요.”
“생긴 게 별로였나요?”
“그럴 리가요. 혹시 Get real이라고 기억 해요?”
“글쎄요, 그게 뭐죠?”
“Fox에서 방영하려던 쇼에요. 거기 캐스팅 됐었는데 파일럿 찍고 말아먹었죠. 사실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왜?”
“뭐 더 인기 있는 프로그램 때문이죠. 댁이랑 파멜라가 카메오로 나와줬던 그 쇼요. 사실 좀 억지인 건 알아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쇼가 우리보다 시청률이 높게 나온 건 당신이랑 파멜라가 카메오로 출연해줬던 것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 돼요. 솔직히 그 쇼는 완전 구렸다고요.”
가벼운 반주와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나온 이야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뭐, 사실 그래서 파티에서 그쪽이 말 건 거에 반응한 거긴 했어요. 그쪽도 별로지만 파멜라는 더 별로였거든요. 아니, 자기 쇼도 가진 톱스타가 그런 파일럿에 화제만발인 남자친구와 얼굴 들이미는 건 반칙이죠. 아무리 그 쇼가 자기랑 친한 얼이 나온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녀가 처음 명성을 얻게 된 영화인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언제 개봉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그 영화에 캐스팅된 것은 그 이전 1년간 방영됐던 TV 쇼를 통해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기에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가 한 파일럿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이 앤 해서웨이라는 슈퍼스타의 탄생을 막아버린 셈이었다.
‘맙소사.’
난 딱히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다. 제 3세계에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항상 신경 쓰며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구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경우는 그와 마찬가지였다. 나의 타임슬립으로 인해 유망한 미래가 확실하게 어그러진 슈퍼스타가 눈앞에 보인다. 안 그래도 찬화 선배 때문에 조금 꿀꿀하던 마음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런 나의 변화를 눈치챈 것일까?
“아, 오늘 시합 엄청 힘들었을텐데. 피곤하죠?”
“아니, 그게 아니라.”
우우웅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박 찬화-
찬화 선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