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41화 (141/210)

# 141화.

싹쓸이(2)

올 시즌 메츠에서 가장 훌륭했던 투수는 피츠버그에서 1년 렌탈로 데리고 온 제이슨 슈미트였다. 97년 재능을 폭발시킨 이후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200이닝+. 4점 초반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던 이 투수는 작년 어깨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다. 메츠가 대가로 치른 것은 두 명의 유망주, 그리고 100만 달러. 그럼에도 세간의 평가는 피츠버그의 손해라는 말이 나오는 트레이드였다. 그리고 일 년. 피츠버그의 프런트는 세계제일의 머저리들이 돼 있었다.

29경기 172.2 이닝 평균자책점 3.87. 164개의 탈삼진.

어깨의 부상으로 저하됐던 구속은 돌아왔고 제구력은 향상됐으며 새로 추가한 서클체인지업은 그를 리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투수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점은 오도네즈와 진호로 대표되는 메츠의 센터 라인이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를 자랑한다는 점이었다.

따악!!

랜스 버크만이 쳐낸 공을 향해 진호의 몸이 날아올랐다. 엔론 필드. 휴스턴이 작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가장 현대적인 변태 구장. 130m를 넘기는 깊숙한 중앙 필드. 그걸로 모자라 30도 경사까지 져있는 Tal’s hill은 중견수들을 극한까지 시험했다.

그리고 그 시험에 진호가 만점짜리 답안지를 제출했다.

“아!!!”

7회 말, 2점 차. 2아웃 주자 만루. 싹쓸이 2루타, 혹은 3루타를 기대했던 관중들의 입에서 한탄이 터졌다.

“젠장, 저 괴물은 대체 뭐야.”

최선을 다해 달리던 휴스턴 타자들의 걸음이 멈춰섰다. 달아오르던 분위기에 그대로 찬물이 뿌려진 느낌. 반면 제이슨 슈미트를 비롯한 메츠 선수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 휴스턴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순간이었다.

***

-뉴욕 메츠!! 파죽지세. 99년을 연상케 하는 3:0 완승!!-

-새가슴의 한계인가. 프레스톤 윌슨 13타수 무안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2차전. 랜디 존슨 8이닝 3실점 패배!! 승부의 분수령이 된 1회 푸홀스의 2점포-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 빌리 빈이 부린 놀라운 마법. 양키스 패배!! 또 패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김병규 완벽투!! 3차전 1.1이닝 무실점.-

-챔피언십 시리즈, 한국인 메이저 리거의 맞대결 성사?-

-아메리칸리그, 시애틀 매너리스. 3:2 역전승!! 안타왕 스즈키 이치로의 대활약!! 디비전 시리즈 5경기 21타석 20타수 12안타 1볼넷. 0.600/0.619/0.650.-

-양키스 기적의 패패승승승. 10월의 사나이. 데릭 지터의 대활약-

-5차전 알버트 푸홀스 5타수 무안타 침묵!!-

-커트 실링 8이닝 무실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우리의 상대는 사상 최강의 원투펀치,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을 앞세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였다. 올해 만 37세. 이제는 베테랑을 넘어 은퇴가 가까울 연령의 랜디 존슨이 올 시즌 기록한 성적은 35경기 21승 6패 249.2이닝 372삼진 평균자책점 2.49. PED를 복용한 선수들이 가득한 리그에서 랜디 존슨을 제외하고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선수는 2.98을 기록한 같은 팀의 커트 실링이 유일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적.

마운드에 2미터 8센티의 거인이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었다.

‘이번 시즌 8타석 7타수 1안타에 2삼진이었지?’

거의 모든 투수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활약을 보였던 내가 유일하게 약했던 투수. 랜디 존슨.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올 시즌 랜디 존슨은 그야말로 좌타자 킬러라는 말이 어울렸다. 좌완임에도 불구하고 100마일을 오가는 포심과 90마일을 넘나드는 슬라이더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를 지난 시애틀과 휴스턴 시절보다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우타자 기준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투심 패스트볼. 포심이나 슬라이더에 비하면 크게 대단한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95마일을 오가는 투심 패스트볼은 충분히 실전에서 통용될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 앞의 리키 헨더슨이 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후.’

모든 좌타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빅유닛의 슬라이더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들어오는 것을 알고도 쳐내기 힘든 슬라이더. 마치 나의 머리통으로 날아드는 것 같은 92마일의 공을 끝까지 응시하며 침착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살짝 빗맞은 타구가 3루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 1-0. 랜디 존슨의 두 번째 공이 날아든다.

‘젠장, 이 아저씨. 진짜 과감하네.’

올 시즌, 나를 상대했던 대부분의 투수는 나를 경계했다. 그것은 라이브볼 시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기 시작한 매덕스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랜디 존슨은 달랐다. 그의 공에는 나에 대한 경계심이 존재하지 않았다. 홈플레이트 복판을 향하는 과감한 100마일 패스트볼.

나의 배트가 그 속구를 후려쳤다.

딱!!

퍼올린 타구. 높게 떠오른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포수에게 공을 건네받은 랜디 존슨이 지체없이 세 번째 공을 던질 준비를 시작했다. 심판에게 손을 들어 잠시 타임을 요청한다. 한 호흡 끊어가야 하는 타이밍이다.

[2구 연속 파울!! 볼카운트 0-2로 랜디 존슨이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갑니다.]

[랜디 존슨 선수를 상대로 한 강진호 선수의 성적을 살펴보면 0.209/0.306/0.442입니다. 강진호 선수의 통산 성적이 0.306/0.386/0.562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약한 모습이에요.]

[특히 올 시즌의 경우 7타수 1안타 1볼넷 0.143/0.250/0.143으로 조금 부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강진호 선수, 한 방이 있는 선수거든요. 최근 타격폼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기대해볼만 합니다.]

***

대한민국의 한 호프집. 제대로 된 분석도 없이 그저 표면적인 자료만 읽어대는 자질 미달의 해설들을 바라보며 형석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저게 무슨 미친 소리야.”

랜디 존슨이 98시즌부터 올해까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타자들을 상대로 기록한 성적은 0.194/0.258/0.340. 좌타자만으로 한정할 때 그 성적은 절반에 가깝게 곤두박질친다. 즉 진호의 저 약간 부족해보이는 성적은 진호가 랜디 존슨에게 약한 것이 아니라, 랜디 존슨이 모든 좌타자들을 상대로 터무니 없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오히려 진호의 저 성적은 좌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하게 선방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미친 소리라니.”

옆에서 함께 맥주를 들이키던 친구의 질문. 형석이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진호는 결코 랜디 존슨에게 약하지 않고, 랜디 존슨을 상대로 진호의 성적은 좌타자라고 믿기 힘들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아, 그러니까 저 거인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네?”

“당연하지. 랜디 존슨이면 진호가 MVP 수상했던 시절부터 사이 영이라고 투수 MVP 같은 걸 2년 연속 딴 투수야. 올해도 가장 유력하고.”

“그러면 오늘은 진호네 팀이 이기기 힘들다는 이야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좌타자를 상대로는 거의 절망적이기는 한데, 메츠 타선이 99년 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괜찮기도 하고. 프레스톤이 삽 푸는게 좀 깝깝하기는 한데 그래도 클래스는 있는 녀석이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게다가, 진호가 랜디 존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타자도 아니라고. 진호는 프레스톤 같은 녀석과는 또 다른 타입이거든. 게다가······.”

***

옷깃을 가다듬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맨다. 다시 타석으로 돌아가 랜디 존슨의 피칭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존 안으로 정확하게 들어오는 공들. 하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가 통하지 않으면 발톱으로.’

나의 무기는 무작정 배트를 휘두르는 것만이 아니다. 랜디 존슨의 세 번째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딱!!

존을 통과하던 공이 또다시 파울 라인 너머로 날아갔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0-2. 마운드의 랜디가 네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뻐엉!!

바깥쪽으로 크게 빠지는 공. 당연하게도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볼카운트 1-2. 이제 시작이었다.

볼, 파울, 파울, 볼.

8개의 공이 들어와 볼카운트는 어느새 풀카운트. 최상의 컨디션으로도 제대로 된 안타를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의 선구안 역시 랜디의 공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뻐엉!!

[바깥으로 빠지는 공!! 강진호 선수!! 랜디 존슨의 공을 골라내며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합니다.]

[이거거든요!! 괜히 우리 강진호 선수를 리그 최고의 5툴 플레이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에요. 정말 칼같은 선구안입니다.]

[물론 안타는 언제나 옳습니다만, 투수 입장에선 0-2에서 이렇게 공을 잔뜩 던지고 볼넷으로 출루시키는 것만큼 열받는 일도 드물거든요. 강진호 선수, 오늘 챔피언십 시리즈 첫 번째 타석부터 자기 몫을 아주 제대로 해내고 있습니다.]

1루 베이스. 암 가드와 풋 가드. 배팅 장갑을 벗는다. 과거 13년 전, 리키 헨더슨이 뛰고 싶을 때 뛰던 시절만큼 허술한 투수는 아니었다. 긴 시간만큼 주자에 대한 견제능력 역시 리그 평균 수준까지 올라왔다.

[강진호!! 달립니다!! 단독 도루!!!]

[2루에서!! 2루에서!!]

“세이프!!”

[세입!! 세입이에요. 강진호. 볼넷으로 출루해서 단독 도루!! 순식간에 득점권까지!!]

[바로 이거거든요. 야구는 방망이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눈으로 보고, 발로 달리고. 오늘 강진호 선수가 야구란 무엇인가를 전세계에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하지만 고작 리그 평균 수준으로 막을 수 있을만큼 내 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평균 51도루. 운이 따르지 않아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4년간의 도루를 합쳤을 때 리그에서 나보다 많은 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뒤를 이어 타석에 올라온 타자는 마이크 피아자. 리그에서 속구를 가장 잘 공략하는 남자다.

딱!!

피아자의 밀어친 타구가 1루 파울 라인을 따라 외야까지 흘러나갔다. 애리조나의 우익수 레지 샌더스가 서둘러 달렸지만 늦는다. 3루를 지난 나의 발이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세이프!!!”

1회 초 1:0. 크지 않은 점수 차이다. 하지만 상대는 랜디 존슨. 양대 리그 최강의 투수였다. 그를 상대로 얻어낸 1점은 매우 큰 의미다.

삼진, 그리고 내야 땅볼. 우리의 공격이 끝났다.

그리고 1회 말, 우리 측 불펜. 오늘의 선발로 예비 된 제이슨 슈미트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와 그 자신감에 어울리는 공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세인트루이 카디널스와의 디비전시리즈 다섯경기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만들어낸 점수의 합계는 고작 8점. 한 경기 평균 2점이 채 되지 못했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뉴욕 메츠 1:0 신승-

-팀의 유일한 득점을 만들어낸 강진호의 눈과 발!!-

-랜디 존슨 8이닝 1실점 패배!! 빈공에 시달리는 다이아몬드백스의 타선!!-

-김병규, 강진호 맞대결 무산!! 무대는 2차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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