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30화 (130/210)

# 130화.

비극(2)

‘오늘까지만 버티면 돼.’

오늘을 위해 제법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 한때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일을 막아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미리 어딘가에 익명으로 제보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위험 부담에 비해 이 일이 방지될 가능성은 너무 낮았다. 당연한 일이다.

United states of America.

90년 헤게모니의 종결 이후 명실상부한 세계의 지배자. 역사상 가장 자비로운 패권국이다. 그런 이들의 심장에 비수가 꽂힐 것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그 테러리스트들은 이 테러가 가능할지 몇 가지 예행연습까지 했었지만, 제지 따위는 당하지 않았다.

‘한국 쪽 주식은 일단 다 현금화시켜뒀고, 미국 쪽도 방산주 위주로 투자해뒀으니 크게 손해보는 건 없을 거야.’

모두가 다 피해를 보는 가운데 홀로 이득만 보는 이는 눈에 띈다. 그리고 이번 피해는 단순히 금전적 문제가 아니다. 그저 살아가고 있던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 그리고 누군가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들이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이념의 다툼으로 목숨을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사건은 소비에트 연망의 패망 이후 온순하게 잠자던 패권국 미국을 일깨우는 사건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미국은 이전과 다르다. 그런 식의 미심쩍은 금전적 이득 앞에 사생활 보호 따윈 통할 리 만무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생활이 낱낱이 해부되는 것은 나로서는 극히 곤란하다. 여기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피해갈 가능성이야 존재한다. 하지만 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인생은 길고 이런 테러가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커다란 요동은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애초에 돈은 충분하기도 하고 말이지.’

이 시절의 흐름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애당초 이 시기 나는 운동에 전념하던 한 명의 마이너리거였을 뿐 경제 따윈 관심도 없었다. 그저 기억하는 것이라면 IT버블이 터지고 세계 경제가 크게 요동쳤다는 것 정도? 그렇기에 콜옵션등을 이용한 장난질은 적절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대략적인 날짜가 년 단위로 틀린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하지만 부자가 되는데 굳이 그런 모험은 필요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손에 꼽힐만한 부자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IMF를 통해 상당히 부풀었던 돈들과 CF, 그리고 적지 않았던 연봉은 종잣돈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전반적인 IT버블, 그리고 그 중에 있었던 진짜배기들은 나를 어마어마한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이미 한 사람이 평생을 낭비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 어지간한 메이저리그 구단 하나를 컨소시엄 없이 그대로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의 부유함.

그에 더해 딱히 이번 9.11에 맞춘 옵션거래로 금전적 이득을 극대화하지 않더라도 현금화시켜둔 자본을 다시 재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당장 IT버블이 펑 터짐으로서 초토화 되어 있던 한국주식시장은 12일 아침 장이 열리자마자 무려 85%가 넘는 종목이 하한가를 기록했다.

북한

대한민국의 영원한 골칫덩어리.

물론 테러 직후 본인들은 본인들 짓이 아니라고 재빨리 부정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고, 그것은 곧 대한민국 증시에 유례없는 대폭락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소행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쭉쭉 떨어지던 주식들을 적절한 시점에서 인수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돈은 그저 나의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어 줄 재료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삶 그 자체였고 나의 삶이란 결국 야구다.

***

9월 11일 화요일 이른 아침. 어제 11시에 경기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잠든지 고작 3시간. 나도 모르게 잠자리에서 눈이 번쩍 떠졌다.

‘하, 진짜 일어날까?’

나 개인의 이득을 위해선 사건이 일어나야 했다.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번 시즌 나의 일정은 9.11을 예상했기에 가능한 가혹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이 생기는 것이 좋을 수 없었다. 내 주변 몇몇의 인생이 나로 인해 틀어졌듯이 이 비극적인 사건도 틀어지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이 들었다.

그리고 8시 46분. TV에서 푸른 빛의 자막이 흘러나왔다.

‘역시.’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2001년 9월 11일 8시 46분. 뉴욕의 심장 세계 무역 센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진호야!! 너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걱정 않으셔도 돼요.”

“미국에서 아주 큰 일이 났다고 해서.”

“같은 뉴욕이라고 해도 제가 있는 곳이랑은 좀 떨어진 곳이에요.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에휴, 다행이다.”

“아, 엄마 제가 나중에 전화할게요. 지금 조금 바빠서요.”

부모님을 비롯해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빗발쳤다. 아니 연락이 빗발치는 것은 한국의 지인만이 아니었다.

“진호!! 괜찮아?”

“응, 알잖아. 우리 집 멀리 떨어진 거.”

“하, 다행이다. 전화도 잘 안 되고 혹시라도 맨해튼에 나간 거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냥, 한국에 가족들이랑 친구들한테서 계속 전화가 와서 그런 거야. 그보다 재키 오늘 오디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그게 중요해? 뉴욕 지금 위험한 것 같은데. 일단 LA로 와. 미친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워워, 진정해. 뭐 밝혀진 건 아직 없지만, 이런 걸 연속으로 할 수는 없을 거야. 여기 뉴욕이야 뉴욕. 미국의 심장 뉴욕.”

“그래, 잘 알지. 보잉 747이 빌딩을 폭발시킨 뉴욕. 망할 정보부 놈들은 그렇게 세금을 뜯어가면서 대체 뭘 한 거야.”

재키가 연신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투덜거림이 순수하게 나에 대한 걱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안전하다면 자신도 지금 당장 뉴욕으로 달려오겠다는 그녀를 전화로 충분히 달랬다.

‘어디 보자, 구단과의 연락은 이미 끝냈고, 연락할만한 곳에는 다 연락한 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오늘 경기는 취소됐다. 하루하루가 급하게 돌아가는 시즌 막판이지만 이번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당장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 사무국에서 일단 시즌 중지를 발표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대로 시즌 종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있다.

‘뭐, 그래 봐야 일주일 정도 갈 일이지만.’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극심한 공포, 혹은 분노로 가득한 상황. 나는 6개월간 달려온 몸에 충분한 휴식을 부여하며 동시에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몇 가지 일들을 실행했다.

-뉴욕 메츠의 Kang!! The September 11 attacks 희생자들을 위해 100만 달러 쾌척.-

-Kang ‘미국인은 아니지만, 뉴욕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불행한 사태에 대해 심각한 유감을 표합니다.’-

모두가 분노와 공포로 혼란스러울 때, 나는 미리 준비해둔 100만 달러를 기부금으로 사용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사태를 수습하려는 소방관들 그리고 주변을 맴도는 가족들을 위해 각종 구호 물품들이 전달됐다. 이것은 나의 이미지 재고 따위의 계산적인 속셈이 아닌 순수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왔다.

-Kang, 뉴욕 시민, 하지만 미국인은 아닌 뉴욕의 연인이 뉴욕에게 사랑을 표하다.-

힘든 순간, 자신을 돕는 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뉴욕은 본래 양키스의 텃밭. 따라서 맨해튼의 사람들이 응원하는 야구팀 역시 대부분 양키스였다. 고작 작은 선행 하나가 양키스의 골수팬들을 메츠의 팬으로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 강진호라는 개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팬들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개인적인 성적만 따진다면 난 분명 데릭 지터보다 나았다. 하지만 인기 면에서는 확연하게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팀의 성적도 성적이지만 애초에 양키스라는 프랜차이즈의 힘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저 기부와 미국인이 아닌 뉴욕 시민이라는 타이틀은 순식간에 나의 인기를 데릭 지터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이건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다른데.’

덕분에 집에서 휴식만 취하려던 계획을 틀어 몇 차례 현장을 방문하긴 했지만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상처받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괴로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마음을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고결한 성자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슈퍼맨도 아니다. 한때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던 마천루가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나의 커리어, 나의 삶. 나의 야구를 위해 내가 버린 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했다.

***

“평소보다 많은데?”

“그러게.”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고작 일주일 전, 뉴욕은 사상 최악의 재앙을 맞이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관객들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론 나의 팬들이 늘어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난 이번 9.11 사태에서 내국인들보다도 빠르게 가장 먼저 기부를 실행했던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번 사태가 사람들에게 공포와 분노만큼 커다란 스트레스를 심어준 것이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속적으로 스트레스에 노출 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것이 해소되기를 원하는 법이고, 마침 눈에 띄었던 메츠의 경기를 관전하러 온 셈인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미국의 국가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표정이 숙연하다. 전체주의적인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잠시 고개를 숙여 이번 일을 통해 희생당한 이들을 애도했다.

[메츠와 브레이브스의 2차전 경기. 이곳은 셰이 스타디움입니다.]

[1차전 경기로부터 일주일만이로군요. 그 사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네, 있어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일이었죠.]

일주일간의 충분한 휴식. 물론 반년 동안 혹사당한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기에 일주일은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제 남은 경기는 채 20경기가 조금 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경기들에 전력을 다하기에 일주일의 휴식은 충분하다.

마운드에 그렉 매덕스가 올라왔다. 마찬가지로 일주일의 휴식을 취한 매덕스였다. 하지만 애초에 나흘 혹은 닷새의 휴식이 보장되어있는 선발 투수가 일주일을 쉰 것과 6개월간 혹사당한 야수가 일주일을 쉰 것은 다르다. 한결 좋은 안색의 리키 헨더슨이 매덕스의 몸쪽 체인지업을 툭 건드려 내야 안타를 만들었다.

대기 타석에서 지켜본 매덕스는 지난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월터 존스 이후 가장 꾸준한 투수. 그의 투심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저것이 진짜 속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현란했다. 타석에 들어 서기 전, 옷깃을 가다듬고 장갑을 동여 맺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여기까지다. 만약 나의 선택을 알게 된다면 누군가는 나를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이코패스라고 부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야구를 위해 성공했던 삶을 거슬렀고, 더 편하고 더 쉽게 살 수 있는 길도 버렸다. 지금 나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야구 뿐이다.

9월 중순. 세계의 역사가 급격하게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 나는 여전히 셰이 스타디움의 타석 위에서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라이브볼 시대 가장 위대한 거인이 언짢은 표정으로 볼을 움켜쥐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