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비극(4)
리키 헨더슨의 배트가 매덕스의 몸쪽 높은 투심을 건드렸다. 3루를 따라 흐르는 타구. 1루 베이스를 향해 헨더슨이 질주했다. 4.1초. 평균적인 우타자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하지만 전성기 리키 헨더슨이 보여줬던 그 벼락같은 속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웃!!”
심판의 외침. 쓴웃음과 함께 헨더슨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타석에 진호가 올라왔다.
[1회 말, 2점 홈런을 기록했던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예요. 지난 99년 40홈런 51도루로 40-40을, 그리고 올해 아직 21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40홈런 42도루로 커리어 두 번째 40-40을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작년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35홈런 49도루로 30-30을 기록했었거든요. 애초에 30-30만 하더라도 메이저 역사 속에서 Kang을 포함해 23명밖에 기록하지 못한 대기록이에요. 하물며 40-40을 기록한 선수는 Kang을 포함해서 총 네 명. 그중에 두 번이나 되는 40-40을 기록한 선수는 Kang이 유일합니다.]
매덕스가 로진백을 두들긴 오른손에 침을 발랐다. 찐득해진 손끝에 착 감겨드는 가죽의 감촉.
‘체인지 업을 써볼까.’
알고도 치지 못하는 저 빅유닛의 슬라이더처럼 매덕스 자신의 공들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 매덕스 자신의 공들은 그 시절에 거의 근접해있었다. 눈앞의 녀석이 귀신처럼 체인지업을 구분하고 쳐내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빅리그에서 16년째 군림해온 이 투수는 자신의 예감이라는 것이 단순한 감각을 넘어 경험과 이성이 어우러진 무언가에 가깝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몸쪽 체인지업?’
매덕스의 동작이 체인지 업을 신호했다. 유달리 진호에게 체인지업을 아끼던 매덕스의 신호에 페레즈가 잠시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저 괴팍한 에이스는 그런 의문을 표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는다. 실제 주전 포수인 로페즈는 잠시 망설인 덕분에 손가락이 골절당한 적도 있었다. 페레즈의 미트가 재빨리 매덕스가 요구하는 위치로 움직였다.
준비 자세만 보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투구 동작. 매덕스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강맹한 자세. 하지만 손목의 힘이 온전하게 실리지 않은 느린 구속.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체인지업이다. 그러나 타석에 선 진호의 얼굴에 당황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이는 배트.
진호의 배트가 매덕스의 체인지업을 건드렸다.
이미 몇 차례나 매덕스의 체인지업을 공략했던 진호였지만 이번 공은 달랐다. 진호가 경험적으로 예측한 매덕스의 체인지업보다 조금 빠르고, 조금 더 움직이는 공. 타이밍, 그리고 포인트가 어긋났다.
딱!!
밀려난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3루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진호의 얼굴에 안도가, 매덕스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친다. 아마 이대로 페어 지역에 떨어졌더라면 십중팔구 내야 땅볼. 아무리 발이 빠른 진호라고 해도 살아나갈 수 없는 공이 분명했다.
진호가 당혹감을 추스를 틈도 없이 매덕스의 피칭이 이어졌다. 두 번째 바깥쪽 체인지업.
‘빠진다.’
진호의 눈이 매덕스의 공을 완벽하게 캐치했다. 1회 말이었다면 망설였을 공. 하지만 앞선 6이닝간의 관찰로 심판의 존은 완벽하게 파악됐다. 진호의 배트가 움직이지 않았다.
뻐엉
‘젠장, 안 넘어오는군.’
볼카운트 1-1. 매덕스의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존을 거치는 스플리터. 진호의 배트가 스플리터를 걷어냈다.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는 큼지막한 파울 타구. 매덕스의 피칭이 이어졌다.
진호가 쳐내기 쉬운 공은 없었다. 하지만 진호 역시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을 그냥 놓치지 않았다. 무려 8개. 그리고 풀카운트. 매덕스가 오른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괜찮아.’
7회 투아웃. 투구수는 113개. 하지만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악력은 아직 살아있다. 3-2의 볼카운트. 매덕스가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선택했다.
몸쪽 높은 코스 투심 패스트볼. 수많은 타자들에게 땅볼을 이끌어낸 그 최고의 투심이 꿈틀거리며 날아들었다. 그것은 마치 6년 전 매덕스의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절정을 찍었던 전설적인 투수가 감소해가는 기량을 붙들고 또 붙든 끝에 만들어낸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일 구.
진호의 배트가 그것을 강타했다.
따악
잠깐의 정적. 매덕스의 고개가 등 뒤로 돌아갔다. 푸른 하늘, 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외야의 그 어떤 야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매덕스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수많은 흠집들이 가득한 오른손. 강철과도 같은 그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다.
‘시x.’
7회 말 2아웃. 진호가 매덕스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뽑아냈다. 시즌 41호 홈런. 그리고 시즌 세 번째 멀티 홈런이었다.
***
“은퇴할 생각입니다.”
경기가 끝난 직후 터져 나온 가장 위대한 현역 선수의 폭풍 같은 선언. 특정 팀의 팬덤을 등에 업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하나로 꼽히는 리키 헨더슨의 폭탄선언이었다. 뜻밖의 특종에 취재를 나온 기자들의 눈이 반짝인다.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쏟아지는 기사들. 하지만 의외로 반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주일 전 터졌던 9.11의 여파가 워낙 거대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던 언론과 다르게 누구보다 크게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뭐? 은퇴?”
“네.”
그것은 다름아닌 메츠의 프런트였다. 이미 내년의 계획에 헨더슨을 포함시키고 있던 그들이다. 심지어 헨더슨의 매니저인 제프 보리스 역시 그들의 제안에 긍정적인 제스쳐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더욱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젠장. 우리 내년 플랜이 어떻게 됐었지?”
“헨더슨에게 1년 150만을 제시할 생각이었습니다. 노쇠화를 생각해 풀타임을 뛰지는 못한다고 해도 브라이언 콜을 백업으로 써먹으면서 그가 성장할 시간을 주기에는 충분한 자원이라고 평가됐고요.”
“그래서 지금 대안은?”
“비용을 고려한다면 FA 중에서는 대안을 찾기 힘듭니다. 트레이드를 통해 수혈하는 수밖에 없는데 트레이드 자원도 자원이지만 리키 헨더슨 이상으로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도 찾기 힘듭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시장에 나오는 외야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키 헨더슨 만한 가성비를 보여주는 선수는 찾기 힘들었다.
“돈을 조금 더 쓴다면?”
“토니 그윈이나 폴 오닐 같이 쟁쟁한 선수들도 시장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이고 스타일도 스타일이라, 리키 헨더슨 만큼 기대하긴 힘들다고 봐야 합니다.”
“젠장. 대체 갑자기 왜 뜬금없이 지금 상황에서 은퇴를 발표하는 거야. 이거 블러핑 같은 거 아니야?”
메츠의 단장 오마 미야나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은퇴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던 헨더슨이었다.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끝까지 야구를 할 것 같던 야구광. 그런 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은퇴를 결정하다니.
“아뇨, 그런 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워낙에 괴팍인 인물이다 보니, 아무래도 에이전트와 의논도 없이 그냥 갑자기 혼자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후, 정말 골치 아프군.”
머리를 움켜쥐는 미야나를 향해 프리드먼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최선은 그를 설득해보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설득? 그게 가능할까?”
“네, 아무래도 이제 남은 경기가 고작 20경기밖에 되지 않는데 리키 헨더슨이라는 선수는 그런식으로 보낼만한 선수는 아니니까요. 선수들 사이에서 그리 인기가 있는 편도 아니고 커리어에 비하면 저니맨이라는 이미지가 좀 강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수위타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타자입니다. 1년 정도 여유로운 기간을 가지고 은퇴식을 하자고 설득하는 게 어떨가요.”
“그 성격에 쉽게 설득이 될까?”
“해봐야죠.”
“O.K 그러면 헨더슨을 설득하는 작업과 대체 인원을 찾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보자고. 혹시 모르잖아. 외야 자원 중에 우리가 놓친 괜찮은 자원이 있을지도.”
“알겠습니다.”
***
-강진호 시즌 40호, 41호 멀티 홈런!!-
-충격!! 리키 헨더슨 은퇴 선언-
-배리 본즈 시즌 66호, 67호 멀티 홈런!! 맥과이어의 시즌 최다 홈런 갱신까지 이제 남은 것은 이제 단 3홈런뿐-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망자 2996명 확정.-
-구멍 뚫린 항공 보안.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사전 답사 장면.-
-제2의 진주만. 사상 최악의 테러. 용의자는?-
랜스가 신문을 접었다. 온통 좋지 않은 소식들 뿐이다. 그야말로 전미가 슬픔에 잠긴 상황. 게다가 그 충격의 규모 역시 그야말로 지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가장 컸다. 지금 이 일에 비교하자면 자신들이 오랫동안 추적해온 이야기는 너무나도 하찮았다. 게다가 지금 전 국민이 온통 충격과 슬픔에 빠진 상황에서 부정적인 기사를 띄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크, 정말 괜찮은 걸까?”
“휴, 랜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숨길 수는 없잖아.”
“그렇기는 해. 하지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잖아. 조금만, 사람들의 슬픔이 조금만 가신 다음에 하는 것도 나쁠 건 없잖아.”
“안되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들이 언제 증거를 없앨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진호와의 대화를 통해 영감을 얻었던 그들은 콩테의 전처인 오브리와의 협상을 통해 몇 가지 증거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얻어낸 증거는 배리 본즈의 트레이닝코치인 그랙 앤더슨과 콩테의 녹취록. 열화된 복사본이 아닌 진본이긴 했지만, 본즈 본인의 녹취록이 아니었기에 완벽하게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긴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얻어낸 증거 중 가장 강력한 증거임은 확실했다. 이정도 자료라면 정부가 빅터 콩테를 조사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어차피 우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밝혀낼 사실이야. 너도 알잖아. 콩테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약물을 살포했는지. 이번 시드니 올림픽의 우리 대표팀, 그리고 우리 프로스포츠계 상당수는 사실상 약물 중독자들이야.”
마크가 강하게 말했다. 그 역시 빅터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상처받고 지친 미국인들에게 배리 본즈의 화끈한 홈련 쇼는 잠시나마 그들의 시름을 잊게 해줄 진통제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들을 배려하기에 당장 마크와 빅터 자신의 코가 석자였다. 그들은 이번 스캔들을 조사하기 위해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지만 지금까지 딱히 건진 것이 없었다. 덕분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내에서 그들의 입지는 최악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번 이 녹취록은 그들의 사내 평가를 한방에 뒤집을만한 물건이었다. 망설이다가 누군가가 먼저 이 사건을 보도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떨어질 곳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학률이 높았다.
“어쩔 수 없어. 게다가 우리가 이걸 보도한다고 해도 어차피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정부의 제대로 된 조사팀이 꾸려지는 건 이번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다음일 거야. 사람들에게 충격도 그리 크지 않겠지.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커다란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는 명예가 필요해.”
“젠장.”
감춰져 있던 폭탄의 뇌관에 마침내 불씨가 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