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8월 그리고...(2)
뻐엉!!
날카로운 커브볼이 포수의 미트를 꿰뚫었다. 해설위원석에 앉아 있던 케빈 타파니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훌륭해.’
13년 동안 143승 125패 4.35의 평균자책점. 전설로 남을 위대한 기록은 아니었지만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솔리드함과 도미넌트의 경계점에 위치했던 타파니였다. 가장 좋았던 시기, 7위에 불과했지만 사이 영 순위에도 이름을 올렸던 투수. 그가 현역시절 가장 자신있게 구사했던 공이 바로 커브였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저 23살짜리 투수의 커브는 메이저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공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스윙 삼진!! 스윙 삼진입니다. 메츠의 선두 타자 리키 헨더슨 선수의 스윙 삼진.]
[와, 이거 정말 보기 힘든 장면이 나왔습니다.]
[올 시즌 리키 헨더슨 선수의 스윙 삼진은 이번이 세 개째죠?]
[네, 헨더슨 선수의 경우 루킹 삼진의 숫자는 그래도 제법 됩니다만 이런 식의 스윙 삼진은 굉장히 보기 힘들거든요. 그만큼 확신이 있을 때만 방망이를 휘두르는 선수라는 것인데, 이건 역시 로이 오스왈트 선수의 커브가 굉장히 날카롭다는 의미일 겁니다.]
타석에 진호가 들어섰다. 케빈 타파니의 시선이 빛난다.
[아, 타석에 Kang이 올라오네요. 저 선수 참 좋은 선수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타파니 위원님이 현역 시절에 상당히 많이 상대했던 선수죠? 아마 98년 데뷔 연도부터 작년까지 매년 한 경기씩은 있지 않았나요? 같은 내셔널리그라고는 해도 지구가 달랐는데 참 묘한 인연이네요.]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이전에도 한 번 만났었습니다.]
[그 이전이라면······.]
[제가 96년에 부상으로 잠시 마이너에 리햅 때문에 내려갔었는데 그때 한 번 마주쳤었습니다. 당시에도 상당히 인상적인 선수였어요.]
타파니가 슬쩍 웃는다.
[아, 표정을 보니 당시에는 결과가 좋았던 모양인데요?]
[웬걸요. 깔끔하게 안타를 하나 얻어맞고 기분 나빠서 한 타석 더 상대해줬는데 워닝트랙 앞까지 날아가는 공을 허용했었어요. 당시에 외야수가 잘 잡아줘서 다행이지 리햅하러 내려갔다가 컨디션 완전 망칠 뻔했었습니다.]
[아, 그러면 그때부터 지금처럼 대단한 타자가 될 거라고 예측하셨었나요?]
[하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건 아닙니다. 뭐 당시에도 메이저 레벨의 타자가 될걸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지금 Kang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그냥 메이저 레벨의 타자 수준이 아니잖아요. 제가 예측했던 수준은 98년 Kang이 보여줬던 수준정도였어요. 당시에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뛰어났지만 힘이 상당히 부족했었는데, 것만 보완하면 98년 보여준 수준까진 가능하리라고 예상했었거든요.]
[네, 뭐 그 정도가 전문가들이 예측했던 Kang의 실링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99년 MVP 위너가 될 정도로 갑자기 발전하더니 올해는 어휴, 제가 정말 작년에 은퇴하길 다행이라니까요. 올해도 또 만났으면 한 경기에 홈런을 몇 개를 두들겨 맞았을지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타파니의 엄살에 해설위원들이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 타파니의 눈빛은 고요했다.
‘조금 아쉽기는 하네.’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야구판에 남긴 했지만 할 수만 있었다면 아무리 많이 두들겨 맞고, 패배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 쪽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파니의 아름다웠던 계절은 이미 끝났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억, 그리고 대리 만족뿐이다. 여기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타파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98년 초, 진호가 아직 유명해기 전 마이너 잡지와의 작은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를.
‘제가 태어나 처음 상대해본 현역 메이저리거의 공은 케빈 타파니 선수의 커브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거라고 해봐야 뭐 다른 거 있겠어? 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정말 다르더라고요. 태어나서 그런 커브는 정말 처음 봤습니다. 아마 평생 그 충격은 잊기 힘들 겁니다.’
타석에 진호가 자세를 잡았다. 5년 전 첫 만남과는 완벽하게 다른 몸매, 그리고 완벽하게 다른 자세다. 하지만 한 가지. 타파니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던 그 눈빛만큼은 같았다. 그 눈빛에는 자신의 패배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
리키 헨더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루킹삼진을 당했을 때는 자신의 존이 옳고 심판이 틀렸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돌아오는 헨더슨이었지만 지금처럼 투수에게 완전히 당했을 때에는 언제나 이렇게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그 분노의 대상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독특했어.’
하지만 헨더슨의 타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헨더슨이 투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준 덕분에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오스왈트의 저 이질적인 커브를 말이다. 물론 녀석이 두 종류의 커브를 던진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팀의 전력 분석원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그들은 영상까지 구해서 편집해가며 우리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2001년 영상기술의 한계일 수도, 혹은 올해 데뷔한 로이 오스왈트라는 투수의 자료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주는 저 이질적인 커브가 매우 위력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운드의 로이 오스왈트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 높은 공. 공이 나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특유의 탑 스핀. 커브였다.
따악!!
나의 배트가 공의 하단을 두들겼다. 나의 배트를 스치고 빠르게 뒤로 빠지는 파울볼. 손끝이 얼얼했다. 생각보다 훨씬 덜 떨어진 공이었다. 거의 존 중앙을 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 마운드의 오스왈트의 얼굴에 긴장은 보이지 않았다.
‘대학리그 2년에 마이너 3년, 그리고 최근에 국제대회까지. 1년 차라기에는 제법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대담하네.’
확실히 저렇게 대담해도 될만한 수준급의 커브였다. 하지만 최근 나의 페이스를 생각해본다면 아무리 수준급의 커브라고 해도 결코 쳐내지 못할 만한 공은 아니었다. 뭐 그렇게 쳐낸 공이 안타가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억지로라도 배트를 가져다 댔다면 내야를 뚫었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하지만 이제 고작 초구. 아직 카운트는 넉넉했다. 굳이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 더해 지금 내가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두 번째 바깥쪽 94마일 빠른 공. 너무나도 뻔한 유인구. 나의 배트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뻐엉!!
[흠, 저건 조금 좋지 않습니다. 저런 식의 유인구도 통하는 선수가 있고 아닌 선수가 있거든요. 만약 지금 타석의 타자가 프레스톤 선수였다면 해봄직한 시도였지만 Kang은 달라요. 저 선수 볼삼비를 보면 아시겠지만, 선구안이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볼카운트 1-1.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커브였다. 거듭 말하지만 로이 오스왈트의 커브는 나쁘지 않았다.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 거의 동일한 자세로 공을 뿌렸고, 실제로 공의 궤적 역시 포심과 흡사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이 던지는 공이 커브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94마일짜리 선발투수가 커브 포심 투 피치라니.’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가 있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공은 어지간해서는 모두 커브인 것이다. 물론 그 커브가 두 가지나 되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커브의 움직임이 종 무브먼트뿐 아니라 횡 무브먼트도 상당히 수준급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존 가까이 다가온 공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뚝 떨어지는, 하지만 그 와중에 슬쩍 몸쪽으로 달라붙는 공. 녀석의 두 번째 커브볼이었다.
왼팔을 몸으로 딱 붙인 채 최대한 몸을 끌어당겼다. 전신의 근육이 불끈 일어선다. 균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콤팩트하게 돌아간 배트.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명중한 공이 날아오던 속도 이상으로 빠르게 튕겨졌다.
[쳤습니다!! 우중간 큼지막한 타구!!]
[담장 맞은 타구! 아!! 리차드 이달고 공을 잡아내지 못했어요!!]
[그 사이 Kang은 2루에!! 2루 지나 3루까지!!]
[3루타!! 3루타입니다.]
[1회 초, 1아웃 상황에서 Kang이 로이 오스왈트 선수의 커브를 그대로 받아쳤습니다.]
[정말 대단한 스윙이었습니다. 보시면 몸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쳐내기 위해서 배트가 급하게 움직이는데 몸의 회전 자체는 흔들리지가 않거든요. 회전의 축이되는 머리와 하체가 그만큼 단단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의미에요.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이제 고작 4년 차 올해 25살이 되는 타자가 보여주는 스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단합니다.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해요.]
마운드의 로이 오스왈트가 허탈하게 웃는다. 물론 그 허탈함은 잠시뿐. 이내 녀석의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생기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중요한것에 집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눈빛이 아니라는 것을. 저것은 그저 자신이 두들겨 맞은 것을 단순한 불운, 혹은 우연 정도로 치부하는 눈빛이다.
‘불펜으로 뛰다가, 지난달에 선발로 데뷔해서 2.26의 평균자책점이라고 했던가?’
안타깝게도 녀석은 아직 메이저리그의 무서움을 몰랐다.
이곳에 어떤 신과 악마 그리고 괴물 같은 녀석들이 살고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내가 떠난 타석에 또 하나의 괴물이 들어왔다.
[원아웃 주자 3루. 타석에 3번 타자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시즌 초반 부상으로 15일 DL에 올랐던 피아자 선수. 아직 32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입니다만 포수라는 보직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제 슬슬 중간중간 휴식이 필요한 나이에요.]
[실제로 발렌타인 감독도 시리즈 중간 중간 휴식일을 주려고 하는 것 같긴 합니다만, 토드 프렛, 반스 윌슨, 제이슨 필립스. 백업으로 올렸던 포수자원들이 모두 조금씩 부족합니다.]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부족하다기보다 피아자 선수의 능력이 너무 굉장하다고 봐야겠죠. 당장 피아자 선수가 올라온 날과 아닌 날 메츠의 펀치력은 상당히 차이가 나니까요.]
피아자가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를 보고 웃었다.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 역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파울, 볼, 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따악!!
[쳤습니다!! 좌중간!! 좌중간!!! 아!! 펜스 상단을 직격한 타구!! 그 사이 3루 주자 Kang은 홈으로, 마이크 피아자는!! 1루에서 멈춰섭니다.]
[아, 큰 타구였는데,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워낙에 타구 속도가 빨랐고 좌익수 랜스 버크만 선수의 커버도 좋았어요. 이건 피아자 선수의 발이 특별히 느려서가 아니라 평균적인 수준의 타자들이라도 박빙의 승부가 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1회 초 메츠가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운드 로이 오스왈트의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졌다. 반쯤 썩어버린 얼굴. 이제야 장타를 두들겨 맞은 신인에게 어울리는 얼굴이다.
“어이 프레스톤.”
타석에 들어가는 프레스톤이 나를 바라봤다.
“너 이따가 나랑 피아자씨한테 맥주 한 잔씩 사야 한다.”
“쌩뚱맞게 무슨 소리야.”
“쌩뚱맞은 소리인지 아닌지는 이따 피아자 씨한테 직접 물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