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만약에(3)
메이저리그, 가장 성공한 에이전트 중 하나인 제프 보리스의 하루는 연봉으로 12만 7천 달러를 받아가는 비서의 스크랩에서부터 시작됐다. 보리스가 애송이변호사 시절부터 함께 했던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영민했었다. 물론 젊었을 적의 화려한 외모는 10년이넘는 세월 동안 축적된 비대한 지방에 묻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 영민함은 한층 더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왜?”
7개의 전국신문, 그리고 그의 주요 고객이 있는 32개 도시의 지역 신문에서 중요한 기사들만을 스크랩한 파일. 그리고 그 중 특별히 더 중요한 기사들에는 알아보기 편한 체크가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체크한 기사들은 조금 이상했다.
별다를 것은 없는 기사였다. 시즌 막판 놀라운 버닝을 보여주는 본즈와 진호의 활약에 관한 기사들. 너무나도 뻔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이상했다. 전국신문의 기사들이 진호와 본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메츠의 원정 경기가 있었던 콜로라도, 그리고 자이언츠의 원정이 있었던 애리조나의 지역신문들까지 일제히 둘에 관한 이야기를 떠드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사무국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사무국 차원? 하지만 사무국에서 대체 왜?”
살에 파묻혀 단춧구멍만 해진 그녀의 두 눈이 빛난다.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고용주가 저렇게 골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질문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
마침내 보리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
-배리 본즈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3차전 멀티 홈런!! 시즌 68, 69호. 마크 맥과이어의 70호 홈런까지 남은 것은 단 하나!!-
-메츠, Kang의 대활약에도 불구, 휴스턴과의 시리즈 아쉬운 루징 시리즈.-
-강진호, 홈런!! 또 홈런!! 이제 50-50까지 남은 것은 3홈런 2도루뿐!!-
-강진호, 아쉬운 도루 실패. 팀은 6:4로 패배.-
-배리 본즈, 8경기를 남기고 마침내 70호 홈런 기록!!-
한번 올라온 나의 타격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휴스턴과 파드리스를 상대로 각기 1홈런씩을 추가하며 홈런만 47개. 2루타 역시 4개를 더 적립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타격이었다. 이제는 슬슬 50홈런의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수준까지 다가왔다. 반면 도루는 조금 지지부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도루하려면 결국 1루로 나가야 했다. 물론 2루나 3루에서 도루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결코 일반적인 상황에 나오는 일이 아니다.
지난 여섯 번의 경기에서 내가 출루에 성공한 것은 총 13번. 5할에 웃도는 터무니 없는 높은 출루율이었다. 하지만 그중 홈런과 2루타를 제외하고 1루를 밟은 것은 7번에 불과했다. 게다가 상대 투수들 역시 내가 50-50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고 도루를 노린다는 것을 충분히 경계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루를 추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아홉 경기인가?’
아홉 경기 동안 3개의 홈런과 2개의 도루. 뭐 인터뷰에서는 최선을 다해 팀의 승리와 경기에 집중할 뿐 기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50-50이다. 무려 야구 역사상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 신경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원정경기 결과가 영 좋지 못했다.
-몬트리올과의 2차전 볼넷을 얻어내는 강진호, 33경기 연속 출루!! 하지만 아쉽게도 18경기 연속 안타 실패해.-
-50-50 적신호? 강진호 2경기 연속 무안타. 이제 남은 경기는 여섯 경기.-
-캐나다로의 긴 원정 거리가 독으로 작용한 강진호. 남은 경기에서 본래 페이스를 찾는지가 관건.-
평소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뉴욕과 한국의 언론만 불타오른 것이 아니었다. 배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만큼은 아니었지만 50-50이라는 기록 역시 거의 불가능의 영역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전국언론, 그리고 몇몇 지역신문들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전 파멜라와의 교제가 시작되던 시점 이상의 열렬한 관심.
그리고 그런 전국 언론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이는 이벤트가 10월 2일 뉴욕에서 벌어졌다.
-강진호, 배리 본즈 정면 충돌!!-
-2001시즌 리그 최고의 선수를 가리는 마지막 맞대결!-
-포스트시즌 진출을 가리는 사실상의 단두대 매치!!-
-승리하는 것은 호타준족의 5툴 플레이어인가!! 치는 족족 담장을 넘기는 괴력의 슬러거인가!!-
-테드 윌리엄스 ‘Kang은 윌리 메이스 이후 가장 놀라운 야구 선수.’-
-윌리 메이스 ‘본즈는 그야말로 놀라운 선수. 우리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절도 어느새 10월. 이제 시즌도 일주일가량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난 9월의 비극으로 취소됐던 메츠와 자이언츠의 시리즈!!]
[최근 가장 뜨거운 화제를 몰고 다니는 두 선수의 맞대결입니다. 98년 마크 맥과이어 선수와 타이인 70호 홈런을 기록하고 이제는 새로운 기록을 노리고 있는 배리 본즈 선수. 그리고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50-50을 노리는 Kang!! 물론 Kang의 경우는 3개의 홈런과 2개의 도루가 남긴 했습니다만, 이 선수 올 시즌 멀티 홈런만 네 번이거든요. 상황에 따라서는 이번 시리즈에 3홈런 2도루도 충분히 추가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대기록들이 걸려있기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경기장을 찾아주셨습니다.]
[아, 저기 테드 윌리엄스가 보입니다. 테드 같은 경우 여러 가지 매체에서 Kang에 대해 칭찬을 했었죠? 어느 토크쇼에서 Kang이 밝히기로는 테드에게 직접 타격에 관해 지도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 그 반대편에는 Say Hey Kid. 윌리 메이스 선수도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자신이 대부까지 서줬던 배리 본즈 선수의 홈런 신기록 갱신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윌리 메이스 선수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겁니다. 세례식에도 참석했던 그 작은 아이가 이제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가 돼 있다니 말이죠.]
관중석에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이 빼곡했다. 나와 본즈의 신기록 갱신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이번 시리즈의 경우 우리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될지도 모르는 시리즈였다. 브레이브스와 우리의 승차는 2승. 나의 신기록 달성만큼이나 경기의 승리 역시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승리가 중요한 것은 자이언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이야말로 진정 승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자이언츠의 현재 순위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2위. 다이아몬드벡스와의 승차는 3승. 이미 우승은 거의 물 건너간 상황이다. 하지만 중부지구 2위를 수성중인 카디널스와 승차는 고작 1승에 불과했다. 와일드카드 진출의 가능성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예측하기로 오늘 경기는 우리에게 유리했다. 오늘 우리 팀의 선발 투수는 올 시즌 아주 제대로 터져버린 로또 선발. 케빈 어피어. 그리고 상대의 선발은 평균자책점 4.21의 4선발 숀 에스테스다. 게다가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3.27의 투수 케빈 어피어를 2.16의 투수로 둔갑시켜주는 우리의 홈구장 셰이 스타디움이었다.
하지만 1회 초.
[쳤습니다!! 맙소사. 배리 본즈. 1회 초, 케빈 어피어를 상대로 선제 석 점 포!! 시즌 71번째 홈런입니다.]
[배리 본즈가 98년 마크 맥과이어의 기록을 3년 만에 갱신합니다. 커리어 통산 564호 홈런.]
배리 본즈의 선제 석 점 포가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어지간해서는 공이 날아가지 않는 외야 추가 좌석을 직격하는 대형홈런포. ‘역시 사람의 힘이 아니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바비 플로이드 벤치 코치. 마운드로 올라갑니다. 이제 고작 1회 초이기는 합니다만 경기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이른 강판도 가능합니다.]
[배리 본즈 선수의 홈런은 둘째 치더라도 앞서 두 타자를 내보내는 장면들도 영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올 시즌 내내 1회가 제일 좋지 않았던 어피어 선수입니다. 어차피 주자가 일소된 상황이고 경기 초반이에요. 조금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벤치 코치의 방문. 아마 교체를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홈런으로 당황했을 케빈을 진정시키는 목적일 것이라고 생각됐다. 약 30초. 내 예상대로 바비 플로이드가 덕아웃으로 돌아가고 어피어의 피칭이 재개됐다. 범타, 삼진. 그리고 볼넷과 내야 땅볼. 추가점 없이 1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이 끝났다.
마운드에 숀 에스테스가 올라왔다. 28살. 올해를 끝으로 FA 자격을 얻게 되는 그는 나쁘지 않은 선발이었다. 그리고 그의 상대로 타석에 오른 이는 리키 헨더슨. 이제는 정말 이가 다 빠진 호랑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그를 바라보는 숀 에스테스의 눈길이 차갑다. 마운드의 에스테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
“진호씨.”
“어? 프리드먼씨. 여긴 어떻게?”
“조금 기다렸습니다.”
“저를요? 대체 무슨 일로.”
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는 나에게 구단의 직원 앤드류 프리드먼이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평소 21세기 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의 애송이 시절 모습이 신기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딱 그것뿐. 그와 내가 이렇게 서로를 기다렸다 말을 걸 만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리키 헨더슨 선수의 일 때문에요.”
“헨더슨 씨요? 혹시 헨더슨 씨의 은퇴를 저에게 설득해달라는 말씀이면 무리입니다. 저도 안 해 본 게 아니에요.”
헨더슨의 의지는 강고했다. 그 결심은 몇 마디 사탕발림으로 뒤집을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실제 기량 역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말이다.
“그가 왜 은퇴를 결심했는지는 혹시 알고 계신가요?”
“글쎄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플레이를 봤을 땐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온 것이 아닐까요?”
“아뇨, 헨더슨 선수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역시, 단순히 의욕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헨더슨 씨의 성격상 그것만으로도 성적이 망가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의욕이 없어진 거라고 봐야겠네요.”
“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진호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설득을 안 해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말을 들은 프리드먼이 답했다.
“저희는 내년에 헨더슨 씨가 꼭 필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장 유망주들이 크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애초에 그런 일은 운영팀에서 해야 하는 일이죠.”
“맞습니다. 하지만 진호 씨도 아시다시피 이대로라면 어차피 메츠는 진호 씨 중심의 팀이 될 겁니다. 아니, 이미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죠. 팀의 중심이자 리더로서 조금만 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프리드먼의 간절한 부탁. 하지만 이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난 이미 헨더슨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봤고 그의 태도가 완강한 것을 확인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나에게 프리드먼이 강하게 말했다.
“방법은 있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먼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