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38화 (138/210)

# 138화.

만약에(6)

“진호, 나 이 장면 본 적 있는 거 같아. 설마 이게 데자뷰라는 건가?”

“이봐 프레스톤, 현실 도피하지 말라고.”

2차전, 1회 초. 이번에도 배리 본즈의 홈런이 담벼락을 넘어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2점 홈런이었다는 점 정도일까? 우중간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공이었던 탓에 프레스톤도 나도 최선을 다해 타구를 향해 달려봤지만 미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난 본즈가 방금 그 공을 쳐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배리 본즈 선수가 2차전 1회 초부터 홈런 포를 가동합니다. 시즌 72호 홈런!! 대단합니다.]

[이 선수는 이제 홈런을 하나 칠 때마다 리그에 없었던 신기록이거든요. 하, 정말 맥과이어 선수의 70호 홈런을 볼때만 하더라도 100년 이내에 이런 기록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젠장, 저 아저씨는 대체 뭘 먹고 저렇게 공을 날려대는 거야. 방금 리드가 완벽하게 속여넘긴 타이밍 아니었어?”

“맞아. 중간에 배트 한번 멈추는 것 같더라.”

“저게 진짜 사람이냐.”

프레스톤이 혀를 내둘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배리 본즈가 보여준 타격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시간차 홈런.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스텝을 밟은 상황에서 커브를 확인하고 배트를 멈춰 세우고, 다시 공을 체크하고 존 안에 들어온다고 확신한 다음 그 자세에서 그대로 몸의 회전력만으로 배트를 휘둘러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내다니. 터무니없는 선구안과 괴력, 그리고 배트 스피드였다.

“진호, 넌 저런 거 할 수 있냐?”

“있겠냐? 애초에 저런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게다가 힘은 프레스톤 네가 나보다 좋잖아. 넌 어떻게 안 되겠냐?”

“저게 어디 힘만으로 될 일이냐. 무너진 자세에서 배트 휘둘러서 내야 넘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담장 넘기는 건 어림도 없지 싶다. 하, 역시 저 정도 하니까 한 시즌에 홈런을 70개 넘게 치는 건가.”

“애초에 저런 자세로 내야를 넘긴다는 것도 충분히 괴물 같긴 하다만 아예 담장을 넘기는 걸 보고 나니 그건 그냥 평범하게 들리네.”

마운드의 릭 리드가 양손을 허리에 대고 바닥을 향해 거칠게 침을 뱉는다. 배리 본즈 만한 선구안을 갖춘 타자를 완벽하게 속여넘긴 커브였다. 마치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한 순간 상대방이 손 모양을 바꿔 승리를 훔쳐간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가위바위보와 다른 점은 지금 이것은 반칙이 아니라는 점 정도였다. 멘탈이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릭 리드는 어린 투수가 아니었다.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에게도 역시 처음이겠지만 근 15년에 달하는 메이저 경험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상식으로 잴 수 없는 괴물들이 존재한다.’

긴 시간 메이저에서 생존한 투수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마운드의 릭 리드가 몇차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자신의 피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큰 경기에는 같은 값이면 베테랑 투수를 올리는지를 알 수 있는 침착함. 릭 리드가 내야 팝플라이로 세 번째 아웃을 잡아냈다.

수비를 끝내고 돌아온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수들에게 애틀랜타의 경기 진행을 물었다. 오늘 우리가 승리하고 애틀랜타가 패배한다면 그대로 우리의 포스트 시즌 진출이 확정되는 상황이다.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틀랜타는 지금 어떻대요?”

“4회 끝나고 1:0이라는데? 매덕스 씨가 어마어마한가 봐. 지금까지 퍼펙트라더라.”

“하긴, 매덕스 씨도 지금 꼬리에 불붙은 상황이잖아. 브레이브스가 올해 포스트시즌 못 가게 되면 몇 년 만에 못 나가는 거지?”

“91년부터 꾸준히 나갔었으니 11년 만이 되겠네.”

“하, 진짜 징그러울 만큼 꾸준히 대단했네.”

그들의 대화를 듣던 리키 헨더슨이 자신의 헬멧을 챙겨 쓰며 몇 마디를 툭 던졌다.

“대단하긴 개뿔. 그래 봐야 반지는 한 번밖에 못 챙긴 놈들이야. 그놈들 90년대는 우리 90년대랑 다를 것도 없다고. 그리고 올해가 지나면 우리가 더 위대해질 거야.”

그의 말이 옳았다. 1930~50년대 가장 많은 반지를 손에 낀 팀이 양키스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많았지만, 그 누구도 그 시기 가장 많은 준우승을 차지한 팀이 다저스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다.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 마크 가드너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올 시즌 자이언츠와 1년 2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한 마크 가드너 선수입니다. 지난 89년 27살의 늦은 나이로 메이저에 데뷔한 이후 13년. 지금까지 총 99승을 거뒀습니다.]

[엑스포스와 로얄스 그리고 말린스를 거쳐 자이언츠에 자리 잡은 마크 가드너 선수. 커리어 초반을 쭉 약팀에서 보낸 탓에 성적에 비해 승운은 그리 좋지 못했어요.]

[올해 나이 39살. 올 시즌을 끝으로 당장 은퇴할지도 모르는 투수입니다. 100번째 승리가 간절할 거에요.]

[아무래도 99승과 100승은 고작 1승 차이이지만 느낌이 확 다르죠.]

6피트 1인치(185cm)에 190파운드(86kg). 투수 치고는 그리 큰 체구는 아니었다. 실제 마운드에 선 마크 가드너는 호리호리해 보였다. 39살. 아마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것이 확실한 노장 투수.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마치 유리알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역동적이고 힘찬 피칭. 하지만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공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배트 스피드가 상당히 떨어진 리키 헨더슨이 좋아하는 유형의 투수. 그가 던진 다섯 번째 공에 헨더슨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나쁘지 않은 각도, 나쁘지 않은 스윙과 타이밍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딱!!

아주 약간의 비틀림. 힘없는 타구가 이루수 정면으로 향했다.

내야 땅볼 아웃.

완벽한 히팅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기 힘든 현재 헨더슨의 가장 큰 약점인 부족한 파워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마크 가드너의 노련한 피칭!! 리키 헨더슨 선수에게 내야 땅볼을 끌어냅니다.]

[타석에는 2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어제 경기 1홈런을 포함해 멀티 출루를 기록한 Kang. 현재 50-50이라는 기록까지 2홈런 2도루만이 남은 상황입니다.]

[사실 지금만으로도 Kang은 메이저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고 있는 셈입니다. 애초에 Kang을 제외하고 커리어 중에 두 번의 40-40을 달성한 선수는 전무 합니다. 게다가 Kang을 제외하고 가장 50-50에 가까이 갔던 기록도 96년 배리 본즈 선수의 42홈런 46도루예요. 올 시즌 배리 본즈 선수의 시즌 최다 홈런에 조금 묻히는 감이 있지만, 50-50 역시 기록의 난이도만 따진다면 배리 본즈 선수의 홈런 신기록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기록입니다.]

저 멀리 관중석 48-48이라는 숫자가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홈구장. 나를 응원하는 팬들이다. 타석에 서서 숨을 골랐다.

마운드의 마크 가드너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빠르지 않은 공. 앞선 리키 헨더슨의 타석으로 미뤄봤을 때 최고 구속은 87마일 가량.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가 확실할 투수였다. 그러나 방심하지는 않았다. 13년이나 메이저에서 살아남아 만으로 39세의 나이에 선발 투수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럴만한 뭔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크 가드너의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들어왔다. 존에 살짝 걸치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들어오는 공이다. 하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휘두르기는 또 애매한 공이다. 그야말로 계륵.

‘지켜 볼까?’

하지만 상대는 부족한 구위로 13년이나 버텨온 노련한 투수다. 지켜본다고 해서 이것보다 좋은 공이 들어올 거라 확신하기는 힘들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망할.’

커터였다. 데이터에 있긴 했다. 하지만 재작년 이후 공식전에서 던진 기록이 없던 공이다. 하필 이 순간 이런 공을 던지다니. 가드너가 던진 공이 스윗 스팟을 완전하게 벗어났다.

힘없이 내야를 구르는 공. 나의 몸이 1루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나의 몸이 빠르다고 해도 이런 공으로 1루를 밟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빗맞은 타구. 삼루수 라몬 마르티네즈 쪽으로 흐릅니다.]

[마르티네즈 가볍게 잡아서······. 맙소사!! 놓쳤습니다!! 글러브 맞고 굴절된 공!! 마르티네즈 선수의 뒤로 빠집니다.]

[그 사이 Kang은 1루까지!!]

[Kang!! 행운의 내야 안타. 하, 정말 잘 되는 선수는 뭘 해도 잘되네요. 이걸 이렇게 살아나갑니다.]

“세이프!!”

매우 여유로운 타이밍.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꼼짝없는 아웃에 이렇게 살아나가다니. 마운드의 가드너 역시 허망한 표정으로 1루와 3루를 바라본다. 하지만 본즈의 터무니 없는 홈런에도 금방 정신을 차렸던 릭 리드처럼 그 역시 몇 차례 고개를 흔드는 것만으로 충격을 극복한다.

[원 아웃 주자 1루.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보호 장구를 벗어 넘기고, 우스꽝스러운 벙어리장갑을 손에 낀다. 세 걸음 반. 신중한 자세로 마운드를 노려봤다. 남은 것은 두 개의 도루. 5경기 2승 차.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선 중요한 경기들이지만 이미 덕아웃에서는 나에게 그린 라이트를 허가해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즌 타이틀 수준이 아닌 메이저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메츠 소속의 프랜차이즈가 달성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다. 프런트 역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가 기록을 달성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힐끔

그리고 내가 도루를 노린다는 것은 마운드의 가드너 역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몇 번이나 나에게 향했다. 나의 몸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그의 몸. 한순간 몸을 낮춘 나를 향해 견제구가 날아왔다.

뻐엉

“세이프!!”

‘어지간히 많이 신경쓰네.’

당연한 일이다. 커리어 100번째 승리라는 명예인가, 아니면 50-50을 허용한 투수라는 불명예인가를 두고 싸우는 상황이다. 나에게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마크 가드너가 또다시 정지 동작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나를 크게 신경 쓰는 가드너. 그의 초구가 홈플레이트를 향했다.

딱!!

하지만 나와 배리 본즈의 경쟁에 묻힌 감이 있었지만 커리어, 그리고 현재의 폼 모든 면에서 나에게 뒤지지 않는 피아자다. 포수 올 타임 No. 1의 공격력. 마이크 피아자의 배트가 불을 뿜었다. 좌측 파울 폴대를 살짝 벗어나는 큼지막한 타구. 관중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아쉬움을 표한다.

[아쉬운 타구!! 우측으로 1미터만 들어왔어도 홈런이었을 텐데. 피아자 선수도 아쉬운 표정입니다.]

타석 밖에서 몸을 가다듬은 피아자가 또다시 타석에 섰다. 여전히 마크 가드너는 나를 경계한다. 하지만 직전 거대한 파울 홈런 덕분일까? 그 경계의 정도가 훨씬 약해졌다. 마운드의 마크 가드너가 정지 동작에 들어갔다. 몸을 낮추고 세 걸음 반. 리드폭에 변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거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을 던지는 가드너의 타이밍. 그리고 호흡.

‘지금!!’

[주자 달립니다!!!]

정지 동작에서 시작되는 빠른 출발.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벼락처럼 움직였다. 타이밍은 가드너가 홈플레이트를 향해 공을 던지기 직전!! 홈플레이트 너머 베니토 산티아고가 서둘러 일어날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평균 85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에게 타이밍을 뺏겼다는 것은 포수가 어떤 용을 쓴다고 해도 나를 잡아낼 수 없다는 의미다.

뻐엉!!

“세이프!!”

[2루에서 세이프!! Kang!! 시즌 49번째 도루성공!! 이제 50도루까지 남은 것은 단 하나!! 하나뿐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 투수도 포수도 Kang의 도루 가능성을 굉장히 크게 보고 경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해내네요.]

완벽한 타이밍의 도루. 슬라이딩조차 필요치 않았다. 가볍게 손목과 발목을 풀어주며 마운드를 응시했다. 가드너의 동요는 크지 않았다. 피아자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만큼 도루 정도는 각오했다는 눈빛이다. 세 번째 정지 자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들숨, 날숨, 들숨, 그리고 잠깐의 정지. 지금이다.

나의 몸이 3루를 향해 질주했다.

뻐엉!!

“세이프!!!”

[아!! 2루를 훔쳤던 Kang이 3루까지 훔쳐냅니다. 시즌 50번째 도루!!]

[자신의 50번째 도루를 3루 스틸로 완성하는 Kang!! 대단합니다.]

[하지만 이건 좀 진짜 기록을 만들기 위한 영양가 없는 도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사실 Kang의 발을 생각한다면 2루나 3루나 아주 큰 차이는 없다고 보이거든요. 애초에 외야로 공이 나가기만 해도 Kang이라면 충분히 홈까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루와 3루는 조금 다르죠. 3루에 위치한다면 외야플라이로도 점수를 짜낼 수 있으니 그만큼 유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3루 도루의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게 과연 이득인가는 조금 회의적이군요.]

마운드. 여전히 가드너의 표정은 침착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거칠어진 호흡. 딱딱하게 굳은 신체. 행운의 안타와 두 번의 도루가 만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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