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8월 그리고...(4)
3회 초 우리의 공격이 끝나는 시점까지 1:0.
따악!!
타석에 서 있던 벤츄라의 배트가 루이트의 84마일 포심을 건드렸다. 유격수 정면으로 흐르는 타구. 순식간에 6-4-3 더블 플레이가 완성됐다.
“아웃!!”
[커크 루이트 선수의 노련한 피칭!!]
[3회 초, 병살타로 메츠의 공격이 끝이 납니다.]
[저 선수 오늘 상당히 좋은데요?]
[네, 정말 아슬아슬한 범위로 공이 잘 들어가고 있어요.]
[앞선 이닝도 그렇고 정말 위험한 고비 고비마다 노련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3회가 끝날 때까지 피안타만 무려 여섯 개인데 점수는 고작 1점밖에 내주지 않았습니다.]
커크 루이트는 상당히 짜증 나는 타입의 투수였다. 녀석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 한계 내에서 가장 영리하게 움직였다. 매덕스의 유명한 말처럼 눈과 눈 사이의 뇌라는 기관으로 야구를 하는 그런 투수인 것이다.
91년 드래프트 당시 18라운드 전체 477픽.
당시에는 분명 과소평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최고 구속이 90마일이 간신히 나오는 4년제 대학 졸업생. 심지어 대학리그에서 그리 돋보이는 활약도 보여주지 못한 커크 루이터가 빅리그까지 올라올 것이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커크 루이터는 1993년 불과 2년 만에 빅리그에 데뷔했고 지금까지 무려 93승을 거두며 메이저 평균 이상의 투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확실히 짜증나는 타입이야.’
이제 90마일은커녕 88마일도 나오지 않는 똥볼. 하지만 그 지독한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커브가 함께할 때 80마일 중반의 똥볼은 마치 90마일 중반의 속구와 같은 위력을 보여주었다. 세 번의 공격이 끝나는 동안 고작 1점.
‘곤란하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늘 우리의 선발인 알 라이터가 매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몇 년 전과 다르게 7회만 넘어가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35살이라는 나이를 생각한다면 여전히 자신의 클래스를 유지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3회 말, 자이언츠의 공격. 타석에 2번 타자, 유격수 리치 오릴리아 선수가 들어옵니다.]
[배리 본즈 선수의 활약에 조금 묻힌 감이 있긴 합니다만, 올 시즌 이 선수의 활약도 굉장하죠?]
[네, 안타 개수만 봤을 때는 자이언츠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입니다. 95년 데뷔 이후 꾸준히 2할 7푼에서 2할 8푼 사이를 오가며 유격수치고는 상당히 좋은 배트를 뽐냈는데, 올해는 시즌 내내 3할 2푼대를 오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홈런도 무려 31개에요. 아메리칸 리그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그리고 데릭 지터와 더불어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유격수 중 하나입니다.]
따악!!
알 라이터의 낮은 포심을 오릴리아가 쳐냈다. 2, 3루간으로 흐르는 타구. 오도네즈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아직 힘이 죽지도 않은 제법 빠른 공을 맨손으로 잡아내는 놀라운 수비. 오도네즈의 몸이 반 바퀴 돌아갔다.
올해 팀에서 가장 많은 에러를 저지른 토드 제아일이 이번에는 다행히 제대로 공을 받아냈다. 사실 이전에 덕아웃에서 제아일이 자신의 에러를 오도네즈의 송구가 좋지 못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화내기는 했었지만, 또 그의 에러가 마냥 그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하기도 힘든 것은 맞았다.
그는 결코 미트가 괜찮은 일루수는 아니었지만, 동시에 리그 평균에서 크게 미달되는 것 역시 아니었다. 단지 오도네즈가 요구하는 일루수의 수비 수준이 너무 높은 것뿐이었다.
“아웃!!”
[최근 들어 조금 부진하던 레이 오도네즈의 훌륭한 수비!!]
[작년 부상 이후 운동능력이 상당히 저하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리그 최상위권의 수비능력입니다.]
3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마침내 타석에 문제의 그 남자가 들어왔다.
[타석에 3번 타자, 배리 본즈 선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앞선 타석에서 볼넷으로 출루했지만, 득점으로는 연결되지는 못했던 배리 본즈 선수. 과연 두 번째 타석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군요.]
저 멀리 타석에 배리 본즈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AT&T 파크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아올랐다. 맥코비 만 위를 둥둥 떠다니는 요트들이 부산하다. 시즌 49호 홈런을 기대하는 움직임들. 원정 경기에서 그라운드를 꽉 채운 관중들이 모두 적인 것은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먹잇감이라 이거네.’
적이 아니다. 지금 관중들이 바라보는 우리는 단순히 배리 본즈라는 타자가 만들어낼 기록의 대상일 뿐이다.
마치 신의 제전, 혹은 악마의 제단 위에 받쳐지는 산 제물. 절대 유쾌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그라운드 위에 선 모든 우리 선수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 한 명, 나의 오른편에서 여유롭게 하품하고 있는 리키 헨더슨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알 라이터 선수. 매우 신중한 자세입니다.]
[당연합니다. 배리 본즈 선수가 지금까지 타율이 0.313으로 총 84개의 안타를 쳤는데 그 중에서 단타는 고작 9개에 불과하거든요. 심지어 84개의 안타 중에서 절반 이상. 48개가 담장을 넘어갔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저런 선수는 무조건 걸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선 선수는 알 라이터. 메츠라는 강력한 컨텐더 팀의 에이스거든요. 1회에도 볼넷을 기록하긴 했습니다만 정말 치열한 접전이었어요.]
알 라이터가 마운드에서 잠시 걸어 나와 로진백을 매만졌다. 그리고 숙였던 허리를 들어 우리를 바라본다. 2초? 아니 1초? 그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지켜주는 우리 야수들을 훑었다. 그리고 웃는다.
씨익
지금 그라운드에서 가장 긴장을 해야 할 사람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가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부드러운 폼. 깨끗한 자세. 그의 손끝에서 누런 공이 출발했다.
공이 향하는 곳은 바깥쪽 공 하나만큼 빠진 코스.
지금 타석에 선 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공이다. 카운트가 몰리더라도 결코 존안으로 공을 집어 넣지 않겠다는 의지. 그 순간 배리 본즈의 거대한 몸이 움직였다.
딱!!
우측으로 향하는 타구. 프레스톤이 재빨리 달렸다.
‘젠장.’
하지만 배리 본즈의 배트가 알 라이터의 공을 쳐 내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프레스톤의 질주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AT&T파크 우측 얄팍한 담장 위 네 개의 굴뚝에서 분수가 솟구쳤다.
[홈런!! 홈런입니다. 배리 본즈의 시즌 49호 홈런!!]
[AT&T파크의 우측 담장을 크게 넘어 맥코비 만으로 떨어지는 대형 홈런!! 아, 지금 물에 떨어진 공을 누군가 뛰어들어 잡는 장면이 보이네요.]
[3회 말, 배리 본즈 선수의 동점 포. 다시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보시면 알 라이터 선수의 공은 절대 나쁘지 않았거든요. 정말 무시무시한 파괴력입니다. 자세가 거의 반쯤 무너졌는데 이걸 이렇게 날려버리네요.]
[왜 타자의 가장 중요한 툴로 파워를 꼽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알 라이터의 얼굴에 당황이 가득하다. 당연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저렇게 무너진 자세로 저렇게 제대로 때리지 못한 공을 넘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심지어 장외홈런이라니. 물론 AT&T 파크의 우측 펜스가 가깝고 외야석이 넓지 않다고 해도 이건 명백하게 상식을 벗어난 힘이었다.
하지만 알 라이터는 역시 알 라이터였다. 잠시 고개를 몇 차례 휘저은 그는 마치 조금 전의 홈런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자신의 피칭을 이어나갔다.
1:1
경기가 계속됐다.
***
“역시 이 맥시칸이 핵심이겠지?”
“응, 아무리 살펴봐도 그렇게밖에는 볼 수 없어. 분명 여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안 발코사의 직원 중 누군가와 접촉을 할 거야. 뭐 그것만으로는 결정적 증거가 되긴 힘드니까 그렇게 접촉하는 게 확인되면 셋만 모이는 걸 잘 포착해야겠지.”
랜스와 마크가 진호와 프레스톤을 의심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자면 필연이었다. 갑자기 상승한 성적. 그리고 그렇게 상승한 사람이 수상해보이는 맥시코 출신의 트레이너를 공유한다? 이름 난 미국의 트레이너들을 뒤로 하고?
심지어 저 맥시칸은 이번 원정 시리즈의 경우 구단의 전용기까지 얻어 타고 따라 다니고 있었다. 뭐 구단의 중심선수에게는 개인 트레이너를 종종 동반하도록 배려하긴 하기에 특별한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지지난 원정 시리즈만 하더라도 따라오지 않았던 개인 트레이너가 발코사 라는 아나볼릭 공급의 중심이 되는 회사가 위치한 이곳 샌프란시스코 원정이 포함된 원정 시리즈에 따라온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얘는 진짜 지독하네. 동양인이라서 그런가?”
“그러게 말이야. 솔직히 대형계약도 맺었겠다 나라면 야구 좀 대충하더라도 여자 만날거 만나면서 살 텐데 말이야.”
“어쩌면 파멜라랑 헤어지고 단단히 각오한 걸 수도 있지.”
“아냐, 둘의 불화설이 퍼지기 시작한 시기를 생각하면 약을 먹고 그게 부실해져서 그런 걸수도 있어.”
파멜라와의 열애 이전에도 각종 여인들과의 열애설을 흘리고 다녔던 진호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연애가 지난 9월 파멜라와의 결별이후 뚝 끊어졌다. 그리고 벌써 10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여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떠돌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증거는 잡히지 않았다. 어린 여배우 지망생과 낮에 만나는 사진이 몇 장 잡히긴 했지만 정작 밤에 제대로 만나는 증거는 포착된 것이 없었다.
“웃긴 얘기지. 파멜라를 만나던 녀석이 고작 이런 촌스러운 여자를 만난다고? 그것도 플라토닉하게?”
애초에 여자를 만날 때 대놓고 만나던 이 남자가 굳이 비밀스럽게 만날 이유 따윈 없다. 이건 누가 봐도 연인간의 제대로 된 만남이 아니다.
AT&T 파크의 외곽에서 랜스와 마크의 시선이 가리비아에게 집중됐다.
***
7회 초 원아웃 상황.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이거 오늘 경기가 예상 외로 투수전이 되는 느낌입니다. 6회가 끝난 시점에서 여전히 점수는 1:1이에요.]
[양팀 모두 안타가 없는 것은 아닌데 영 점수로 연결되지를 않는군요. 특히 메츠의 경우 총 11개의 안타를 치고도 점수는 고작 1점이에요. 조금 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아, 타석에 Kang이 들어오는군요. 오늘 3타수 1안타. 오늘 경기 메츠의 유일한 득점이 Kang의 저 출루에서 시작됐었죠.]
[참 여러 가지로 대단한 선수입니다.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요. 유망주 시절에는 파워가 약한 것이 약점이 될거라 지적됐었는데 재작년 40홈런, 그리고 작년 35홈런에 이어 올해에는 110경기만에 37홈런을 기록중입니다.]
[자, 원 아웃 주자 2루. 1:1의 팽팽한 균형을 깨트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라운드가 고요하다. 배리 본즈가 타석에 들어설 때와는 다른 기분나쁨. 지금 그라운드에 들어 찬 관중들에게서는 적대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나의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곳 AT&T파크에 모인 관중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언론들이 주목하는 것은 오늘 경기의 승패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위대한 배리 본즈의 대 기록.’
물론 지금 타석에 선 나는 결코 그딴 것을 남겨줄 생각따윈 없었다. 내가 저들에게 보여줄 것은 그 위대한 배리 본즈의 팀이 완벽하게 패배하는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