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삶의 부채(4)
“기분 좋아 보이네?”
“어? 뭐. 그렇지.”
“어제 여자 만났다고 하더니만, 어휴 진짜 능력도 좋다니까.”
진호를 향해 말을 거는 프레스톤의 목소리에서 부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능력은 무슨. 너도 너 좋다는 여자 많잖아.”
“내가 말하는 능력은 그런 능력이 아니거든!!”
“그럼 뭔데.”
“있어, 그런 게!!”
여자? 고작 그런 걸 부러워하기에 프레스톤은 너무 잘생겼다. 최근 살이 붙어 조금 후덕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프레스톤은 여전히 미남이었다. 그가 진호에게 진실로 부러워하는 것은 시리즈 중에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시합에 전념할 수 있는 그 불가사의한 집중력이었다. 하지만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이다. 이미 그런 것에 연연하기에 프레스톤이 쌓아올린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프레스톤이 잠시 고개를 저었다.
‘뭐, 진호는 진호고 나는 나니까.’
시즌의 1/3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19개의 홈런. 이미 작년 기록했던 37홈런의 절반이 넘어가는 홈런 수를 기록하고 있는 프레스톤이었다. 수비와 주루를 포함한 종합적인 선수의 가치에서는 진호에게 뒤질지 몰라도 타자로서의 가치만큼은 진호 못지않다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최근에는 에드가르도를 대신해 종종 4번 타순으로 출전하고 있었다. 물론 타율이라는 고전적인 스탯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가진 팬들은 2할 6푼대의 타율을 기록 중인 프레스톤을 단순한 공갈포로 인식했다. 하지만 최근 오클랜드의 빌리 빈이 거둔 어마어마한 성공은 코어 팬들과 업계 관계자들의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프레스톤의 생산성이 결코 진호나 피아자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오늘 홈런 한 방 더 치면 20호 홈런으로 소사 씨를 제치고 홈런 단독 2위로 올라갈 수 있어.’
현재 리그에서 홈런을 가장 많이 친 타자는 배리 본즈였다. 젊은 시절 그는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과 30개 이상의 도루를 기대할 수 있는 호타준족의 대명사였다. 중견수와 좌익수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진호와 매우 흡사한 타자였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그는 달랐다. 도루의 숫자가 줄어든 대신 홈런이 급증했다. 작년 그는 30개 전후를 유지하던 도루가 11개로 줄어든 대신 마찬가지로 30개 전후를 유지하던 홈런을 49개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올해 총 43번의 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그가 기록 중인 홈런은 무려 23개. 역사상 가장 빠른 홈런 페이스였다.
‘뭐, 그 아저씨도 사람인데 1년 내내 잘 치지는 않겠지. 나만 꾸준하다면 충분히 역전할 수 있어.’
올 시즌 프레스톤의 몸은 유례가 없이 좋았다. 그리고 성적은 그 이상으로 좋았다. 컨디션, 행운 모든 것이 프레스톤 자신을 향해 불어오고 있었다.
MVP
아직 시즌의 1/3도 치르지 않은 시점에서 많이 이른 이야기 이기는 했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아득하게 먼 곳에 있어 보이지조차 않던 타이틀이었다. 그런 타이틀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하나의 MVP를 가진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대기 타석에서 몸을 낮추고 상대 투수를 쏘아보고 있다. 마치 마운드의 투수가 던지는 공들을 해부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것만 따내면 드디어 같은 선에 서는 거야.’
프레스톤의 눈빛에 욕심, 혹은 야망이라고 할만한 것이 서렸다.
***
포심, 커브, 체인지업. 오늘 선발로 마운드에 선 브릿 림슨이 구사하는 구종들이었다. 1회 말부터 그는 자신의 무기를 총동원해 헨더슨을 상대했다. 나는 대기 타석에서 그의 모든 무기를 똑똑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포심은 나쁘지 않아. 커브는 제법 괜찮고. 체인지 업은 너무 티나는데? 저건 프레스톤이라도 눈치채겠다.’
전체적으로 작년 하반기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뭐, 성장 가능성을 생각해서 메이저에 선발로 기용될 수는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했을 때 지금 마운드에 선 브릿 림슨은 메이저의 평균적인 선발투수들의 기량에 미치지 못했다.
‘몬트리올 진짜 심각하구나. 하긴 저렇게 선수 수급이 힘드니까 사무국에서도 워싱턴으로 이전을 허락해줬겠지.’
커트하고 또 커트하며 투수의 멘탈을 박살낸 헨더슨이 9구째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골라내며 출루에 성공했다. 나의 차례다.
[9구째 공을 골라내며 헨더슨이 출루에 성공합니다.]
[시즌 26번째 볼넷을 얻어내는 리키 헨더슨. 역시 나이를 먹어도 선구안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타석에 4경기 연속 멀티안타를 기록중인 Kang이 들어옵니다.]
[올해 워낙 센세이션한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들이 있는 관계로 조금 묻히는 감이 있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슬래시 라인이 0.346/0.421/0.676으로 타율 3위 출루율 4위. 장타율 역시 6위를 기록 중입니다.]
[99년 MVP를 수상했을 때보다 훨씬 좋은 기록입니다. 비록 타석에서는 몇몇 선수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주루와 수비 등의 종합적인 부분을 고려한다면 그들에 못지않은 활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회부터 9개나 되는 공을 던지고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풀타임 1년 차 투수답게 마운드의 브릿 림슨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멘탈이 완전 박살 난 것 같네.’
공 9개라고 같은 9개가 아니다. 결정구들을 톡톡 골라내고 아슬아슬한 공은 유유자적 흘려 보내며 중간중간 투수를 향해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던 리키 헨더슨이다. 고작 1년 차 투수의 멘탈이 버텨낼리 만무했다.
리키 헨더슨을 한 번 노려본 브릿 림슨이 셋업 모션에 들어갔다.
‘온다.’
몸쪽 높은 코스 94마일 빠른 공. 구속은 나쁘지 않았다. 무브먼트도 마찬가지다. 제구 역시 칼같이 존에 걸치는 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앙으로 몰린 공도 아니었다. 하지만
‘못 칠 공도 아니지.’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된 머리. 지면에 단단하게 박힌 양발. 몸통부터 엉덩이까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나의 몸이 완벽하게 돌아갔다.
딱!!
중앙 담장 너머 거대한 실크 햇. 셰이 스타디움의 명물인 그 실크햇 사이로 붉은 빛의 사과가 고개를 들었다.
[홈런!! 홈런입니다.]
[우측 담장을 크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 15호 홈런을 치고 불과 두 경기만에 Kang이 시즌 16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1회 말, 2점 홈런. 메츠가 시리즈 2차전도 매우 유리하게 가져갑니다.]
[정말 깔끔한 스윙이었어요.]
[테드 윌리엄스가 이야기 했던 로테이셔널 히팅 시스템의 교과서적인 형태입니다. 작년 타격폼 수정을 할 때만 하더라도 걱정을 했었는데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어요.]
마운드의 브릿 림슨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뭐, 녀석이 일류의 투수로 성장할 재목이라면 금방 수습하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경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런 재목이 아니라면?
-2회 말 강진호의 싹슬이 2루타에 마침내 강판 되는 브릿 림슨-
-강진호 3안타!! 6타석 5타수 3안타 1홈런!! 다섯 경기 연속 멀티 안타 기록!!-
-어메이징!! 메츠!! 몬트리올과의 시리즈 2차전 14:3 대승!!-
***
“흠, 뭐 별거 없던데? 최종 오디션까지 간 쇼가 하나 있기는 한데, 쇼 자체가 엎어졌어.”
“그거 말고는요? 뭐 영화 쪽에서 그녀를 눈여겨 보는 디렉터가 있다던지 그런 거 없어요?”
“에이, 그런게 있을 리가. 뭐 고등학생 때 뮤지컬쪽 상 받은 이력이 있긴 한데 그래도 저런 애는 LA에 널리고 널렸어. 저렇게 오디션 열심히 보다가 운 좋으면 뜨는 거고, 아니면 웨이트리스로 늙는 거지. 뭐 외모가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특별히 눈에 띄는 마스크라고 보기도 좀 힘들고 말이야.”
파멜라를 통해 알게 된 연예계 쪽 인맥을 통해 재키에 대해 알아봤다. 그리고 혹시나 했던 것은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그녀의 커리어는 완벽하게 꼬여있었다. 본래의 역사에서라면 그녀가 출연했을 프린세스 다이어리는 누군지 이름도 모를 금발의 바비인형 같은 여자애가 캐스팅되어 촬영까지 끝내고 후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슨 통화에요?”
“아, 왔어요?”
서둘러 휴대전화를 닫았다.
“되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던데, 혹시 그때 그 선배라는 분이에요? 그분 많이 안 좋은 거예요?”
“아뇨. 그냥 다른 전화였어요. 그보다 저녁, 저녁 먹어야죠.”
가벼운 식사. 약간의 고민. 그녀는 여전히 유쾌했고 매력이 넘쳤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불편하다. 이토록 매력적인 그녀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예정이었던 그녀가 고작 웨이트리스로 늙어가야 하다니. 그럴 순 없다.
“재키, 이번에 Fox에서 새로 런칭하는 드라마 소식 들었어요?”
“에이, 파일럿 쇼가 어디 하나 두 개인가요. 그러다가 순식간에 엎어지는거죠 뭐.”
“아뇨, 작년에 파일럿 통과했고 올해 새로 런칭되는 쇼라고 하던데.”
“작년 파일럿 통과에 올해 새로 런칭되는 쇼면 버니 맥 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단역이기는 한데 그래도 4회 이상 출연이 보장되는 롤 자리가 비게 됐다고 조만간 오디션이 있다는데 혹시 생각이 있나 해서요.”
“오디션이요?”
나로 인해 망했다면 그만큼을 벌충해주면 된다. 지금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과 명성이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녀를 위해 아예 영화를 하나 통째로 제작을 해도 괜찮을 정도다. 하지만 돈으로 유명세는 살 수 있어도 명예를 살 수는 없다. 이런 작은 기회면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앤 해서웨이.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여배우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방영이 확정된 시리즈의 단역에 오디션 자리라 이거죠?”
“네. 잘 알고 지내던 녀석이 혹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냐고 해서요. 문득 재키 생각이 나더라고요.”
“사양할게요.”
“네?”
하지만 재키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달랐다.
“크게 부각되는 역할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역할이라고 들었어요. 이런 작은 역할로 시작해서 차곡차곡 올라가시는 게.”
“아뇨, 정규 시리즈의 고정단역이라니 충분히 큰 역할이에요. 기껏해야 파일럿에 잠시 단역으로 나왔던 처지에 감히 바라기도 힘들 만큼요. 그러니까 사양할게요.”
멍청한 선택이었다.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기 싫다는 쓸모없는 자존심. 당장 코앞의 미래조차 불안한 인생이라면 이런 기회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밈이 옳았다. 하지만 참 웃기게도 이 순간 나는 나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지금도 그녀는 앤 해서웨이였다.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성공을 통해 로맨틱 코메디에 출연하는 그저 그런 스타 중 하나로 사그라들 운명을 과감한 연기로 극복한 진짜 ‘배우’. 그렇기에 그녀의 이 거절은 치기가 아닌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부심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재키 그거 알아요?”
“뭘요? 지금 제가 멍청한 선택을 한 거요?”
“아뇨, 제가 지금 당신한테 반한거요.”
“윽, Jin. 당신도 그거 알아요?”
“뭘요.”
“당신 진짜 느끼한 거요.”
그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딱 들어맞는 한짝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