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만약에(2)
“잘했어.”
리키 헨더슨이 웃으며 나의 등을 두들긴다. 은퇴를 발표한 이후 그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소였다면 나의 좋은 플레이보다 자신의 아웃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헨더슨 씨.”
나의 부름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기자.”
“네.”
“계속 이기자.”
“네.”
저렇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각오를 굳힌 리키 헨더슨을 바라보며 조용히 맹세했다.
2001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반지를 가지고 온다.
***
‘저 녀석 괜히 비싼 걸 먹였어.’
덕아웃, 내일 등판이 약속된 마이크 햄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터무니없는 활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타석에서의 활약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외야, 장타가 나오기 쉬운 쿠어스 필드의 특성 탓에 심심치 않게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들을 진호는 마치 프리즈비를 하는 대형견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거의 완벽하게 받아냈다. 만약 지금 저 자리에 콜로라도의 주전 중견수인 후안 피에르가 들어갔을 경우 어쩌면 전광판에 적힌 숫자는 10:4가 아니라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점점 떨어지는 성적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햄튼 주변 사람들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단지 집중력과 멘탈의 문제라고, 실투만 억제하면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뚝뚝 떨어지는 성적을 그런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찝찝했다. 햄튼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분명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해결할 수 없는 찝찝함을 껴안은 하룻밤이 지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콜로라도와 메츠의 시리즈 3차전. 마이크 햄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1번 타자 리키 헨더슨이 타석에 섰다. 은퇴 발표 이후 특유의 묘한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 헨더슨이었다. 만 42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던 활기와 강건함이 사라진 자리를 늙어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공허함이 대신 하고 있었다.
마이크 햄튼의 91마일 속구와 78마일 체인지업이 헨더슨을 농락했다.
딱!!
3구째 몸쪽으로 들어온 공에 튀어나간 헨더슨의 배트. 로키스의 2루수 토드 워커가 날아든 타구를 가볍게 처리했다.
“아웃!!”
손쉽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햄튼이 로진백을 매만진다.
‘쉬웠어.’
올 상반기까지의 헨더슨을 생각한다면 허무하기까지 한 땅볼 유도였다. 햄튼이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의 공이 좋아진 것인가?’ 햄튼이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 없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정답은 헨더슨이 은퇴를 결심할 만했기에 은퇴를 발표했다. 정도일 것이다.
햄튼이 송진가루로 하얗게 물든 손가락 끝에 혓바닥을 대 침을 발랐다. 바싹 말라 까끌한 입안이었지만 손가락 끝을 촉촉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침과 송진이 섞여 끈적해진 손가락을 가볍게 옷에 문댄다. 적당한 접착력, 그리고 적당하게 감기는 공의 감촉.
타석에는 최근 일주일, 배리 본즈와 함께 리그에서 가장 강력했던 타자, 강진호가 올라왔다.
***
터덜터덜, 그가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것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시대를 호령했던 전설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감 넘치던 리키 헨더슨이 저렇게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쓴맛이 입안에 감도는 느낌이었다.
마운드에 선 마이크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틀 전 함께 웃고 떠들며 실없는 농담을 늘어놓던 사이라고 믿기 힘든 엄정함.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서는 순간 우리는 적이었다.
[리키 헨더슨 선수의 아쉬운 땅볼. 타석에 2번 타자 Kang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선수 최근 정말 굉장한 페이스죠?]
[네. 지난 1, 2차전에서도 연달아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올 시즌 총 43홈런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의 40-40을 기록한 타자입니다. 게다가 나이 역시 아직 24살밖에 되지 않은 만큼 앞날 역시 엄청나게 밝습니다.]
[사실 메츠가 MVP위너라고는 하지만 이제 막 2년 차를 보낸 선수에게 7+1년 8,300만 달러를 제시했다고 할 때는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메츠의 전 단장인 스티브 필립스가 메츠에게 정말 훌륭한 선물을 남기고 갔어요.]
마이크의 공이 날아들었다. 쿠어스 특유의 가벼운 공기가 만들어내는 둔탁함. 참 재밌는 이야기였다. 투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구속을 제한하는 공기의 마찰이 사실은 투수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 말이다.
줄어든 마찰력은 공의 구속을 올려주지만 그 대신 마찰력이 만들어내던 공기역학적 움직임 역시 줄어든다. 즉, 공의 움직임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속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 어떤 변화구보다 가장 격렬하게 회전하는 패스트볼이라는 ‘변화구’가 가장 크게 먹통이 돼 버린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마이크는 역시 현역 투수 중 가장 높은 금액을 받을 만했다. 물론 그가 가장 큰 금액을 받는다는 것이 그가 가장 좋은 투수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리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재능 있는 투수 중 하나였고 그런 그가 쿠어스에서 보낸 6개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햄튼의 제구는 거의 완벽했다. 존 안쪽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
따악!!
하지만 거기 까지다. 힘차게 돌아간 나의 배트가 마이크의 공을 후려쳤다. 콜로라도의 희박한 공기를 뚫고 날아오르는 타구. 최적의 발사각으로 날아오른 타구가 외야 관중석 한가운데를 두들겼다.
[홈런!! 홈런입니다!!]
[맙소사, 3경기 연속 홈런. 시즌 44번째 홈런입니다.]
내야를 가볍게 돌았다. 마운드의 햄튼이 허리에 손을 집은 채 허탈하게 서 있다. 마치 나의 립서비스에 속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며칠 전 만남에서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은 결코 서비스가 아니었다. 마이크의 기량은 휴스턴과 메츠에서 던지던 시절과 비교해 절대 나빠지지 않았다. 단지 마이크의 피칭은 이곳 쿠어스와 어울리지 않을 뿐이다.
‘뭐, 쿠어스에서 더 잘 던지는 투수가 어딨겠느냐마는.’
과거 마이크에게 1억 2,100만 달러를 제시할 때 콜로라도 로키스의 프런트가 내렸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이곳 쿠어스에서 그나마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투수는 땅볼 유도형 투수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했던 점은 마이크가 땅볼을 유도하는 방식이 주로 속구의 더러운 테일링 무브먼트를 이용하는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일류의 투수 답게 제구 역시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이크는 구위로 윽박지르고 체인지업으로 타이밍을 뺏는 유형이지, 제구로 살살 긁어주고 안될 경우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타입의 투수가 아니었다.
‘글래빈 씨랑 마이크는 다르단 말이지.’
뭐, 그렇다고 해도 마이크는 분명 나쁘지 않은 투수였다. 자신의 피칭 스타일과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이곳 쿠어스에서도 그는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상대하는 나는 고작 평균 이상 수준으로 감당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의 몸 상태는 시즌 초반의 가장 완벽하던 상태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반년간 시즌을 치르며 연마된 타격감은 내 생애 그 어떤 시점보다 더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3회 초, 두 번째 타석. 나의 배트가 또 한 번 불을 뿜는다.
[쳤습니다!! 중견수 후안 피에르!! 뛰어 보지만 늦습니다. 담장을 직격하는 장타!!]
[Kang 1루 돌아 2루로!! 굉장히 빠릅니다. 저 선수 이미 지난 자이언츠전에서 커크 루이터 선수를 상대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했거든요!! 로키스 위험합니다!!]
[피베르 선수 공 잡았습니다!!]
2루를 지나 3루까지. 3루의 주루 코치가 정지 신호를 보내온다. 약간의 아쉬움. 하지만 그의 판단은 옳다. 오늘 콜로라도의 중견을 지키는 피베르는 어깨는 조금 부족했지만, 그것을 커버할 만큼 뛰어난 수비능력을 갖춘 중견수다. 나의 발이 3루에서 멈춰섰다.
[Kang이 3루에서 멈춰섭니다. 오늘 경기 홈런에 이은 3루타.]
[메츠의 Kang이 시즌 막판 정말 어마어마한 몰아치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5회 초, 나의 세 번째 타석. 마침내 마이크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Oh!! 맙소사. 이건 정말이지. 말이 나오지 않는군요.]
[5회 초 2아웃. Kang이 석 점 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메츠의 Kang. 시즌 네 번째 멀티 홈런!! 45호 홈런입니다.]
[지난 9월 18일 시즌이 재개된 이후 다섯 경기 동안 홈런만 무려 여섯 개입니다.]
[5회 초밖에 되지 않았는데 로키스 팬들이 벌써 자리를 뜨고 있어요.]
[아, 결국 마이크 햄튼 선수가 마운드를 내려오네요. 4.2이닝 동안 무려 9실점. 로키스로서는 그야말로 재앙이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
“하하, 아무렴. 그래 마이클 내 잘 좀 부탁하네. 안 그래도 나라가 이렇게 뒤숭숭한데 공권력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드넓은 사무실. 화려하게 치장된 수화기를 내려놓는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젠장, 이 망할 새끼들. 돈을 쳐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지들만 깨끗한 척 하기는.”
그는 다름 아닌 현대 야구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진 사나이, 메이저리그의 현 커미셔너. 버드 셀릭이었다. 94년 파업으로 인해 그야말로 폭망의 길에 접어들었던 메이저리그를 지금의 형태로 부흥시킨 수완가. 이 남자의 터무니없는 역량이 없었더라면 94년 이후 MLB는 NBA에게 완전히 밀렸을지도 몰랐다.
“그렉 앤더슨 이 망할 새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녹취록을 유출시킨 거야. 게다가 빅터 콩테 이 멍청한 놈은 또 무슨 생각인 거고.”
그는 현재 리그에 PED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구단 중 하나인 밀워키 브루어스의 실질적 구단주이자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가 그런 사실을 모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 좀 먹는 게 뭐 어떻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그것을 단속할 의지가 없었다. 당장 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레이스가 리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약을 적극적으로 권하면 권했지 단속을 할 이유 따윈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누가 뭐래도 야구의 꽃은 불꽃 같은 강속구, 그리고 담장을 넘어가는 커다란 홈런이었다. 사람들을 TV 앞으로 집결시키고 야구장으로 향하게 하는 데에는 그것들만 한 것이 없었다.
“솔직히 PED라고 해봐야 잘만 조절하면 그냥 비타민 같은 거잖아. 뭐 부작용이 조금 있다곤 하지만 천년만년 먹는 것도 아니고, 관리 잘 해가면서 먹으면 건강에 특별히 이상도 없고 말이야.”
그의 시선이 구석에 놓인 시카코 크로니클의 기사를 매섭게 훑었다.
“랜스 윌리엄스, 그리고 마크 피아나라 이거지.”
어떻게 하면 이번 사건을 무난하게 수습할 수 있을지, 그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