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싹쓸이(3)
-뉴욕 메츠,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 5:1 완승!! 이제 뉴욕으로!!-
-메츠 지난 1999년을 연상케 하는 질주!!-
-포스트시즌 다섯 경기 21타수 무안타. 프레스톤 윌슨!!-
-큰 경기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프레스톤 윌슨. 과연 셰이 스타디움에서는?-
-승기를 잡지 못하는 다이아몬드백스. 김병규 2차전 출전도 무산!!-
이동일, 뭐, 이동 자체는 어제 했던 만큼 사실상 휴식일에 가까운 하루.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해 프레스톤과 구장을 찾았다.
“프레스톤.”
“어? 어? 아, 먼저 들어가. 나는 이거 몇 개만 더 치고 들어갈게.”
“오늘 재키가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더라.”
“재키가?”
“어, 집에 요리해두고 기다린다더라. 그러니까 그쯤하고 가서 밥이나 먹자고.”
프레스톤이 방망이에서 쉽게 손을 놓지 못한다. 다섯 경기째 무안타. 그것도 포스트시즌. 이제 제법 멘탈이 단단해진 프레스톤이라지만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대응하기는 힘들 것이다. 2001년 하반기. MLB.Com을 비롯한 각종 인터넷 사이트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눈이 달렸다면 자신에 대한 악플들을 보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
“내일 경기도 뛰어야지.”
“그래, 그러자.”
집안이 맛있는 향기로 가득하다. 재키의 요리솜씨는 의외로 괜찮았다. 경험이 필요한 칼질은 조금 미숙했지만, 음식에 대한 감각이 있달까? 언제나 그렇듯 맛좋은 음식은 사람의 긴장을 해소시킨다. 그리고 거기에 맛좋은 와인이 한잔이 곁들여지면?
“젠장!! 빌어먹을 자식들, 자기들이 직접 나와서 쳐보라 이거야. 애초에 내가 치기 싫어서 안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삼진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잘 쳤는데 쏙쏙 잡히는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긴장을 내려놓기엔 충분했다. 프레스톤의 입에서 마음속으로 쌓아뒀던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러니까요. 솔직히 그런 건 좀 너무 하죠.”
게다가 재키는 상당히 좋은 청자였다. 그녀의 맞장구에 프레스톤의 이야기들이 점점 흘러나온다. 마치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받는 순간을 연상케 하는 속 깊은 대화.
“솔직히 진호 저 녀석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이 스쿨을 막 졸업한 주제에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이 미국으로 와서 저렇게 야구를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말이죠.”
“맞아요. 전 뉴저지에서 LA로 간 것 만으로도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래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솔직히 살던 도시가 바뀐 것만으로도 힘든데, 말도 떠듬거리는 애송이가 아침, 저녁으로 야구만 하고 있는데 내가 자극을 안 받을 수가 있겠냐고요. 심지어 포지션도 겹치는데 말이죠. 게다가 그거 알아요? 저 자식 분명 4년 전만 하더라도 타격은 영 별로였다고요.”
“정말요?”
재키의 맞장구에 프레스톤이 신나서 떠들어댄다. 뭐 솔직히 말해 그렇게 영 별로라고까지 할 만큼 형편없지는않았다. 부상만 없었더라면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메이저에 충분히 자리 잡을 만큼은 됐다. 하지만 지금 끼어들어 그런 이야기를 보탤 만큼 눈치 없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프레스톤과 재키의 대화를 지켜본다.
“얼마 전까지는 정말 저 자식을 이기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체력적으로 부담이 더 큰 중견수를 보는 놈인데, 타석에서라도 내가 더 잘해야죠. 그런데 말이죠 그게 참 힘들더라고. 저 자식이 변화구를 골라내고 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그냥 던지는 순간 아, 체인지업이다!! 아, 커브다. 알겠다는 거에요. 젠장. 무슨 카산드라도 아니고, 미래라도 보는 거냐고!! 어디 그뿐인 줄 알아요? 그나마 내가 저놈보다 괜찮았던 건 홈런 정도인데, 올해 홈런 치는 것 좀 보세요. 9월 18일부터 고작 열일곱 경기였어요. 그런데 12홈런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이건 도무지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잖아요.”
나를 신경 쓰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프레스톤의 입에서 연신 나를 부러워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프레스톤씨.”
“네?”
“저도 이번에 오디션을 봤어요.”
“갑자기 그 말은 왜?”
“엄청 큰 영화였어요. 솔직히 최종 오디션까지 간 것도 기적이었죠. 그런데 거기 누가 왔는지 아세요?”
“누가 왔는데요?”
“카메론 디아즈요.”
“디아즈? 디아즈면 그 메리?”
저예산 코미디였던 ‘메리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를 그해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로맨스영화로 만들어낸 금발의 바비인형, 카메론 디아즈. 그녀를 이야기하는 재키의 표정이 묘했다.
“네, 그 메리요. 옆에서 직접 봤는데 정말 영화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완벽하더라고요. 선명한 금발에 몸매도 바비인형 같고, 거기다가 연기도 완벽했어요.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뭐, 그래서 생각했죠. 아 망할, 또 떨어졌구나. 어쩐지 마지막 오디션까지 부르더라니 그냥 구색맞추기로 부른 거구나.”
“너무 실망하지 마요. 어차피 영화는 많고, 카메론이 모든 역할에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재키에게는 재키에게 더 어울리는 역할이 있을 거에요.”
프레스톤의 말에 재키가 웃는다. 그 미소에 프레스톤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그러니까 카메론이 진호 저 녀석이고, 재키가 나라 이거군요. 어차피 야구는 진호 저 녀석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이거죠?”
***
애리조나와의 3차전. 오늘 애리조나의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리그 전체에서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기록한 사상 최강의 2선발. 커트 실링이었다.
[1회 초, 케빈 어피어가 애리조나의 타자들을 삼자범퇴로 돌려세웁니다.]
[아, 다이아몬드백스의 타선. 정말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습니다. 이런 식이면 투수들이 아무리 지금처럼 잘해준다고 해도 힘들어요.]
97마일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가 존의 외곽에 날카롭게 꽂힌다. 시즌 성적은 랜디 존슨에 비해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빅게임피처라는 이름에 걸맞게 포스트시즌 커트 실링은 지난 1차전 랜디 존슨보다 오히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딱!!
물론 나에게는 랜디 존슨보다 훨씬 쉬운 투수였지만 말이다. 우투수와 좌타자라는 조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인간,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너무 높다. 그것도 자기의 공을 믿고 과감하게 존 안쪽으로 집어넣는 스타일. 물론 구위나 구속이 모두 대단하긴 했지만 아예 방망이를 가져다 대지 못할 압도저인 공은 아니었다. 게다가 컨트롤은 제법 대단하지만 커맨드가 대단한가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2타수 2안타.
잘 맞은 장타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1루까지 걸어 나가기에는 충분한 안타들. 문제는 나의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들이었다.
딱!!
피아자가 살짝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건드렸다. 유격수 정면, 쏜살같이 날아드는 타구. 이건 내가 아니라 칼 루이스가 달려도 병살이 될 수밖에 없는 타구다.
[아!! 병살타!! 우리 강진호 선수가, 1회 말에 이어 두 타석 연속 안타를 기록했는데, 이번에도 점수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메츠의 팬들에게는 참 갑갑한 상황일 겁니다.]
[하지만 메츠 타자들의 탓만 하기에는 커트 실링 선수의 공이 참 좋아요. 지난 디비전 시리즈에 이어서 오늘 경기도 대단한 활약을 보여줍니다.]
“아까웠어요.”
“어쭈, 지금 네가 날 위로하는 거야?”
“슬슬 제가 피아자 씨 위로할 때도 됐죠. 99년 MVP타자이자 올 시즌 가장 유력한 MVP후보 아닙니까.”
병살을 기록한 피아자에게 다가가 가볍게 말을 건넸다. 뭐 보는 팬들 입장에서야 병살타를 친 타자는 죽일 놈이겠지만, 경기를 하다 보면 종종 나올 수 있는 것이 병살이다. 이런 일에 일일이 일희일비해서는 야구를 할 수 없다. 오히려 문제는 저쪽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힘있는 스윙. 하지만 그 대상이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다. 프레스톤의 배트가 허공을 휘저었고 녀석은 두 번째 삼진을 기록했다.
[아, 프레스톤 윌슨!! 포스트시즌 23타석째 무안타. 오늘 경기 두 번째 삼진입니다.]
[적극적으로 스윙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어이없는 공에 배트가 나가고 있습니다. 정규 시즌 프레스톤 윌슨 선수의 성적이 좋았던 점은 잘 알고있습니다만, 이제 슬슬 타순을 조정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포스트시즌 이거든요. 이정도로 부진이 오래 되는 선수를 중심타선에 그대로 두고 믿음의 야구를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압박 때문일까? 녀석의 스윙이 한층 더 커졌다.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듯 의욕으로 가득 찬 스윙. 아무리 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커트 실링이라고 해도 저렇게 칠 생각으로 가득한 타자를 상대로 좋은 공을 보낼 이유는 없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녀석이 가만히 껌을 씹으며 글러브를 챙겨 든다. 평소라면 헬멧을 집어 던지고 이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켤 녀석답지 않은 침착함. 케빈 어피어의 호투와 다이아몬드백스 타선의 침묵 속에 경기가 흘러갔다.
딱!!
바깥쪽 높은 코스 빠른 속구. 배트의 끝에 커트 실링의 공이 제대로 걸렸다. 힘있게 튀어 나가는 공. 타구의 발사각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속도만큼은 무시무시했다.
[강진호 선수!! 강한 타구!!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아!! 조금 낮았어요. 타구 담장 상단을 직격합니다. 좌익수 곤잘레스가 공을 잡습니다!!]
[그 사이 강진호는 1루 지나 2루로. 강진호!! 아직 여유 있습니다. 2루 지나 3루까지, 아!! 아니네요. 2루로 돌아갑니다. 강진호 선수 2루에서 멈춰섭니다.]
[이건 강진호 선수의 빠른 발을 생각하면 한번 뛰어볼 만도 했던 것 같은데 조금 아쉽네요.]
[타구의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어요. 3루타를 만들 수 있었는데 이건 상당히 아쉽게 됐습니다.]
[그래도 득점권입니다. 1아웃 주자 2루. 메츠는 우리 강진호 선수가 만들어준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절대로 놓치면 안됩니다.]
[타석에는 마이크 피아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옵니다.]
[지금까지 2타수 무안타. 하지만 파워는 충분한 선수거든요. 지금은 그 파워를 이용해서 공을 충분히 퍼올려줘야 합니다. 우리 강진호 선수의 빠른 발을 생각하면 외야 깊숙한 곳까지 공을 퍼올려 주기만 해도 충분히 득점이 가능합니다.]
따악!!
[초구 스윙!! 높게 떠오른 타구!! 일루수 마크 그레이스 달립니다!!]
“아웃!!”
[아,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타구.]
[지금은 조금만 더 신중하게 공을 봤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초구 스윙 아웃이라니. 이거 이렇게 되면 곤란하죠.]
[자, 다음은 4번 타자인 프레스톤 윌슨 선수입니다.]
[직전 타석까지 23타수 무안타. 정말 심각한 상황이거든요. 여기서는 발렌타인 감독이 교체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합니다. 지금 믿음의 야구를 할 타이밍이 아니에요.]
프레스톤 윌슨이 타석에 섰다. 여전히 커다란 스윙.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아, 프레스톤 윌슨, 헛스윙.]
[너무 공격적이에요, 조금 더 침착하게 공을 지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요?”
“후후, 저 오늘 연락왔어요.”
“설마?”
“네, 그 오디션 제가 합격했어요. 제작비 7천만 달러짜리 영화 주연 여배우 자리에요. 금발에 바비인형보다, 제가 더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
무명의 여배우 앤 해서웨이가 헐리웃 최고의 여배우 카메론 디아즈보다 더 주연에 어울리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조연으로 격하시키지 않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 자리를 향해 치열하게 손을 뻗는 것이다.
딱!!
24번째 타석. 프레스톤 윌슨의 타구가 셰이 스타디움의 명물인 중앙 담장 너머 실크햇 사이의 대형 사과를 소환했다.
-승부를 결정짓는 프레스톤 윌슨의 2점 홈런. 뉴욕 메츠 파죽의 3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