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40화 (140/210)

# 140화.

싹쓸이(1)

딱!!

10월, 아직 따듯한 플로리다의 청명한 하늘 위로 시원하게 날아가는 누런 공. 나의 시즌 마지막 타구가 말린스의 우익수 에릭 오웬스의 글러브로 쏙 들어갔다.

162경기 724타석 612타수 201안타(2루타 41개 3루타 7개) 51홈런 50도루(13 도루 실패) 98볼넷 5사구 7희생플라이 124타점 141득점으로 0.328/0.425/0.668

-3/4/6 강진호 MVP 유력!!-

-강진호 데뷔 4년 차, 통산 두 번째 MVP? 74홈런의 배리 본즈가 가장 큰 장벽!!-

-야구에서 50-50이 갖는 의미를 알아보자.-

휴스턴, 엔론 필드 인근 포시즌 호텔 최상층. 슈퍼 킹사이즈 침대 위에서 옅게 잠이 들어있던 나의 몸 위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축하해.”

“어? 왔어? 오디션은 어떻게, 잘 된 것 같아?”

“반응이야 나쁘지 않았는데, 뭐 결과 나와봐야지.”

“잘될 거야.”

재키의 손이 아직 잠에 취해있던 나의 몸을 슬쩍슬쩍 건드린다.

“자기, 우리 오래간만에 봤는데 언제까지 매니저처럼 굴 생각이야?”

“흐음, 글쎄, 그 매니저 정확히 3초 전에 사표 내고 나간 것 같은데?”

한바탕 뜨거운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나의 가슴을 손끝으로 간질거린다.

“프로 야구 선수도 정말 힘든 것 같아.”

“응? 뭐가?”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여기가 조금은 폭신했는데, 지금은 너무 딱딱해졌어. 햇볕에 바짝 말린 것 같아.”

“그거야 뭐, 시즌도 이제 끝났고, 포스트시즌까지만 치르면 다시 폭신해질거야. 그리고 배우도 입금되면 확 줄어드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건 그런데, 우린 정말 의도적으로 빼는 거고, 자기는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저절로 빠지는 거잖아.”

“그런가? 근데 야구 선수라고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이건 내가 입이 좀 짧아서 그런 거라서.”

가벼운 손짓으로 시작된 농탕질이 점점 도를 더해간다. 본연의 임무를 끝내고 풀이 죽어있던 나의 주니어가 다시 빳빳하게 고개를 일으켰다. 나의 팔이 재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2차전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재키가 나의 가슴팍을 슬쩍 밀어낸다.

“자, 여기까지. 자기 내일도 시합이잖아.”

“재키, 이건 좀 아니지. 지금 얘 화난 거 안 보여?”

“잘 보이는데, 그 화난 배트는 나한테 말고, 내일 휴스턴 투수한테 휘둘러주세요.”

“아니, 잠깐만 이 배트랑 그 배트는 다르지.”

“내일 시합 중요하잖아. 안 그래도 고생해서 여위었는데 체력 보존해야지.”

“아니, 그러니까 이 체력이랑 그 체력이랑은 아무런 상관이······.”

나의 억울한 항변에도 재키의 웃는 표정은 굳건하다. 이미 몇 차례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런 표정으로 고집을 부리는 그녀는 꺾을 수 없다.

***

오늘 경기. 휴스턴의 선발은 웨이드 밀러. 타임슬립 직후 세인트루시에서 처음 만났던 투수이자 재작년과 작년 한차례씩 부딪혔던 투수이기도 했다.

‘분명 올해 성적이······.’

32경기 16승 8패 212이닝 평균자책점 3.40.

99년 데뷔 이후 꾸준히 가능성을 보여주던 웨이드 밀러는 이번 시즌 마침내 폭발했다. 97년 마이너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반짝이던 재능이 99년과 00년의 담금질을 통해 마침내 완성됐달까? 최고 99마일의 빠른 공. 89마일의 강력한 슬라이더와 94마일을 웃도는 커터. 그리고 괜찮은 체인지업과 커브까지. 올해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중부지구 우승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에이스로 부끄럽지 않은 성적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리키 헨더슨 스윙 삼진. 웨이드 밀러 선수의 88마일 슬라이더에 리키 헨더슨 선수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갑니다.]

[정말 완성도 높은 슬라이더입니다. 이번 시즌 우완 투수의 슬라이더 중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슬라이더를 꼽으라면 전 밀러 선수의 슬라이더를 꼽고 싶네요.]

헨더슨이 타석에서 내려오면서 혀를 내두른다.

“하, 저거 대체 뭐야.”

존 바로 앞에서 휙 하고 꺾이는 느낌의 슬라이더. 리키 헨더슨이 전성기와 비교해 유일하게 크게 뒤떨어지지 않은 것이 선구안이다. 그런 그의 선구안을 속여넘겼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내가 성장한 만큼 녀석도 성장했다 이거네.’

설레는 마음으로 타석에 섰다. 타임슬립 직후, 내가 쳐낸 첫 번째 홈런이 떠오른다. 녀석이 좌타자에게 백도어성 슬라이더를 던지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쳐냈던 홈런. 하지만 슬라이더의 완성도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간 밀러였다. 게다가 그때의 교훈인 것인지, 아니면 이후로도 비슷한 일을 많이 경험했는지, 좌타자를 상대로 그런 종류의 슬라이더를 던지는 일은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다.

‘뭐, 그건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슬라이더가 주특기인 투수가 슬라이더를 봉인한다. 물론 녀석은 슬라이더를 제외하더라도 99마일의 빠른 공과 94마일의 커터, 그리고 커브와 체인지업까지 다양한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어드밴스드A를 초토화시켰던 루키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에이스로 성장하는 사이, 나는 내셔널리그의 MVP를 수상하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50-50클럽을 개척했으며 두 번째 MVP를 노리는 타자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지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자, 어디 얼마나 대단해졌는지 한번 보자고.’

마운드의 밀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 몸쪽 빠른 공.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뻑!!

찌르르 묵직한 감각이 손바닥을 강타했다. 스윙스팟을 벗어나 배트 손잡이 가까운 위치를 때린 공이 나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뒤로 빠졌다. 포수인 브래드 아스머스가 바닥을 찍고 크게 튕겨나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한 공을 잡아냈다.

[웨이드 밀러의 몸쪽 커터!! Kang의 배트가 쫙 갈라졌습니다.]

‘젠장.’

심판에게 배트를 보여주고 덕아웃으로 걸어갔다. 프레스톤이 씨익 웃으며 나의 예비용 배트를 건넨다.

“좀 매섭지?”

“저 녀석이야 원래 매서웠지. 기억 안 나? 3타수 무안타.”

“윽, 그거야 4년 전 애송이 시절 이야기잖아.”

프레스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진다. 4년 전 일이라곤 했지만, 그 당시 손도 제대로 못써보고 당했던 그 분함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예비용 배트를 움켜쥐고 타석으로 향했다.

부웅

이전에 사용하던 배트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감각.

‘올 해 커터가 더 예리해졌다고 듣긴 했는데, 영상보다 더 대단한데?’

속구와 구분하기 힘든 구속 그리고 무브먼트에서 갑작스럽게 휙 꺽여들어오는 94마일의 커터. 이전 슬라이더에서도 느꼈지만, 저 녀석이 던지는 변화구들은 홈플레이트와 굉장히 가까운 지점에서 변화를 시작한다. 뭐 거기까지는 빠른 구속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가까운 지점에서 변화한다면 상대적으로 그 움직임이 크지 않아야 하는데, 공의 움직임마저도 극심하다는 점이었다.

‘PTS가 없으니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공의 회전량이 어마어마한 게 분명해.’

제2구. 바깥쪽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높은 코스의 빠른 공. 반쯤 돌아가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볼!! Kang, 빠지는 공을 잘 참아냅니다.]

[정말 칼 같은 선구안입니다.]

상당히 빡빡한 존이다. 타자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 마운드의 밀러가 살짝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하드웨어적으로는 리그 에이스. 멘탈리티 적으로는 여전히 조금 부족한 건가?’

대단한 구위의 공들이긴 했지만, 어쨌든 올해 녀석의 ERA는 3.40이다. 물론 올해 메이저리그는 PED의 광풍으로 굉장히 심각한 타고투저의 리그이긴 했다. 하지만 어찌 됐건 3.4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말은 저 막강한 공에도 분명 약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올 시즌 매덕스 씨의 평균자책점이 분명 2.99였지?’

방망이를 쥐고 밀러의 공을 기다렸다. 6피트 2인치(188cm) 쭉 뻗은 몸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큼지막한 키킹. 그리고 넓은 스트라이드. 밀러의 오른 손에서 누런 공이 뛰어나왔다.

‘바깥쪽!!’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한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지금 밀러가 던진 공은 체인지업이다.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아직이다. 약 0.2초의 기다림. 바깥쪽 낮은 코스 예리하게 찔러오는 체인지업을 향해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완벽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엔론 필드의 우측 외야 2층 관중석을 직격했다.

[홈런!! 홈런입니다!! 휴스턴과 메츠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 메츠의 Kang이 선제 홈런포를 기록합니다!!]

[올 시즌 51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리그에서 네 번째로 많은 홈런을 기록한 메츠의 Kang. 그 화끈한 장타력은 디비전 시리즈에 들어와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웨이드 밀러 선수, 허탈한 표정입니다. 올 시즌 밀러 선수의 체인지업은 리그에서도 손꼽힐만큼 많은 삼진을 잡아낸 공이거든요. 이렇게 쉽게 공략당할 공이 아닌데, 방금은 Kang 선수가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완벽하게 밀러 선수의 체인지업을 공략했어요.]

[괜히 매덕스 선수가 토니 그윈과 같다고 말한 게 아닙니다.]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나를 환영하는 동료들. 프레스톤이 내 헬멧을 격정적으로 두들긴다.

“잘했어!!!”

“아야!! 아파 인마!!”

***

4회 초.

[선두 타자, 직전 타석에서 스윙삼진으로 물러났었죠? 프레스톤 윌슨 입니다.]

[이 선수도 99년 신인왕 이후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올 시즌 0.283/0.368/0.545. 홈런만 42개를 기록했습니다. 93년 드래프트 이후 마이너에서 6년. 조금 오래 머무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올해 26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선수예요.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딱!!

[아!! 초구 타격!! 바깥쪽 체인지업을 건드렸어요.]

[투수 잡아서 1루에, 1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프레스톤의 헬멧이 덕아웃을 구른다. 2타수 무안타. 오늘 프레스톤은 밀러가 던지는 체인지업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망할. 대체 저걸 어떻게 구분한다는 거야.”

“말했잖아. 그냥 보면 감이 온다고.”

“젠장, 더러운 재능 같으니.”

메이저에서 한 시즌 42개나 되는 홈런을 쳐낸 타자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프레스톤도 진지하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자신의 선구안이 최정상급 타자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방식의 타격을 했다. 삼진이 조금 많으면 어떤가. 그만큼 장타를 뻥뻥 날리면 그만이다.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저기 헨더슨 씨도 체인지업 잘 골라내는데 왜 나만 붙잡고 이러냐.”

구석에서 부지런히 스키틀즈를 집어먹던 헨더슨이 답했다.

“나도 쟤가 던지는 건 잘 구분 안 되는데? 영 모르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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