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8월 그리고...(5)
끄응
가리비아가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사람의 몸이 가장 왕성한 기력을 뽐내는 시기는 만 24세에서 27세 사이. 올 시즌 만으로 25살이 되는 진호의 몸은 그야말로 최고에 가까웠다. 그리고 작년보다 한층 더 나아진 성적이 그것을 증명했다.
“정말 지독한 영감이라니까.”
그리고 진호의 몸이 최고의 상태라는 것을 가장 빠르게 깨달은 것은 진호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팀의 감독 바비 발렌타인이었다.
물론 중견수는 투수, 혹은 포수만큼 혹사가 심한 포지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견수 역시 야수 중에서는 터프한 축에 들어가는 포지션이었다. 게다가 진호의 경우 특유의 넓은 레인지, 그리고 좌측의 헨더슨은 조금 게으르고, 우측의 프레스톤은 수비가 좋지 못하다는 점과 맞물려 수비 이닝시에 체력소모가 평균적인 중견수들보다 훨씬 심했다. 그렇기에 작년까지 진호는 그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약 10경기 이상의 휴식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111차전. 오늘 경기까지 진호는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모두 선발로 출전했다. 물론 발렌타인 감독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브레이브스와 지구 1위 다툼을 하는 것만으로도 최소 와일드카드가 보장되던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중부지구와 서부지구의 승률이 만만치 않다는 점. 그리고 같은 지구의 10,000패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브레이브스와 메츠를 바짝 쫒아오며 동부지구의 1위 다툼이 혼돈으로 빠져있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발렌타인 감독은 진호를 배려했다. 가리비아 자신이 원정경기에 따라 올 수 있었던 점 역시 그 배려의 일환이었다. 진호가 현재 팀의 핵심 자원 중에 하나인 것은 맞았지만 그래 봐야 이제 4년 차. 원정경기에 자신의 개인 트레이너의 대동을 요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가리비아 자신이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발렌타인 감독의 공이 컸다. 물론 그것 역시 진호를 최대한 뽑아먹겠다는 의도였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요 며칠 했던 것들이 효과가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98년 미국에 도착한 이래 가리비아는 매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나왔던 UNAM대학은 세계에서 손에 꼽힐 만큼 좋은 대학이었지만, 인프라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그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던 부분에서 매우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것은 1920년대 아치볼드 비비안 힐 이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되던 피로에 관한 이론이었다. 티모시 노아케스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학자가 주창한 그 가설, 일명 중앙관리자 이론은 가리비아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타당했다. 그 이론은 피로에 관해 실제와 모순되던 몇 가지 현상을 효율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생리학계에서는 여전히 이론이 많았다. 하지만 가리비아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확고한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관리하는 선수들에게 그런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
‘심리치료라니 가리비아도 참······.’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은 잘못됐다. 가리비아는 유능한 트레이너였고 동시에 부지런했다. 2001년밖에 되지 않은 지금 그가 중앙관리자이론을 들고 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젖산은 피로의 원인이 아니고 1차 적으로 찾아오는 피로란 결국 뇌의 리미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현시점의 생리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급진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리비아는 그것을 수용했다. 문제는 인간의 뇌는 고작 그 정도로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호르몬 관련 약물이라면 또 모를까. 고작 심리치료로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뭐, 그런 최신이론(?)을 통한 컨디션 관리는 효과가 없었지만, 그 밖의 것들은 매우 훌륭했다. 특히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훌륭한 마사지사였다.
따악!!
힘있게 당겨친 변화구가 1루 쪽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큭.’
좋지 않았다. 분명 느린 공인데 이상하게 빗나가는 느낌. 하긴 구위와 제구가 되지 않았다면 최고 88마일짜리 속구로 빅리그에 살아남는 것이 가능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나와 묘하게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다섯 번째 빠른 공.
빠르다고 해봐야 84마일? 85마일? 고등학생 투수들이 던지는 공보다도 느린 공이다. 빅리그에서 93승이나 거둔 투수라고는 믿기 힘든 공.
‘빠질 거야.’
루이터의 속구가 바깥쪽으로 크게 벗어났다.
뻐엉!!
“스트라잌!!”
“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반문. 오늘 전반적으로 바깥쪽에 후한 심판이었지만 방금 이 공은 조금 너무했다. 깜짝 놀라 돌아본 나와 심판이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저 인간. 눈이 슬쩍 돌아간다. 망할······. 이건 심판 자신도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는 의미였다. 젠장. 하지만 심판이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고 판정이 번복될 수는 없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2001년 시점에서 프로야구의 심판은 실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젠장.’
가볍게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 밖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심판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이상 이번 게임에서 무언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줄 것이 분명하다. 뭐 그것이 꼭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나의 버릇대로 옷깃을 가볍게 털고 장갑을 조여 맸다. 볼카운트 0-2 자신에게 극도로 유리한 카운트임에도 마운드의 커크 루이터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볼카운트 0-2. 커크 루이터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볼카운트가 불리하다고 해도 나에게는 단번에 상황을 뒤집을 한 방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따악!!
[쳤습니다!!!]
크게 떨어지는 커브를 그대로 후려쳤다. 나의 배트를 끌어내기 위한 유인구임이 분명한 커브였다. 하지만 존을 조금 벗어난 공이라고 해도 76마일짜리 커브는 나에게 너무 느렸다.
‘조금 약한데.’
하지만 확실히 완벽한 타구는 아니었다. 전력을 기울여 후려친 공이었지만 담장을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몸이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1루를 지나 2루까지. 3루에 선 우리 코치의 손이 돌아간다.
[우중간 담장을 직격하는 타구!! 어?]
[아!! 3루타 골목(Triples Alley)!! 3루타 골목입니다!! 불규칙한 바운드!! 캘빈 머레이 선수 공을 놓쳤어요!!]
[그 사이 주자는 1루 지나 2루에!! 2루 지나갑니다!! Kang 정말 빠릅니다!!]
3루까지 멀지 않은 상황. 힘차게 돌아가는 코치의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GO!!!”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몸. 나의 왼발이 3루 베이스를 밟았다. 이미 90미터 가까운 거리를 전력으로 달린 몸이 급하게 산소를 요구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하지만 여력은 충분하다. 홈을 지키고 있는 베니토 산티아고의 모습이 보인다. 단단한 체격이지만 포수치고는 크지 않은 몸이다. 충분히 날려버릴 수 있다.
쾅!!!
달리던 힘 그대로 산티아고의 몸을 밀어냈다. 마치 미식축구의 태클을 연상케 하는 거친 움직임. 올해 36살. 86년 이후 메이저에서 무려 16년 동안이나 포수로 뛰어온 산티아고는 노련했다. 나의 거친 태클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장구류의 무게를 이용해 적절하게 충격을 흡수한다. 그리고 동시에 홈베이스만큼은 내주지 않겠다는 자세로 쓰러진다.
‘어딜!!’
하지만 내가 빨랐다. 산티아고의 몸이 홈베이스를 완전히 덮기 전 나의 몸이 먼저 산티아고를 밀어냈다.
“세이프!!!”
심판의 입에서 세이프 판정이 흘러나왔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입니다!!]
[1:1 팽팽한 상황에서 Kang이 발로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저 선수 커리어 두 번째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죠?]
[네, 지난 99년 월드 시리즈에서 70년 만에 기록했던 것이 커리어 첫 번째였고 이번에 커리어 두 번째네요. 정규시즌에서는 처음 기록하는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입니다.]
[7회 초, 마침내 경기의 추가 메츠에게 기울어집니다. 뉴욕 메츠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1점 차이로 앞서기 시작합니다.]
자이언츠의 덕아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투수 교체. 그들 역시 오늘 경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그 위대한 배리 본즈의 타석이 남아있었다. 안타, 삼진. 그리고 플라이 아웃. 추가점 없이 경기가 이어졌다.
***
‘후아, 더럽게 덥네.’
옥타비오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이 줄줄 흐르는 땀방울은 8월의 무더위 때문임이 틀림이 없었다. 마운드에 올라와 이제 고작 9개. 지치기에는 너무 이른 타이밍이다. 절대 지금 타석에 올라온 타자가 103경기째에 홈런만 49개를 친 괴물이라서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 주자 1, 2루 상황으로 저 괴물을 거르기 힘든 상황이라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8회 말, 자이언츠의 공격 2아웃 주자 1, 2루. 타석에는 3번 타자 배리 본즈 선수가 올라옵니다. 매우 중요한 상황입니다.]
[2:1로 뒤지고 있는 자이언츠 입장에서는 역전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반면 여기만 막아낼 수 있다면 메츠로서는 오늘 경기를 거의 가져갔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로진백과 땀방울로 손끝을 찐득하게 만든 옥타비오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배리 본즈는 여전히 거대했다.
‘응?’
그런데 그 순간 옥타비오의 눈이 커졌다. 덕아웃에서 내려온 고의사구 지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지시였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배리 본즈를 상대하느니 그냥 만루를 만들고 제프 켄트를 상대하는 쪽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 제프 켄트도 3할의 타율에 21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강타자였지만 말이다.
‘젠장.’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26살. 긴장하고 깨지더라도 승부를 피하고 싶지 않은 옥타비오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날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옥타비오가 홈플레이트에서 네 걸음 떨어진 피아자를 향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 고의사구네요.]
관중석에서 야유가 흘러나온다. 대기 타석의 배리 본즈가 ‘뭐 당연한 일이지.’라는 표정으로 무료하게 서 있었다. 일 구, 이 구, 삼 구. 그리고
‘어!!’
땀에 절어있던 손가락 끝이 미끄러졌다. 노리던 곳보다 한참 안쪽으로 향하는 공. 그 순간 무료하게 서 있던 배리 본즈의 두 눈이 빛났다.
***
배리 본즈를 거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옥타비오 녀석이 고의사구조차 실투할 만큼 멍청한 녀석이라는 점이었다. 배리 본즈의 배트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실투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존을 벗어난 공. 그리고 불안정한 자세. 하지만 배트를 휘두른 이는 배리 본즈. 무릎을 꿇고 후려친 공을 홈런으로 만드는 괴물이었다.
‘제발!!’
두둥실 떠오른 공이 우중간으로 향했다. 나의 직감대로라면 아슬아슬한 홈런. 하지만 이곳은 AT&T 파크다. 맥코비 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공의 위력을 경감시켜줄지도 몰랐다. 우중간 정상적인 형태의 펜스와 기묘한 모양의 펜스 경계지점 즈음을 향해 질주했다.
‘조금만 더 중앙으로!!’
이미 2루 주자는 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1루 주자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홈런이 아니더라도 저 24피트짜리 괴상하게 생긴 펜스의 중앙에 공이 직격한다면 최소한 동점, 어쩌면 역전까지 허용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야구의 신님. 댁도 저런 약마가 당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시죠? 그러니까 좀 도와주십쇼.’
나의 간절한 기도가 통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맥코비 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만든 심술이었을까. 본즈의 타구가 살짝 좌측으로 꺾였다.
[어?]
물론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메츠 외야의 중앙에는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웃!!”
8회 말. 내가 본즈의 50번째 홈런을 도둑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