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만약에(7)
침착함을 가장한 가드너의 피칭이 이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몸. 위력 없는 속구가 홈플레이트를 향한다.
딱!!
피아자의 배트가 시원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좋지 못했다. 분명 가드너가 던진 공은 실투에 가까웠지만 투수가 던지는 모든 실투를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높게 뜬 타구가 중견수 정면으로 향했다.
차분하게 3루 코치의 신호를 기다렸다. 3, 2, 1.
“Go!!!”
피아자의 타구가 중견수 캘빈 머레이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순간 나의 몸이 홈을 향해 튀어나갔다. 넉넉한 외야 플라이였다. 상대 야수들 역시 1점 정도는 각오한 상황. 나의 발이 무사히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진호, 이 자식!! 잘했어.”
“결국 도루를 50개 채워버리네. 그것도 3루 스틸로.”
“뭐, 아직 조금 부족하긴 한데,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어.”
팀원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브레이브스는?”
“여전히 1:0, 매덕스 아저씨가 오늘 아주 제대로 날 잡았다니까.”
“우리도 꼭 이겨야겠네.”
“당연하지.”
***
“지금은 그런 거 터트릴 때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9.11의 용의자는 특정됐고 이제 저희의 역할은 거의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국장의 얼굴에 고민이 어린다.
“위에서 막는 겁니까?”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며 충분하다. 프레드릭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어느 계통입니까. 선배들? 아니면 워싱턴?”
“후년 초로 하자고. 후년 초로.”
2년 뒤라면 워싱턴이다. 그렇다면 하원? 아니다. 프레드릭이 속한 기관은 2년 마다 전체적으로 물갈이가 되는 하원 놈들에게 휘둘릴만큼 호락호락한 기관이 아니다. 상원, 그것도 제법 힘있는 놈이 틀림없다. 빌어먹을 스포츠 로비스트 놈들. 스포츠 단체면 스포츠 단체답게 선수 지원하고 리그나 신경 쓸 것이지 정치권에 돈을 뿌리기는 왜 뿌린단 말인가.
“국장님!!”
“아, 나 귀 멀쩡하다. 어차피 조사 하려면 그 정도는 걸리잖아. 천천히 하자고 천천히.”
“그 정도 걸릴 게 뭐가 있습니까. BALCO에 빅터 콘테만 털면 끝나는데.”
“그 녀석 말만 믿고 걸어대기에는 빅네임들이 너무 많잖아. 증거도 없이 막 들어 댔다가 걔들이 아니라고 하면 끝인 거고. 엮을 생각이면 확실히 엮으라고. 그리고 후년 초라고 해봐야 이제 1년 반 밖에 안 남았다.”
“그럼 조사에 관한 건 전적으로 밀어주시는 겁니까?”
“인력 지원은 못 해줘. CIA 애들이 알카에다라는 건 특정했다지만 우리도 그쪽으로 빠질 인력이 하나, 둘이 아니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언론이고 워싱턴이고 죄다 그쪽 편이다. 무리하게 들이대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프레드릭은 결국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것은 묵인뿐이라는 말에 욕설이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초인적 인내력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알겠습니다.”
후년 초? 웃기지도 않는 소리. 프레드릭의 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보통 개인의 좋은 기록과 팀의 승리는 같은 방향에 서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 그것이 약간 틀어질 때가 존재한다.
5회 말. 5:3. 노 아웃 주자 없음. 볼카운트는 2-0.
‘투수가 흔들리고 있어.’
5회까지 이미 100개가 넘는 공을 던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앞선 타석에서 나와의 기억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의 마크 가드너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존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포심과 바닥을 찍는 어림없는 커브. 가장 좋은 선택은 철저하게 공을 골라내 출루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라고 해도 야수의 글러브를 피할 확률은 7할에 불과하다. 하물며 이렇게 좋지 않은 공들을 무리하게 건드려봤자 좋은 타구가 나올 확률은 낮았다. 지금처럼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확정적으로 1루 베이스를 밟는 것이 무조건 더 이득이다.
‘하지만.’
이제 50-50까지 남은 것은 오직 2개의 홈런뿐. 이제 만 25살이 되는 젊은 나이라고 하지만 남은 인생에서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올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야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 욕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다못해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이기만 했어도 망설임은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 체인지업.
‘빠지는 공이야.’
완벽하게 빠지는 코스.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3구 연속 볼!! 아, 마크 가드너. 5회 들어 갑작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앞선 이닝에서 공을 너무 많이 던졌어요. 지금 투구 수가 107개째였던가요? 이건 덕아웃에서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자이언츠의 불펜 쪽 움직임이 조금 부산합니다. 가드너 선수가 조금 더 시간을 끌어주고 투수 교체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볼카운트 3-0.
마크 가드너가 네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마음속 갈등은 여전했다. 욕심은 있다. 몸 상태 역시 그 욕심을 들어줄 만큼 훌륭하다. 하지만 교육받은 나의 이성이 속삭인다. 중요한 것은 팀의 승리고 그것을 위해선 조금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네 번째 공을 바라봤다.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공이다.
‘쳐볼 만 할 것 같은데?’
아예 어림없는 공이였다면 갈등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다.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공.
48-50
외야 저 먼 곳. 어느새 고쳐 달았는지 50으로 바뀐 거대한 숫자판이 보인다.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째 삶. 다른 많은 것들에는 크게 욕심내지 않고 살고 있는 인생이다. 내가 욕심내는 것은 오직 야구뿐. 나의 욕심이 담긴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좋은 타이밍, 아름다운 스윙이었다. 좋지 않았던 것은 공이 들어오는 코스뿐. 강하게 날아간 공이 파울 폴대를 살짝 넘어갔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아쉬움 가득한 탄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옷깃을 가다듬고 장갑을 조여 맸다. 마운드에 선 가드너의 눈이 번들거린다.
볼카운트 3-1. 가드너가 다섯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치겠다는 의욕으로 가득한 타자다. 좋은 공을 넣을 리 만무했다. 십중팔구 유인구. 마크 가드너가 가장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공인 커브를 기다렸다. 제법 큰 낙차와 나쁘지 않은 횡무브먼트까지 갖춘 커브다.
‘온다!!’
하지만 지금 그가 던진 커브는 나빴다. 존을 벗어난 공을 거듭 던진 것은 정말 지친 탓이었던 것 같다. 투수에게 가장 치명적인 악력의 저하. 앞선 이닝들에서 보여주던 커브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존을 꽤 벗어나는 공이라고해도 그렇게 느리고 밋밋한 공을 쳐내지 못해서야 메이저 최정상급의 타자라는 타이틀이 아깝다. 1회, 배리 보즈가 보여줬던 터무니없는 배트 스피드는 아니었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속도로 배트가 돌아갔다.
딱!!
거의 배팅볼을 치는 느낌이었다. 쭉 뻗어 나간 타구가 우측 담장을 훌쩍 넘어간다. 화려한 축포와 붉은 사과, 사람들의 환호성이 그라운드를 진동시킨다.
[5회 말 5:3 상황에서 1점을 추격하는 솔로 홈런포!! Kang이 시즌 49번째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1차전에 이은 시리즈 두 번째 홈런!! 시즌 막바지, Kang의 기세가 너무 매섭습니다!!]
[허, 시리즈가 시작할 때 제가 이번 시리즈에서 3개의 홈런과 2개의 도루를 추가해서 50-50을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그 가능성을 크게 보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벌써 49-50입니다. 이거 정말 이번 시리즈 내에 50-50을 기록할 기세예요.]
***
형석의 손가락이 날아갈 듯 움직인다.
<이번 시즌 내가 볼 때 MVP 강진호선수 입니다. 72홈런이 대단한 기록이기는 한데, 50-50도 만만치않게 상징적인 기록이잖아요. 게다가 메츠는 포시 진출, 자이언츠는 탈락이니까 이건 100%죠.>
<아직 확정도 안된 걸로 설레발은 좀 그만하죠.>
<에이, 솔직히 9월 초만하더라도 설레발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오면 설레발이라고 보기는 힘들죠. 요즘 페이스 보면 우리 강진호 선수 남은 4경기 1홈런은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배리 본즈 약물 이야기는 이제 쏙 들어간 것 같네요?>
<뭐 샌프란시스코 지역신문에 기사 한 번 뜨고 이후로 아무것도 안 나오니까요. 그냥 찌라시 같은 거겠죠. 솔직히 배리 본즈만한 선수가 뭐가 아쉬워서 약을 하겠어요.>
TV에서는 진호의 경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5:4 상황. 진호의 홈런 이후 교체 투입된 자이언츠의 불펜이 메츠의 공격을 잘 틀았다. 그리고 또다시 자이언츠의 공격. 타석에 배리 본즈가 들어온다.
<배리 본즈네요. 진짜 포스가 엄청나네요.>
<1회 홈런 치는 거 보고 진짜 오줌 지릴 뻔했어요. 와, 어떻게 그런 자세에서 홈런을 치는 건지.>
<그거 내가 볼 때는 백퍼 약빨이에요. 사람이 약 없이 저런 게 어떻게 되겠어요.>
<에이, 메이저리그인데 도핑 테스트도 안 하겠어요?>
<투수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네요. 이거 느낌이 영 안 좋은데.>
딱!!
<아!!! 느낌이 영 안 좋더라니.>
<와, 쟤는 뭐 방망이만 휘두르면 홈런이네요. 투수 멘탈 폭발한 듯.>
<영혼이 나갔네요. 솔직히 저런 식으로 어이없게 홈런 맞으면 그럴 수밖에 없죠. 투수 바꿔줘야 할 것 같은데,>
<지금 터크 올라오네요. 발렌타인이 오늘 이 경기 꼭 잡을 생각인 듯.>
<좀 일찌감치 포시 진출 확정 지어야 진호도 편하게 방망이 휘두를 텐데 말이죠.>
<근데 진짜 50-50하면 MVP 타겠죠?>
<홈런 신기록이 좀 압박이기는 한데, 포시진출 때문에 MVP 탈 거예요. 거기다가 내가 보기엔 배리 본즈 약물 이야기도 좀 영향 있지 않겠어요? 투표하는 기자들도 사람인데.>
<그렇겠죠?>
***
“매덕스 석 점 홈런 맞았다더라.”
“정말?”
8회 초, 수비이닝을 끝내고 돌아온 덕아웃. 뜻밖의 희소식이 우리를 반겼다. 완벽하게 휴스턴을 압도하던 매덕스의 연속 피안타. 그리고 피홈런. 마운드에 올라와있던 투수가 매덕스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강판했을 상황에서 매덕스라는 이름 때문에 그를 내리지 못했던 애틀랜타의 패배였다.
“그러면, 이거······.”
“그래, 이 경기 이기면 포스트시즌 진출 확정이다.”
피아자의 선언과 같은 이야기에 10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열기가 덕아웃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뻐엉!!
귓가에 들려오는 폭발적인 포구음.
“뭐야, 8회인데 벌써?”
롭 넨.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만을 제치고 현역 최고의 마무리로 손꼽히는 그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구속에 대한 공식계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투수. 작년 마무리 투수의 대명사로 꼽히는 트레버 호프만의 ERA가 2.99일 정도로 극심한 타고투저의 리그 상황에서 68경기 66이닝 ERA 1.50의 성적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 결과 작년 롭 넨은 사이영 4위. MVP 12위에 이름을 올렸다.
9번 타자. 투수인 옥타비오를 대신해 타석에 들어간 반스 윌슨의 방망이가 붕붕 돌아갔다. 스윙 스트라이크, 그리고 내야 뜬공.
대기타석에서 기다리던 리키 헨더슨이 타석에 들어갔다.
‘젠장.’
리키 헨더슨에게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타입의 투수다. 구위와 구속을 믿고 존안으로 공을 욱여넣는 파이어 볼러. 리키 헨더슨의 배트가 허공을 휘저었다.
“스트라잌!!”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101. 시즌의 막판. 10월의 쌀쌀한 날씨를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숫자다. 마운드의 롭 넨이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뻐엉!!
“스트라잌!!”
92마일. 어지간한 강속구 투수의 속구와 비슷한 구속. 하지만 속구가 아니었다. 슬라이더. 헨더슨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타석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어라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망이를 노려보던 헨더슨이 다시 타석에 섰다. 세 번째. 롭 넨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했다.
탁!!
[기습 번트!! 리키 헨더슨 선수의 기습 번트입니다.]
헨더슨의 몸이 벼락처럼 1루를 향해 쏘아진다. 번트 타구의 방향은 투수 정면. 롭 넨이 무너지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공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뻐엉!!
“세이프!!”
하지만 헨더슨의 발이 조금 빨랐다. 1루 베이스를 밟고 선 리키 헨더슨이 이마의 땀을 훔친다. 2점 차. 주자 1루. 마운드에는 리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사나이. 이제 나의 차례다.
강속구 투수의 대명사 롭 넨. 선발로 전환되지 못한 많은 강속구 투수들이 그렇듯 그는 제구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그가 무적의 투수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특유의 투구 동작 때문이었다.
이중키킹
훗날 한국과 일본을 거쳐 미국무대까지 진출하는 어떤 투수를 닮은 폼. 아니 그 투수의 폼도 이 롭 넨의 동작에 비한다면 매우 신사적이다. 솔직히 어떻게 저것이 보크가 아닌지 타자로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저것을 연속 동작으로 인정했고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저 투수의 상대는 오직 자신의 컨디션밖에 남지 않게됐다.
마운드의 롭 넨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1루의 도루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과감함.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의 시야가 평소보다 넓게 느껴졌다. 1루 베이스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 리키 헨더슨이 피식 웃는다. 롭 넨의 왼발이 바닥을 살짝 스치고 다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손끝에서 날아드는 102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어려워야 할 타이밍. 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공이 날아드는 타이밍이 완벽하게 느껴진다. 배트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쳐, 쳤습니다!!!]
2루를 향해 질주하던 리키 헨더슨의 걸음이 늦어진다. 그라운드를 가득 채웠던 함성이 한순간 잠잠하다. 잠깐의 정적. 정적을 깨트린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죽이었다.
***
-강진호 자이언츠와의 2차전 5타수 3안타 2홈런 2도루. 메이저리그 역사 최초의 50-50!!-
-뉴욕 메츠. 01시즌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 확정!!-
-배리 본즈 시즌 72호, 73호 홈런. 날로 갱신되는 홈런 신기록. 하지만 팀은 9:7 패배-
-8회 말, 경기를 뒤집는 프레스톤 윌슨의 적시 2루타.-
-경기 중 카메라에 잡힌 리키 헨더슨의 자기 최면 ‘리키 넌 할 수 있어!! 넌 최고의 타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