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만약에(4)
“칭찬을 해주세요.”
“칭찬?”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칭찬이라니. 아니 애초에 리키 헨더슨이 그런 게 필요한 사람이었던가? 그는 누군가가 굳이 칭찬하지 않더라도 그가 활동한 시대 가장 위대한 선수이며, 야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드오프로 기록될 남자였다. 그의 사교적이지 못하고 잘난 척 가득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모두 그가 쌓아 올린 그 찬란한 커리어에 대한 존중 때문인 것이다.
“의기소침한 어린애에게 가장 좋은 건 칭찬입니다. 헨더슨 선수의 지금 상태는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던 게임에 더 잘하는 누군가가 나타난 상태에요. 보통 그의 나이까지 야구를 계속 하는 사람들은 야구 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 마련인데, 리키 헨더슨 선수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 그 원동력이라고 분석됩니다.”
“무슨, 그 말도 안 되는.”
혈액형 성격 테스트처럼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름에 대한 권위랄까?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은 프런트 직원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저 앤드루 프리드먼은 프기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가장 위대한 단장 중 하나였다.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헨더슨씨는 자신을 칭찬하는 말 정도는 주변에서 무수하게 들을 겁니다. 그런데 고작 칭찬이라뇨.”
“정확히는 우리의 내년 플랜에 리키 헨더슨이라는 선수가 얼마나 필요한 선수이며 그 업적에 걸맞은 은퇴식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건 헨더슨 씨와 단순히 친하게 지내는 내가 아니라, 현재 클럽하우스 리더인 피아자 씨가 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나의 질문에 프리드먼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이건 진호 씨기에 의미 있는 겁니다.”
***
리키 헨더슨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상대방의 말은 진실 됐고 그 속에는 헨더슨 자신을 향한 호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패배를 인정한 다음 세대의 기수가 자신을 동정한다는 굴욕감이었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경외의 시선을 보내며 이제 자신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리키 헨더슨이라는 이름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것은 경외와 존중이다. 결코 동정이 아니다.
‘젠장.’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99년. 아니 하다 못 해 작년에라도 은퇴를 택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런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르릉
클래식한 사운드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다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하지만 전화는 끈질겼다. 두 번, 세 번, 네 번. 자동응답기로 넘어갈 때마다 끊어지는 전화는 마치 지금 집안에 헨더슨이 있음을 확신이라도 하듯 거듭 걸려왔다. 결국 참다 못한 헨더슨이 수화기를 거칠게 뽑아 들었다.
“누구야!!”
“나야.”
“제프?”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의 오랜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였다. 몇 차례나 그를 극진히 설득했던 좋은 에이전트. 그리고 이제는 저니맨이나 다름없는 리키 헨더슨 자신을 여전히 리그 최고의 선수이던 때처럼 소중하게 여겨주는 좋은 친구였다.
“무슨 일이야. 은퇴는 번복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잖아. 끝이야. 완전 끝!!”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친구라도 지금 짜증이 나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평소와 달리 부루퉁한 목소리가 리키 헨더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2년 300만이라더라.”
“2년?”
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2년이라니. 이미 은퇴를 선언하고 최근 몇 경기 동안 보여주는 폼을 고려할 때 실로 터무니없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프 보리스가 굳이 가지고 온 제안이다. 당연히 메이저 계약일 것이다. 그리고 헨더슨 자신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자진해서 마이너로 내려가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다. 즉 그들은 메이저 25인 로스터의 한 자리를 2년 간 헨더슨 자신으로 채울 각오를 했다는 의미였다.
‘대체 어떤 멍청이들이.’
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멍청한 제안을 한 것인지 궁금증은 생겨났다.
‘오클랜드일까?’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오클랜드. 세이버 매트릭스니 뭐니 하면서 출루율을 중요시 여기는 그들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헨더슨이 되물었다.
“어딘데.”
“메츠.”
“메츠? 메츠에서 2년을 제시했다고?”
뜻밖의 이야기였다. 최근 새로 부임한 오마 미야나는 30대 중반을 넘긴 이름값만 높은 선수와의 계약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 조금 전에 전화로 이야기가 됐어. 일단 대략적인 이야기만 오갔는데, 아무래도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 뭐, 소소하게 액수만 달라진 거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거란 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2년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잖아.”
“2년이라······.”
사실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헨더슨이 은퇴를 결심한 것은 자신의 기량 때문이다. 더 이상 주연이 될 수 없다는 괴로움. 지금 몇 경기를 더 뛰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괴로운데 그것을 2년이나 더 해야 한다고? 헨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헨더슨의 답보다 보리스의 말이 빨랐다.
“아, 참. 그리고 그 2년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던 메츠의 단장 보좌라는 친구가 자네와 직접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다고 하던데.”
“나와 이야기를?”
“응, 어때. 거절할까?”
“아냐. 뭐 이야기하는 것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지.”
짜증 그리고 의문. 두 가지 감정이 헨더슨의 잠잠하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띵동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말쑥한 차림의 청년이었다. 이 바닥에서 일하는 스텝들 대부분이 그렇듯 소싯적에 운동 좀 한 것 같은 건장한 체격. 프리드먼이 웃으며 손을 내민다.
“리키 헨더슨 씨. 영광입니다. 앤드루 프리드먼이라고 합니다.”
“할 말이 있다면서.”
불퉁한 헨더슨의 반응에도 프리드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헨더슨의 본래 성격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리드먼은 지금 헨더슨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더는 뛸 수 없는 선수의 심정.’
이미 수년 전 프리드먼이 직접 경험했던 일이다. 물론 충분히 메이저에서 뛸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은퇴를 택한다는 것 자체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가 야구를 그만 뒀던 것은 어깨와 팔목 부상이라는 물리적 이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이건, 혹은 성공을 하고 싶어서이건, 혹은 그저 어린 시절부터 해온 관성에 의해서이건 이유는 상관없다. 모든 야구 선수의 삶은 야구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야구 선수가 야구를 그만둔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프리드먼은 헨더슨이 가장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헨더슨 씨 당신은 아직 더 뛸 수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나는 그냥 더 뛰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아뇨. 제가 말씀드리는 더 뛸 수 있다는 것은 그저 그대로 죽어가는 2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리키 헨더슨의 2년입니다.”
자신만만한 프리드먼의 미소가 리키 헨더슨의 마음을 꿰뚫었다.
***
뻥!!
리키 헨더슨의 배트가 멈춰섰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볼넷. 오래간만의 출루였다.
[볼카운트 3-2. 몸쪽 낮은 공을 참아내며 리키 헨더슨이 출루에 성공합니다.]
[이주 전 은퇴를 발표했던 리키 헨더슨 선수입니다만, 올 시즌 성적을 보면 아직 은퇴는 조금 이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최근 며칠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만 그래도 시즌 성적으로 보면 어지간한 팀의 4번째 옵션 정도는 충분한 성적이거든요.]
[사실 오늘 플레이를 보면 그 컨디션 역시 상당히 올라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번 타석에서 보여준 것 같은 모습이 현실적으로 지금의 리키 헨더슨 선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이거든요.]
[맞습니다. 무려 8개의 공을 끌어내며 결국 볼넷으로 출루했어요. 눈으로 야구하는 선수는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퇴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오늘 플레이만 본다면 수위타자, 그리고 대주자로는 어느 팀을 가건 유용한 옵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메츠로서도 1년 정도는 더 뛰어줬으면 하는 심정일 거예요.]
1루로 나서는 헨더슨과 눈이 마주쳤다. 최근 은퇴를 발표한 이후 서먹서먹하던 헨더슨이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의 조언대로 어제 이야기를 한 덕분일까? 나를 바라보는 헨더슨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처럼 은퇴 자체를 번복할 지도 몰랐다.
‘좋은 일이야.’
단순히 내년 팀의 플랜 때문만은 아니었다. 헨더슨 정도의 선수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축복 속에서 은퇴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시즌 초 그가 이야기했듯이 양손은 무리더라도 한 손 정도에는 반지를 가득 끼워 보내고 싶었다.
[1회 말 3:0 상황 노아웃 주자 1루. 타석에 메츠의 Kang이 들어옵니다.]
[시즌 재개 이후 11경기에서 총 8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린 Kang. 오늘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인 숀 에스테스와의 상대전적은 9타석 8타수 3안타 0.375/0.444/0.500으로 매우 훌륭합니다.]
대단한 인상의 투수는 아니었다. 특출날 것이 없는 포심과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 대단할 것은 없는 제구력과 구속. 하지만 동시에 특별히 나쁜 부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 배트를 휘둘러 볼만도 했다. 하지만 참았다.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는다. 예상대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나의 앞 타석에 리키 헨더슨이 나오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였다.
‘헨더슨 씨 땡큐.’
헨더슨이 보여준 상대 투수의 구위, 그리고 심판의 존. 나 스스로가 분석해야 했던 정보가 미리 제공된다는 것의 의미는 컸다. 그것은 첫 타석에서 최대한 나쁜 공을 골라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뻐엉
여전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볼카운트 2-0. 슬슬 투수의 똥줄이 타들어 갈 카운트다. 1루를 힐끔 바라본 투수가 다시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세 번째 공, 그 순간 리키 헨더슨의 몸이 2루로 달릴 것처럼 움찔했다. 실제 도루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투수의 시선이 1루에 머무는 마지막 순간 그를 뒤흔드는 실로 말이 되지 않는 테크닉.
‘몰렸어.’
투수의 공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특출날 것이 없는 포심 패스트볼. 심지어 손에서 미끌어진 탓인지 평소보다 밋밋하고 코스도 좋지 못한 실투다. 이런 걸 놓쳐서야 대기록을 노릴 자격은 없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따악!!
[쳤습니다!! 잡아당긴 타구!! 우측으로 큽니다!!]
[아, 이건 한눈에 봐도 달릴 필요가 없어 보이네요. 넘어갔습니다!! Kang의 시즌 48호 홈런. 1회 말 3:0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메츠가 두 점을 쫓아갑니다. 점수는 이제 3:2. 1점 차이 입니다.]
[Kang 대단합니다. 실투를 놓치지를 않네요.]
실크햇 사이로 튀어나온 붉은 사과. 중앙 담장 너머 하늘을 향해 폭죽이 터져 나왔다. 우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큼지막한 홈런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