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29화 (129/210)

# 129화.

비극(1)

연봉은 적었다. 자신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야심차게 진행했던 일은 누군가의 전화질 한 번에 무너졌고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한 프로젝트는 시간이 지나보면 폭망인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리드먼은 이 직업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부상으로 야구를 포기했던 자신이 비록 선수가 아닌 주변인이라고는 하지만 또다시 야구를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그럭저럭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말이지.’

“좋은 아침이에요.”

“아아! Kang!!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요.”

“네, 오늘 조금 중요한 일이 있어서 눈을 좀 일찍 떴네요.”

현재 피아자와 함께 팀의 양대 축이자 장기적으로 메츠라는 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될 진호다. 현재 보여주는 기량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장기계약 이후로도 한 번, 혹은 두 번의 대형계약이 보장된 인재. 9월로 접어든 지금, 시즌 초반 50홈런도 너끈할 것 같던 페이스는 조금 둔해졌지만 39홈런으로 이미 커리어 두 번째 40-40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하, 그렇군요. 하긴 오늘 브레이브스, 그것도 매덕스와의 경기니까요.”

“네, 뭐 그렇죠.”

물론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진호가 39번째 홈런을 친 지도 벌써 일주일. 40홈런은 99년 자신의 커리어 최다 홈런과 동률이자 40-40이라는 대기록을 의미한다.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두 경기 정도 푹 쉬면 좋을 테지만.’

현재 팀의 사정, 그리고 리그 전체의 분위기 때문에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고작 하루 이틀 쉰다고 몸이 극적으로 좋아지기도 힘들 테니. 어쨌거나 프리드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나은 거래를 통해 이 에이스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아, 프리드먼씨. 혹시 내일 맨하탄쪽으로 갈 일 있으신가요?”

“네? 왜 그러시죠?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딱히 나갈 일은 없긴 합니다만, 뭐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따로 클러비들에게 부탁하면 될 겁니다.”

“아, 아닙니다.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

“젠장!!”

감독과 만나고 돌아오는 헨더슨 씨의 표정이 좋지 않다.

‘오늘도 휴식인가.’

벌써 세 경기 연속 결장. 화가 날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심정도 이해가 갈 만했다.

에식스 스네드.

올 여름 세인트루이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팀에 들어온 마이너. 올 해 25살이 되는 그는 이번 확장로스터를 통해 메이저에 콜업된 이후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프레스톤이나 나 정도의 센세이션한 활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즌 막판 지칠 대로 지친 헨더슨씨의 폼과 비교한다면 에식스 쪽이 더 나을지 몰랐다. 당연한 일이다. 헨더슨 씨의 나이도 이제는 만으로 42살. 몇 달 후면 만으로 43살이 되는 나이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특별히 뭐라 건넬 말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지금 헨더슨 씨에게는 위로나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을 잘 추스르고 치열하게 휴식해서 빨리 그라운드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애초에 저 녀석으로 큰 경기까지 끌고 가는 건 불안하기도 하고 말이지.’

오늘 시합의 상대는 지구 라이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지난 91년 이후 우리에게 패배했던 99년을 제외한다면 단 한 번도 지구 우승을 놓치지 않았던 브레이브스는 올해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그렉 매덕스, 탐 글래빈, 케빈 밀우드는 여전히 훌륭했고, 작년 부상 이후 불펜으로 보직을 전환한 존 스몰츠 역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년 얼마 되지 않는 금액으로 영입했던 존 버켓이 뜻밖의 성적을 보여줌으로써 브레이브스는 올해 역시 지난 99년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라는 환상적인 선발진에 못지않은 위력을 과시했다.

‘뭐, 그래봐야 3위랑 1승 차이나는 2위지만.’

현재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는 그야말로 아귀다툼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우리와 브레이브스 그리고 필리스가 기록하고 있는 승수는 각기 80, 79, 78. 그야말로 박빙 그 자체였다. 200이닝+ 3점 전후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선발을 네명이나 보유한 그들이 지금까지 고작 79승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딱!!

[아, 빗맞은 타구, 이루수 정면으로!!]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올 시즌 브레이브스의 타선은 그야말로 처참 그 자체였다. 타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치퍼 존스 뿐. 최고의 수비에 묻혀 부각되지 않았을 뿐, 평균 이상의 배트를 꾸준히 보여주던 앤드루 존스도 32개라는 홈런만이 돋보일 뿐, 0.249/0.308/0.452의 슬래시라인은 타고투저의 현재 리그에서 평균도 되지 못하는 성적에 불과했다.

‘전체적으로 약빨고 야구하는 선수들은 거의 없는 것 같네. 역시 클럽 하우스의 중심이 되는 베테랑이 중요해.’

마운드에 괴팍하지만 그 누구에 못지않게 야구를 사랑하는 남자가 올라왔다. 이제는 슬슬 현역 최고를 넘어 시대 자체를 관통하는 이름이 되어가고 있는 대투수. 하지만 매년 두 번씩은 꼬박꼬박 상대하다 보니 이젠 그런 대투수라기보다 그저 심술궂은 동네 아저씨처럼 느껴지는 그렉 매덕스였다.

99년 무난하게 에이징 커브를 타는 것처럼 꺾여가던 저 아저씨는 그 해 지구 우승을 놓친 것이 어지간히 분했는지 작년 갑자기 다시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공을 던져댔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139경기가 지난 시점에서 212이닝. ERA 2.93 남은 경기 숫자를 생각한다면 240이닝 정도는 무난하게 달성할 것으로 보이는 페이스다.

딱!!

[타구 투수 정면으로!! 그렉 매덕스 공을 잡아 1루에!!]

“아웃!!”

[그렉 매덕스 좋은 수비!! 이거 오늘 체인지업이 굉장히 좋은데요? 벌써 두 타자 연속 내야 땅볼로 잡아 냅니다.]

[자 다음은 3번 타자 Kang입니다. 대단한 재능을 갖춘 선수이긴 합니다만 파워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올 시즌에는 그 부분까지 완벽하게 보완이 됐습니다. 올 시즌 정말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요.]

[체력 역시 대단합니다 메츠에서 유일하게 단 한 경기도 결장 없이 139경기를 모두 출장한 선수는 Kang 뿐입니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 부분은 체력이라기 보다 메츠에 지금 Kang을 대체 할만한 중견수 백업이 전무한 점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몇 경기를 보면 지친 기색이 분명하거든요. 뭐, 상황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처럼 경쟁하기 전 시즌 중반에 몇 번씩 적당한 휴식을 부여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매덕스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매덕스가 혀를 찼다. 그 개자식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저런 개자식은 토니 그윈 하나로 충분했거늘, 그 자식이 은퇴하려고 하기 무섭게 저런 놈이 또 나타나다니.

‘젠장, 오늘은 체인지업이 아주 죽여주는데.’

혹시라도 오늘 정도로 체인지업이 잘 들어가는 날에는 저 괴물놈에게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유혹. 하지만 매덕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자식은 그 엿같은 놈이랑 같은 종류라니까. 체인지업이 진짜로 저놈 대가리를 때려죽이는 게 아닌 이상 통할 리가 만무하잖아.’

초구 바깥쪽 아슬아슬한 투심.

딱!!

진호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본능적으로 돌아가는 매덕스의 고개.

‘헉, 간 떨어질 뻔했네. 저 괴물 같은 자식이.’

파울 폴대를 스쳐 날아가는 공이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엿 같은 토니 그윈과 저 개자식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파워.

한순간이라도 방심한다면, 아니 방심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담장 밖으로 공을 날려보낼 저 무식한 힘. 최근 들어 조금 지쳤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다. 애초에 지친 타자가 어떻게 바깥쪽으로 저렇게 딱 붙인 투심을 저 멀리까지 날려 보낸단 말인가.

‘괜찮아. 담장을 넘어가건 스타디움 밖으로 빠져 나가건 폴대 밖으로 빠지는건 결국 파울이야. 나한테 유리한 거야.’

볼카운트 0-1. 홈플레이트 너머 에디 페레즈가 싸인을 보내왔다.

‘저 머저리가?’

요구하는 것은 체인지업. 물론 들어줄 의향 따윈 없었다. 매덕스가 재빨리 투구 자세에 들어갔다. 매덕스에게 사인을 보내던 페레즈의 미트가 순간적으로 움직였다. 고개를 저을 필요도 없었다. 페레즈는 매덕스가 자신의 사인을 완벽하게 무시했다는 것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뻐엉!!

몸쪽 바짝 붙인 빠른 공. 반쯤 돌아가던 진호의 배트가 멈춰섰다.

‘저 귀신같은 자식.’

정말 잘 들어간 공이었다. 최근 몇 달을 통틀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공. 하지만 그런 공을 저 괴물은 귀신같이 골라냈다.

볼카운트 1-1. 매덕스가 승부를 이어갔다.

***

투심, 투심, 그리고 또 투심. 물론 투심의 비중이 매우 높은 매덕스라지만 오늘 앞선 두 타자를 잡아냈던 공들이 체인지업이었고 그 구위가 범상치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나한테는 체인지업을 안 던질 생각인건가?’

진짜 던지지 않을 생각이건, 혹은 던지지 않는 척 하다가 기습적으로 던질 생각이건 어쨌든 그 그렉 매덕스가 나를 저토록 대단하게 평가한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했다. 비록 92년부터 98년. 그 압도적인 전성기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투수라곤 했지만, 매덕스는 여전히 리그에서 손꼽힐 만큼 대단한 성적을 기록 중인 투수였으니 말이다.

네 번째 몸쪽 아슬아슬한 공을 커트해냈다. 볼카운트는 2-2. 마운드의 매덕스가 재빨리 투구 자세에 들어갔다.

바깥쪽 살짝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공. 아슬아슬하지만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이다. 하지만 볼카운트는 이미 투스트라이크. 아직 심판의 존을 완벽하게 확정 짓기엔 샘플이 부족한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후한 존을 가진 심판이라면 충분히 스트라이크콜을 부를 수 있다. 나의 배트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이런!!’

그런데 존에 가까이 다가온 공이 갑작스럽게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초 한번 보여줬던 그 스플리터였다. 시즌 초와 비교되지 않는 완성도. 손목을 억지로 틀어 배트를 조절했다.

‘부족해.’

최선을 다한 움직임. 평소 스윙을 할 때 절대 흐트러지지 않던 중시축까지 무너졌다. 하지만 그대로 스윙삼진을 당하느니 운에라도 맡겨 보는 쪽이 옳았다.

딱!!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타구가 내야를 구른다. 물론 그것을 지켜볼 시간따윈 없었다. 전력을 다한 질주. 1루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작 90피트다. 전력을 다해 달린다면 4초도 걸리지 않는 거리. 3루의 치퍼 존스가 공을 잡아 1루를 향해 던졌다. 미트를 벌리고 서 있는 리코 브로그나의 팔이 쭉 뻗는다.

뻐엉!!

미트에 공이 틀어박히는 소리.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나의 오른발이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조마조마한 순간. 심판의 입이 열렸다.

“세이프!!”

하아,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하룻밤 충분히 쉬고 오늘 준비운동까지 끝냈음에도 몸에 누적된 피로는 90피트 달리기 한 번에 나를 피곤으로 몰아 넣는다.

‘그래도 다행이야.’

2아웃 주자 1루. 하지만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는 그 피아자다. 시즌 초반을 부상으로 푹 쉬었고, 포수라는 이유로 중간중간 휴식을 취한 그는 지금 시점에서 나보다 더 믿음직한 타자였다.

‘뭐 그것도 오늘까지지만 말이지.’

며칠 전 발렌타인 감독이 직접 물어왔었다. 혹시라도 휴식이 필요하다면 줄 용의가 있다고. 물론 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솔직히 발렌타인 감독도 내가 거절할거라 생각하고 물어본것이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거절한 이유는 그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히 경기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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