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싹쓸이(4)
파죽의 3연승. 월드 시리즈 진출까지 남은 것은 고작 1승밖에 남지 않은 상황.
뻐억!!
“스트라잌!! 아웃!!”
1차전 1점의 실점으로 승리를 양보했던 2001시즌 최강의 투수가 마운드에서 포효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00년대 최강의 투수. 90년대 4대 투수 중 가장 마지막에서야 그 기량을 폭발시킨 랜디 존슨의 위력은 대단했다.
[랜디 존슨!! 삼진!! 또 삼진!!! 대단합니다.]
[오늘 경기 벌써 11개째 삼진이죠? 그야말로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제 커트 실링도 물론 대단했다. 하지만 오늘 랜디는 아예 그 ‘격’이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느낌. 이것은 지난 99년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보여줬던 그 포스에 필적했다. 물론 페드로의 경우 저런 모습을 한 시즌 내내 유지했고, 랜디는 이렇게 가끔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젠장, 오늘 같은 날은 배리 본즈가 와도 답이 없겠는데.’
에이스의 분전에 호응한 것일까? 다이아몬드백스의 타자들 역시 평소보다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3득점. 이번 시리즈 1,2,3차전에서 그들이 뽑아낸 점수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점수가 한 경기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8회 말, 지난 7이닝 동안 25명의 타자들을 상대로 무려 13개의 삼진을 잡아낸 랜디 존슨을 대신해 김병규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BK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78경기 94이닝 ERA 2.94.]
[애리조나가 내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죠. 3:0으로 우세한 상황이지만 결코 경기를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밥 브렌리 감독. 이번에도 BK에게 2이닝을 맡길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다이아몬드백스는 지금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거든요. 어떻게든 오늘 경기를 승리하고 기세를 몰아 뱅크 원 볼파크로 돌아가고 싶을 겁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병규의 공이 우리 타자들을 연거푸 돌려세운다. 삼진, 삼진 그리고
[8회 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1번 타자 리키 헨더슨 선수가 들어옵니다.]
[리키 헨더슨 선수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거든요. 오늘 랜디 존슨 선수를 상대로 멀티 출루를 기록했어요.]
[오늘 랜디 존슨 선수가 7이닝 동안 고작 4번의 출루를 허용했는데 그중 두 번이 리키 헨더슨 선수의 출루였습니다.]
빅네임을 가진 선수의 등장. 하지만 마운드의 병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동네 야구에서 처음 보는 아저씨가 타석에 오른 것 같은 무뚝뚝함. 그의 손에서 누런 공이 날아들었다.
뻐엉
“스트라잌!!”
리키 헨더슨이 병규를 한 번, 그리고 심판을 한 번, 마지막으로 홈플레이트를 한 번 바라본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다시 타석에 서는 헨더슨. 병규의 손에서 두 번째 공이 출발했다.
부웅!!
“스트라잌!!”
스윙 스트라이크 그리고
뻐엉!!
“스트라잌!! 아웃!!”
[루킹 삼진!!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 8회 말. BK가 공 9개로 3개의 삼진을 잡아냅니다. 오 맙소사.]
[BK. Born to K라는 별명에 걸맞은 피칭입니다. 포스트시즌 1이닝 9개의 스트라이크를 연속으로 던져 3개의 삼진을 잡아낸 투수가 지금까지 있었나요?]
[음, 잠깐 살펴봐야 알겠습니다만 애초에 1이닝 9개의 공을 던져서 9개의 스트라이크로 3삼진을 기록한 선수 자체가 아직 50명이 채 되지 못하는지라, 아마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 자료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기록 자체는 51번. 기록을 달성한 투수는 46명에 불과했군요. 오늘 BK의 기록이 52번째, 그리고 기록을 달성한 47번째 투수입니다. 그리고 포스트 시즌 최초의 기록은 아니네요. 지난 85년 월드 시리즈 5차전 켄자스시티 로얄스의 대니 잭슨 선수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7회 한차례 기록한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 BK의 기록은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두 번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최초의 기록입니다.]
“후아, 저거 진짜 터무니없네. 본래 이상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예 미쳐 날뛰는데? 무슨 공이 나가는 것 같더니 들어오고, 들어오는 것 같더니 나가고.”
보통 삼진을 당했을 때 상대 투수를 칭찬하기보다 자신의 실수를 탓하는 리키 헨더슨이 혀를 내둘렀다. 79년 데뷔 이후 23년 째 메이저에서 뛰어온 리키 헨더슨조차도 처음 보는 기괴한 움직임. 아무래도 오늘 병규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완전 그 자체인 듯 싶었다.
“아직 1이닝 남았어요. 침착하게 잘 막아내고, 역전 해보죠.”
“우승은 원래 전승으로 하는 게 또 맛이지. 올해도 전승 우승으로 가보자고.”
나의 격려에 피아자가 말을 보탰다. 뭐, 오늘 경기에서 지고 있다곤 해도 디비전 시리즈 진출 이후 6연승을 달려온 팀이다. 분위기가 나쁠 리 만무했다. 우리의 격려에 동료들이 호응했다.
물론 우리가 의욕을 내건 말건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자신의 할 일을 냉정하게 수행했다. 9회 마운드에 오른 것은 존 프랑코. 58경기 53.1이닝 ERA 4.05. 이번 시즌 추격조, 혹은 패전 처리조를 담당했던 불펜이었다.
9회 초, 애리조나가 1점을 추가했다. 점수는 4:0.
마지막 공격 찬스. 마운드에는 9개의 연속 스트라이크로 3개의 삼진을 잡아낸 병규가, 그리고 타석에는 오늘 경기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내가 올라왔다. 오늘 경기 병규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웃음, 병규가 보인 그것은 미소라기 보다 헤벌쭉한 웃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표정이었다. 반가운 형제, 혹은 친구라도 만난 것 같은 웃음이다. 시즌 중 애리조나와의 홈 경기, 혹은 원정경기를 치르기 전 따로 식사할 때마다 보여줬던 표정이었다.
‘자식이, 포스트시즌이라 사정 봐주지 말고 집중하라고 일부러 안 만난 건데 전혀 소용이 없어 보이네.’
녀석은 마이너에서 박박 구르며 미국 생활을 익혔던 나와는 달랐다. 미국에 온 지 햇수로 3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영어에 서툴렀고 팀의 동료들과는 개인적으로 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딴 것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묵묵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말 투수답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덕분에 녀석은 같은 한국인 선수들과 만날 때마다 저렇게 반가워 하곤 했다. 뭐, 한국인 선수라고 해봐야 아직 나와 찬화 선배가 전부였고, 그나마 올해는 찬화 선배가 시즌 아웃 된 덕분에, 나와 만나는 것 정도가 다였지만 말이다.
타석에서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마운드의 병규가 와인드업에 들어간다. 사이드암 투수보다 아주 조금 낮은 각도. 하지만 그 아주 조금 낮은 각도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부웅
“스트라잌!!”
업슛. 전 세계 모든 투수가 던지는 공 중 유일하게 착시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떠오르는 공. 거기에 더러운 볼 끝이 더해졌다.
‘이거 오늘은 횡무브먼트도 좀 심한데?’
마운드의 병규는 여전히 밝은 표정이다. 그리고 그 밝은 표정 아래 그의 몸이 보인다.
‘확실히 두꺼워졌어.’
몸의 두께는 그리 우락부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 팔 티셔츠 아래, 악력과 아주 큰 연관이 있는 전완근이 매우 큼지막하게 부풀어있다. 마운드의 병규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같은 공이었다.
‘이 자식이?’
오늘 지금까지 나의 성적은 3타수 무안타 1삼진. 좋지 못한 성적이다. 하지만 나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나쁜 것은 마운드에 선 상대가 랜디 존슨. 이 시대 가장 강력한 좌타자 킬러였다는 점뿐이었다. 그리고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나는 배리 본즈와 함께 이 시대 최강을 다투는 좌타자다.
딱!!
힘껏 당겨 친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홈런!! 홈런입니다.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 9회 말 4:0 상황. 1점을 추격하는 Kang의 홈런이 터졌습니다.]
[지난 디비전시리즈 1차전 웨이드 밀러 선수를 상대로 기록한 홈런에 이어 이번 포스트시즌 2호 홈런이자 챔피언십 시리즈 첫 번째 홈런입니다.]
9회 초, 1점을 따라가는 홈런.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야구는 타자가 혼자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종목이 아니었다. 내가 병규에게 홈런을 뽑아냈지만, 그것이 팀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나에게 홈런을 허용했음에도 눈도 하나 깜빡하지 않은 표정의 병규가 후속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4차전 4:1 패배.
랜디 존슨과 병규가 애리조나의 4차전 승리를 강제로 견인했다. 하지만 타자가 시합을 강제로 승리하게 만들 수 없듯, 투수 역시 시리즈를 강제로 승리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5차전 마지막 홈 경기. 우리가 챔피언십 시리즈 승리를 확정지었다.
-뉴욕 메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7:2. 메츠의 완승!!-
-메츠 99년에 이어 다시 월드 시리즈로!! 상대는 양키스? 시애틀?-
-99년에 이어 01년 또다시 서브웨이 시리즈가 이뤄질까?-
-메츠의 월드 시리즈 상대는 타격왕 이치로가 이끄는 시애틀 매너리스일까, 작년의 우승팀, 양키스일까?-
-마이크 피아자 ‘어느 팀이 올라오건 상관없다. 우승 트로피는 결국 뉴욕으로 오게 될 것이다.’-
-강진호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뉴욕에게 작게나마 위안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디비전 시리즈 오클랜드를 상대로 패패승승승을 시전한 작년의 챔피언 양키스는 푸홀스와 함께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한 시애틀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진출이 결정되던 때 3승 1패. 그리고 우리의 승리가 결정 난 바로 다음 날 네 번째 승리를 기록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4승 1패. 일찌감치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뉴욕의 자랑.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월드 시리즈에서 만나는 두 팀. 뉴욕 양키스와 뉴욕 메츠의 두 섹시 가이. 데릭 지터 선수와 Jin-ho Kang 선수를 스튜디오로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재작년에도 한 번 이 자리에 모셨었는데, 그때에도 대단했습니다만, 2년 사이 한층 더 대단한 기록들을 세우셨어요.”
WCBS의 인기 캐스터 제이미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2년 전, 내가 파멜라와의 연애로 그럭저럭 이름을 알리기는 했지만 아직 전국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던 시절 인기팀인 양키스의 데릭 지터를 위주로 진행했던 방송이 2년이 지난 지금 조금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하, 저의 2년도 그리 나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더 어울리는 건 역시 Kang쪽인 것 같네요.”
“그리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니, 이거 지터씨가 너무 겸손한데요?”
지터의 너스레를 내가 가볍게 받았다. 2년 평균 215안타 18홈런 0.325/0.396/0.481을 기록한 ‘유격수’다. 고작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고 평가하기엔 너무 뛰어났다. 하지만 사회자인 제이미가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긴 Kang 선수의 올 시즌 성적이 워낙 대단하긴 하죠? 역사상 최초로 50-50. Kang 선수가 올해 기록한 홈런 숫자가 지터 선수의 3년 치 홈런 아닌가요?”
사회자의 말에 데릭 지터의 표정이 조금 울컥한다. 뭐 자기 성적이 누군가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남이 지적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일이다.
“하하,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야구가 어디 홈런만으로 하는 건가요. 그래도 제가 안타는 조금 더 꾸준했죠. 게다가 제이미씨가 깜빡하신 것 같은데 전 야수 중에서도 수비부담이 가장 큰 ‘유격수’라서요.”
“아, 그렇군요. 확실히 유격수 쪽이 중견수보다는 수비 부담이 큰 편이죠.”
물론 지터의 말처럼 유격수 쪽이 중견수보다 수비 부담이 크긴 크다.
“하하, 하지만 데릭 지터 선수의 유격수 수비와, 저의 중견수 수비는 단순히 그렇게 볼 건 또 아니라서요.”
-데릭 지터 ‘유격수의 20홈런은 외야수의 40홈런 정도 되는 가치가 있다.’-
-Kang ‘올스타급 유격수의 수비? 나의 중견수 수비는 충분히 그것과 비견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