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비극(3)
매덕스가 하늘을 힐끗 바라봤다.
‘빌어먹을 테러리스트 자식들 같으니.’
한 시즌 내내 쉬지 않고 달려왔던 놈이다. 체력적 우위가 자신에게 있는 상황에서 4타석 3타수 1안타로 간신히 막아냈다. 그런데 무려 1주일간 아주 푹 쉬고 돌아왔다. 얼굴의 광택부터가 다르다. 역시 스물네 살. 일주일의 휴식만으로도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쌩쌩해질 나이다.
‘쳇, 언제부터 야구를 힘이랑 체력으로 했다고.’
인간이 가장 위대해진 것은 눈과 눈 사이의 기관 덕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야구 역시 마찬가지다. 저 짐승 같은 녀석이 비록 체인지업까지 구분해내는 사기적인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승리하는 것은 매덕스 자신일 것이다.
1루의 리키 헨더슨이 세 걸음 반의 리드폭을 벌리는 그 순간 매덕스가 빠르게 공을 뿌렸다. 몸쪽 스플리터. 기습적인 초구 변화구였다. 타석의 진호가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충분한 휴식을 통해 쌩쌩해진 몸놀림. 안정적인 자세로 한껏 끌어당긴 배트가 세차게 돌아갔다.
그리고 진호의 배트가 반쯤 끌려나온 그 순간 매덕스의 공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크볼만큼은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종무브먼트. 그 순간 진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됐어.’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가는 것과 아닌 것은 승부에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려 결국 승리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매덕스라는 투수의 방식이다. 하지만
딱!!
몸의 중심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움직인 것은 오직 손목, 그리고 팔꿈치의 각도뿐. 완벽한 회전운동이 담긴 배트가 매덕스의 스플리터를 후려쳤다.
“허······.”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가장 완벽한 공에 가장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타자들이 담장을 넘기는 일은 종종 있어왔다. 98년의 맥과이어를 시작으로 올해 배리 본즈까지. 하지만 지금 진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 무너지는 자세에서 터무니없는 괴력만으로 공을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는 밸런스. 그리고 그 위에 궤적의 변화로 손실된 운동에너지를 보충할만한 힘이 더해졌다.
셰이 스타디움 중앙 담장 너머 실크 햇 위로 붉은 사과가 솟아올랐다.
[홈런!! 홈런입니다!!]
[Kang!! 1회 말,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2점 홈런을 뽑아냅니다.]
[시즌 40호 홈런입니다. 이걸로 커리어 통산 두 번째 40-40을 확정짓습니다.]
[한 선수가 두 번의 40-40이라니 이건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입니다.]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로 돌아온 Kang을 향해 메츠의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는군요.]
펑, 퍼버벙!!
홈에서 작성한 대기록에 외야 곳곳에서 폭죽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폭죽들을 지켜보는 매덕스의 기분은 점점 더러워진다. 그냥 홈런을 맞았다고 해도 기분 나쁠 일인데, 하필 애송이 놈의 대기록의 결정타라니. 신경질적으로 로진백을 두들긴 매덕스가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진호를 노려봤다.
35살. 이제는 슬슬 전성기를 지나 무사히 연착륙만을 기원해야 하는 나이. 매덕스의 시선에 강력한 경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
1회 말, 홈런을 쳐낸 것은 솔직히 절반 이상이 운이었다. 마음 한구석 매덕스가 던지는 공이 혹시 스플리터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홈런.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타이밍에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러 홈런을 만든 것이 너무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푹 쉬었다 이건가?’
마운드의 그렉 매덕스가 정말 불꽃 같은 피칭을 이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94년, 95년 그의 전성기를 떠오르게 만드는 압도적인 피칭. 우리 팀의 타자들이 연신 방망이를 휘저었다.
“젠장. 저 영감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프레스톤의 투덜거림에 헨더슨 씨가 답했다.
“저게 본래 매덕스지. 너희들이야 페드로나 랜디 존슨을 최고로 생각하지만 90년대 초중반 저 매덕스야말로 그 녀석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고. 물론 그런 매덕스를 상대로 대활약했던 이 몸은 더 대단했었지만 말이야.”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헨더슨 씨의 이야기에 프레스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기승전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는 헨더슨 씨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는 사이 어느새 매덕스가 내야 땅볼을 멋지게 처리하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뭐, 괜히 조상님들 소환했던 게 아니니까.”
실제로 95년과 96년의 매덕스는 00년의 페드로에 이어 라이브볼 시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로 높은 ERA+를 기록했었다.
“그래도 오늘 제이슨이 제대로 던져 줘서 좀 다행이네요.”
“저 녀석도 보통은 아니지. 소화 이닝이 좀 적어서 문제긴 한데 구위만 놓고 보면 솔직히 우리 팀에서 제일 대단하잖아.”
시즌 초반 피츠버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했던 에이스 제이슨 슈미트가 역투했다.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까지 179.1이닝으로 소화 이닝은 많지 않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뻐엉!!
[아, 볼넷. 스트레이트 볼넷입니다.]
[제이슨 슈미트 선수, 다 좋은데 이런 뜬금없는 볼넷이 참 아쉬워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투수이긴 합니다만 컨트롤만 조금 더 잡히면 정말 대단한 투수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로페즈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슈미트가 앤드루 존스에게 병살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7이닝 1실점. 점수는 2:1. 7회 말 매덕스가 또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7회 말, 9번부터 시작되는 메츠의 타선. 제이슨 슈미트 선수를 대신해 제이슨 필립스 선수가 타석에 들어오는군요.]
[시즌 초반 피아자 선수의 DL기간에 메이저에 데뷔했 제이슨 필립스 선수. 당시에는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노포크로 돌아갔었는데, 거기서 아주 훌륭한 성적을 거뒀네요. 0.303/0.365/0.424. 포수 치고는 매우 준수한 성적입니다.]
[저 선수, 타격에서는 굉장한 포텐셜을 갖춘 유망주라고 평가받고 있는 선수입니다. 메츠로서는 이제 슬슬 피아자의 뒤를 생각해야 할 시기인 만큼 거는 기대가 상당할 겁니다.]
[하지만 수비에서 상당한 약점을 보이고있는 선수이기도 해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메츠가 1루수로의 컨버전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흠, 하지만 저 선수의 공격력이 두각을 드러내는 건 포지션이 포수이기 때문이거든요. 일루수로서 지금 공격력은 조금 곤란합니다.]
나와 동갑이기는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97년 드래프트로 입단한 덕분에 마이너에서 한 번도 함께 하지 못했던 제이슨 필립스가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팀에서 피아자 이후를 생각할 때 가장 상위로 놓고 있는 유망주. 97년 하위 싱글 A에서 0.206을 기록했던 타율을 98년에는 3할로 끌어올리며 어드밴스드 싱글 A로 올라왔고, 상위리그에 올라오자마자 떨어지는 성적을 다음 해에 또다시 끌어올리는 식으로 매년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고 올라온 착실한 친구였다.
올해 초 피아자가 DL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잠시 메이저에 올라왔을 때는 상당히 좋지 못했지만, 마이너에서 높은 적응력을 보여줬던 만큼 아주 조금은 기대가 가는 친구이기도 했다.
‘물론 마이너와 메이저는 확 다르긴 하다만.’
그렉 매덕스가 공을 뿌렸다.
뻐엉!!
몸쪽을 파고 들어가는 투심 패스트볼. 녀석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저것은 내가 마이너 시절 케빈 타파니의 공을 처음 본 순간을 닮아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높은 수준의 공. 뭐 오늘 매덕스의 공은 AAA에서 1년을 구른 필립스에게도 수준이 다르다는 느낌을 전해주기 충분했다.
두 번째. 매덕스의 몸쪽 체인지업. 필립스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잌!!”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필립스가 어버버하는 사이 매덕스의 피칭이 이어졌다.
딱!!
바깥쪽 낮은 체인지업. 배트 끝을 스친 공을 치퍼 존스가 가볍게 잡아내 1루로 뿌렸다.
“아웃!!”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필립스의 표정이 허탈해 보인다. 좋지 않았다. 물론 모든 선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공하는 유형의 선수들은 이런 상황에서 저런 허탈함 대신 투쟁심을 불태우는 선수들이다.
‘피아자씨가 이제 4년 더 남았나?’
햇수만 생각한다면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최근 피아자씨의 몸 상태를 생각한다면 그 4년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경기를 포수로 소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뭐,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지.’
가볍게 고개를 젓고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타석에는 이미 헨더슨 씨가 들어서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휴식을 통해 체력을 회복한 헨더슨 씨였다. 아니 그 이전 사흘 동안 휴식을 취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근 열흘에 가까운 휴식일이었다. 방전된 체력을 회복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실제로 헨더슨 씨는 1회 말 선두 타자 안타로 출루에 성공했다.
‘1점 차는 아무래도 좀 불안불안 하니까 여기서 우리가 추가점을 만들어 보자고요.’
특유의 타격폼. 매덕스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스쳐 날았다. 몸쪽 낮은 체인지업.
뻐엉!!
“스트라잌!!”
페레즈가 건넨 공을 받아든 매덕스가 그대로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바깥쪽 낮은 체인지업. 전성기 시절 특유의 투구패턴 그대로다.
부웅
“스트라잌!!”
마운드의 매덕스가 가볍게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순간 대기 타석에서 그를 관찰하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투쟁심. 라이브볼 시대 가장 위대한 커리어를 만들고 이제는 식어가는 그가 마치 스무 살 청년처럼 불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은 오직 기대감뿐. 그렇기에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한때 가장 위대했던 어느 타자를 말이다.
***
좋은 공이었다.
90년대 중반 기량을 폭발시켰던 성질 더러운 에이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성질 나쁜 에이스는 그 더러운 성격 위에 능글능글함까지 탑재한 최악의 투수가 되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가장 강력했던 때는 바로 배짱 두둑하던 그 시절이었고, 지금 보여주는 공은 그 시절의 그렉 매덕스가 보여줬던 공 그대로였다.
매덕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 리키 헨더슨은 신체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절정의 끄트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량을 폭발시켰을 때, 헨더슨은 전성기를 지나 떨어지는 기량을 최소화하기 급급한 왕년에 잘나갔던 대타자였다.
그리고 2001년. 1979년에 데뷔한 타자의 23번째 시즌.
이제는 베테랑이 돼버린 마운드의 애송이는 리키 헨더슨이 아닌 저 뒤쪽 대기 타석의 강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흘간의 휴식으로 몸 상태는 완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마운드의 투수의 경쟁심을 끌어내기에 리키 헨더슨이라는 타자는 부족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익숙한 일이다. 이미 헨더슨 자신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헨더슨 자신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 강진호, 그리고 피아자였다. 헨더슨은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헨더슨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배트와 글러브를 손에 잡은 이래, 그는 언제나 세상의 왕이었다. 그라운드의 주인공.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The Greatest of all time’ 그것이야말로 그를 지칭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부진한 리키 헨더슨은 괜찮다. 언젠가 그 부진을 털고 일어나 다시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닌 리키 헨더슨은 괜찮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깨달았다. 이제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됐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