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44화 (144/210)

# 144화.

싹쓸이(5)

마이크 무시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1등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무시나는 지난 11년간 누구보다 꾸준한 선발이었다. 322경기 164승 92패. 연 평균 203이닝, 3.49의 ERA. 동기간 그보다 객관적으로 더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는 90년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던 매덕스와 로켓, 그리고 재작년부터 홀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는 랜디 정도뿐이다.

하지만 과거의 훌륭한 성적이 지금의 암담한 상황을 바꿔줄 수는 없는 법. 무시나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향했다.

5:1

3회. 아웃 카운트는 여전히 0개. 두 개의 홈런이 무시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볼넷으로 출루한 리키 헨더슨을 둔 강진호의 2점 홈런, 그리고 피아자의 안타와 윌슨의 볼넷에 이은 에드가르도의 석 점 홈런까지. 휴식일은 충분했다. 지난 18일 시애틀과의 2차전 이후 무려 9일 만의 출전이다.

‘젠장, 너무 오래 쉬었어.’

하지만 너무 긴 휴식일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원하는 곳으로 향하지 않을뿐더러 제대로 뻗지도 않는 공들. 마이크 무시나가 두 개의 안타를 더 허용한 끝에 마운드에서 교체됐다.

-충격!! 양키스 9:1 패배!!-

-강진호 4타수 3안타 1홈런 2볼넷 압도적 승리!!-

-양키스 99년의 악몽이 또다시?-

***

“아놀드!! 아놀드 패트릭 이 자가 핵심입니다.”

“아놀드 패트릭?”

“네, 빅터 콘테가 공급하는 모든 PED의 제작자입니다. 전형적인 너드니까 조금만 압박하면 술술 다 불어댈거에요. 그리고 이쪽으로 파고 들어가서 녀석이 시인해버리면 콘테도 결국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뉴헤이븐 대학에서 화학 학사 학위를 따낸 이 천재적인 화학자는 도핑테스트가 가지고 있는 허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기존의 도핑테스트 체계는 그의 방식 앞에서는 그저 의미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래서 뭐로 잡아넣을 건데?”

“그, 그거야.”

국장의 반문에 한순간 프레드릭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다.

“부, 불법 약물 제조?”

국장이 피식 웃는다.

“그래, 뭐 그럴리는 없겠지만 녀석이 자기가 스스로 약물을 제조했음을 실토했다고 치자고. 그런데 녀석이 제작한 그 약물들이 불법이야?”

“그, 그거야······.”

국장의 말이 옳았다. 현재 아놀드 패트릭이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몇 가지 도핑 약물들인 노볼레톤과 데옥시메틸테스토스테론은 불법한 약물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 약물들은 의학용으로 판매된 적이 없었고 그런 물질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약물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예 새로운 형태의 화합물을 개발했다던데 그건 무슨 수로 잡을 거야? 애초에 샘플도 없고 유해성에 대한 조사도 나온 게 없는데. 뭐 무허가로 약품을 제조했다고 잡아넣을 거야? 증거는 있고?”

“그, 그건!!”

“핵심은 그 녀석이 아니야. 애초에 사건이 있고 이득을 본 녀석들이 존재해. 카르텔이지. 내가 너 가르칠 때 뭐라고 하던?”

“카르텔로 인해 손해를 본 자들을 공략해라? 만약 그걸로 부족하다면 카르텔 내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이득을 덜 본 녀석을 공략하라.”

국장이 프레드릭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그래, 그거지. 무작정 뛰지 말고 거기를 조금 더 쓰면서 뛰어보라고. 지금 하는 거 봐서는 후년 초까지도 무리일 것 같으니까 특별히 해주는 말이야.”

그 순간 프레드릭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쳤다.

***

월드 시리즈 2차전. 마운드의 투수가 미쳐 날뛰고 있다.

뻐엉!!

[로저 클레멘스!! 경기 11번째 삼진입니다.]

[이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 선수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난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지금 만으로 39살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한국 나이로는 지금 마흔 살이에요.]

[올해 마흔 살의 투수가 시속 157km의 공을 던집니다. 이게 바로 메이저리그에요!!]

[이런 터무니없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니 새삼 우리 강진호 선수, 박찬화 선수, 김병규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들인지 느껴집니다.]

[저 선수 올해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이 거의 확정적이죠?]

[네, 오클랜드의 마크 멀더나 시애틀의 프레디 가르시아와 제이미 모이어, 어제 선발로 나왔던 같은 팀의 마이크 무시나 같은 선수들도 대단하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양키스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는 저 로저 클레멘스 선수이니까요.]

부웅

92마일짜리 스플리터가 프레스톤의 배트를 돌려 세운다.

“스트라잌!! 아웃!!”

[아, 스윙 삼진!! 6회 말, 잔루 2루. 강진호 선수는 이번에도 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오늘 경기 2타수 1안타 1볼넷으로 멀티 출루를 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0득점입니다. 어제 그 불같던 메츠의 타선이 오늘은 너무 잠잠하군요.]

2차전. 로저 클레멘스가 8이닝 117구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바로 그 마리아노 리베라. 그의 커터가 땅볼을 양산했다.

[아, 1차전 9:1 대승을 거두며 기세를 올리던 메츠, 4:0으로 2차전을 허무하게 내줍니다.]

[이건 로저 클레멘스 선수 한 명에게 메츠가 패배했다고 봐야 할 것 같죠?]

[그렇습니다. 지난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4차전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과연 양대리그에서 가장 강력했던 투수들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메츠는 에이스가 참 아쉽습니다. 물론 제이슨 슈미트, 알 라이터, 케빈 어피어 모두 좋은 투수들이기는 합니다만 저런 절대적인 포스의 에이스라고 하기는 좀 힘들죠.]

2차전 몹시 기분 나쁜 패배였다. 바로 얼마 전, 랜디 존슨과 병규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달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팀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고작 1패에 가라앉기에 지금 우리 팀의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피아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시절 고개를 들었던 선수 간의 알력다툼 따위 연승 앞에서는 봄철 눈 녹듯이 사그라들은지 오래다.

“안녕하세요.”

“응? 윌리엄스씨?”

샤워 이후 간단한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려는 나의 발을 잡은 것은 랜스 윌리엄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소속으로 최근 배리 본즈의 약물복용을 단독보도했던 기자였다. 그의 등 뒤에는 익숙한 마크 파이나 대신 처음 보는 백인 남성이 서 있었다.

“프레드릭 닐랜드라고 합니다.”

190cm정도 돼 보이는 단단한 체격의 남성. 손에 잡힌 굳은살과 딱딱한 자세로 봐서는 기자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야기요?”

“네, 손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어차피 내일은 이동일 이었다. 같은 뉴욕팀 간의 대결인 만큼 사실상 휴식일이나 다름 없는 이동일. 잠깐 시간을 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네, 뭐 그러면 이 근처에 제가 잘 알고 있는 조용한 카페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시죠.”

***

“네? FBI요? FBI에서 대체 저를 왜?”

자리를 옮긴 곳에서 프레드릭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내 예상처럼 그의 정체는 기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연방수사국)이라니. 잠시 기억을 돌려 나의 재산을 검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걸릴만한 일은 없었다. 나는 이번 9.11을 통해 미국에서 이득을 취한 것이 전무 했다. 조금 걸리는 것이라면 9.11이후 폭락했던 몇 가지 주식들을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대량으로 구매했던 일 정도? 하지만 일체의 불법적인 루트는 없었다. 모두 정당한 세금을 지불한 활동들이다. 괜히 불법적인 활동으로 나의 명예를 실추시킬 이유따윈 없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FBI라고 해서 딱히 잘못 없는 사람을 표적 수사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뭐 Kang의 재산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활동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아, 네.”

“제가 이렇게 찾아뵌 것은 혹시 저희를 조금 도와주실 수 있겠느냐 하는 점 때문입니다.”

“도움이요?”

그 순간 나는 프레드릭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감할 수 있었다. FBI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그를 데리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윌리엄스다. 애초에 목적은 스포츠 시장을 광범위하게 잠식하고 있는 PED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프레드릭의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흐음, 의외로군요 FBI가 이런 문제까지 수사하다니. 뭔가 FBI는 조금 더 강력한 범죄들을 쫓을 줄 알았거든요. 미국 내에 알카에다 추적 같은 일 말이죠.”

“하하, 물론 그쪽으로 인력이 굉장히 많이 배정되어있긴 합니다만, 이 사건 역시 작은 사건은 아니라서요. 주의 범위를 넘어선 전국단위의 사건인지라. Kang 선수만 도와주신다면 정말 큰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죄송합니다만 그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네?”

프레드릭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나의 거절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

“동업자 정신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약물을 복용한 이들은 일종의 치터입니다. 그런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시장에서 퇴출 되는 것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길이죠.”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애초에 이들이 원하는 협조는 조용히 정보를 건네는 수준이 아니다. 조금 더 직접적인 증언, 그리고 최악의 경우 청문회나 법정에서의 증언까지를 원하는 것이다. 나를 선택한 이유는 뻔하다. 올 시즌의 MVP라는 직접적인 이득이 걸려있기 때문에 꼬시기 쉽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야구는 위험한 스포츠다. 나의 커리어는 올해가 끝이 아니고 굳이 모든 약쟁이들의 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의 거절은 프레드릭에게 묘한 상상을 가져다 준 것 같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니면 혹시······.”

“검사해보셔도 됩니다.”

“네?”

“저도 도핑을 한 게 아닌가 의심된다면 지금 당장 피 뽑고 소변 가져가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뭐, 피를 뽑는 걸로 컨디션이 저하된다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그리 예민하지 않았다. 물론 도핑선수로 의심받고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뽑아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나의 대꾸에 반응한 것은 프레드릭이 아닌 윌리엄스 쪽이었다.

“정말 뽑아가도 되겠습니까?”

“네. 대신 감염 위험 같은 것 없도록 제대로 된 연구원 데리고 와서 하셔야 합니다. 이래 봬도 몸이 재산이라서요.”

“물론입니다!!”

뭐 나로서도 밑질 것 없는 장사다. 훗날 PED에 관련된 게이트가 열렸을 때 확고하게 피해갈 수 있는 증거가 될 테니 말이다.

‘흠, 어쨌든 벌써 FBI가 수사를 시작했단 말이지. 이거 생각보다 훨씬 빨리 터지겠는데?’

본래라면 2002년 하반기에나 수사가 시작된다. 그보다 1년 가깝게 빠른 시작. 역시 나의 가벼운 힌트가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현역 선수들에게는 아무리 접근하셔도 힘들 겁니다. 은연중에 소문이 돌고 있는 건 맞는데 나서서 그걸 터트리는 건 누가 됐건 불가능합니다. 야구라는 게 생각보다 터프한 스포츠라서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또 한 번 힌트를 건넸다. 노골적인 힌트였다. FBI에서 활동할 만큼 뛰어난 인재라면 단번에 알아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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