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싹쓸이(6)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3연전. 첫 상대는 앤디 패티트. 올 시즌 성적은 200.2이닝 ERA 3.99로 리그 최고 수준이라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했지만, 어느 팀을 가건 2선발 투수 역할 정도는 너끈히 담당할만한 성적이었다.
딱!!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뚝 떨어지는 싱커볼에 피아자가 속아 넘어갔다. 빗맞은 타구가 통통통 바닥을 튕기며 데릭 지터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간다. 평균적인 유격수들의 무난한 수비. 수비 범위와 송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안 좋은 평가를 받는 지터였지만 최소한 글러브질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골드글러브급의 수비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이크 피아자 쳤습니다. 아, 하지만 이건 위험한데요? 데릭 지터, 그대로 타구 잡아서 2루에!!]
“세이프!!”
[2루에서 세입!! 세입입니다. 알폰소 소리아노 그대로 1루로.]
“아웃!!”
[강진호!! 강진호의 빠른 발이 병살타를 진루타로 둔갑시켰습니다. 와, 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우리 강진호 선수가 원래 발이 빠른 선수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바운드가 좀 많이 된 점이 컸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엔 세 번 정도 바운드 된 것 같았는데요.]
[아, 저기 리플레이 화면 나오는군요.]
[타격 직후에 크게 튕기고, 아 세 번이 아니네요. 이건 뭐 횟수를 세는게 의미 없을 만큼 많이 튕기는군요.]
[어쨌거나 아무리 공이 많이 튕겼더라도 강진호 선수의 빠른 발이 아니었다면 이건 살아나갈 수 없는 공이었죠.]
[자 이걸로 원 아웃 주자 2루. 1:1 상황에서 메츠의 역전 찬스입니다.]
[시리즈 3차전. 매우 중요한 경기입니다. 타석에는 프레스톤 윌슨, 프레스톤 윌슨이 올라옵니다.]
“젠장.”
여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 인상을 쓰고 있는 데릭 지터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내가 말 했잖아. 데릭 너 수비 엄청 별로라고. 내 수비가 골드글러브 유격수 수준인 게 아니라, 네 수비가 골드글러브 급 유격수가 아닌거라니까. 지금 네 자리에 우리 오도네즈가 있었으면 방금은 무조건 병살이었어.”
“웃기지 마. 그렇게 느린 타구를 어떻게 병살을 만든다는 거야.”
“오도네즈였으면 그 자리에서 공을 받는게 아니라 너보다 한 다섯 발자국은 더 달려 나와서 공을 잡았을걸?”
“내야 수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란다. 멍청아.”
“근데 넌 왜 그렇게 단순하게 수비하고 있는 거야?”
그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지터가 바닥을 향해 거칠게 침을 내뱉었다. 한눈에 봐도 동요한 기색이 역력하다. 타석의 프레스톤이 페티트의 공을 두들겼다. 세게 당겨친 타구가 2, 3루간을 향한다. 빠른 타구. 하지만 지터의 반응이 늦다.
[2, 3루간을 뚫어내는 빠른 타구!! 2루 주자 달립니다!!]
[좌익수 척 노블락. 달려봅니다만 늦습니다!! 강진호 3루 지나 홈까지!! 홈에서!!]
쾅!!!
“세이프!!”
홈플레이트를 막고있던 포사다를 어깨로 강하게 밀어냈다. 각종 보호장구의 무게까지 더해져 매우 무거운 포사다였지만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나의 힘을 이겨내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다. 기우뚱 넘어져 버린 조지 포사다. 척 노블락이 던진 송구가 그의 미트를 비껴갔다. 뒤로 크게 빠져버린 공. 1루에 서 있던 프레스톤이 재빨리 2루를 향해 달린다.
“세이프!!”
[아, 척 노블락의 송구 미스!! 2루 주자 강진호는 무사히 홈으로, 프레스톤 윌슨은 2루까지 진출합니다.]
[2:1 역전!! 6회 초, 팽팽하던 경기를 깨트리는 추가점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원 아웃 주자 2루. 타석에 에드가르도 알폰조가 들어섭니다.]
-메츠 3차전 4:2 승리!!-
-6회, 승부를 결정짓는 프레스톤 윌슨의 적시타-
-강진호 3타수 1안타 2볼넷. 그리고 호수비. 월드 시리즈 MVP를 정조준한다.-
-3차전 3출루 3득점. 팀의 득점 절반을 책임진 강진호의 발!!-
앞선 세 번의 경기들이 양 팀 투수의 호투, 혹은 그 호투를 뚫어내는 경기들이었다면 4차전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제이슨 슈미트, 알 라이터, 케빈 어피어라는 트로이카에 비해 4선발과 5선발이 조금 떨어지는 것처럼 양키스 역시 마이크 무시나, 로저 클레멘스, 앤디 패티트에 비해 하위 선발의 기량은 조금 부족했다.
양 팀 합계 21점을 뽑아낸 화끈한 타격전. 양팀 모두 4선발과 5선발을 연달아 투입했고 그도 모자라 아껴뒀던 불펜 투수들을 순차적으로 사용했다. 그야말로 팀과 팀의 전력이 부딪히는 싸움. 비록 선발진의 무게에서는 양키스에 비해 조금 부족한 우리들이었지만 불펜만큼은 달랐다.
-월드 시리즈 4차전 메츠 12:9 승리, 남은 것은 이제 1승뿐!!-
-양키스, 월드 시리즈 마지막 홈 경기!! 올해도 홈에서 월드 시리즈의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양키놈들이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Mystique and Aura. Appearing Nightly’
브롱스의 신비한 기운은 밤에 나타나 자신들을 가호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그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월드 시리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5차전. 1차전에서 3이닝 만에 마운드를 내줬던 마이크 무시나가 또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공을 던졌다. 계속, 꾸준하게.
딱!!
[데릭 지터!! 타구 잡아서 그대로 2루에!! 이루수 알폰소 소리아노가 1루에!!]
[더블 플레이!! 이번 경기 메츠의 네 번째 병살입니다.]
[와, 데릭 지터 선수, 오늘 정말 대단한데요? 공수 양면에서 터무니없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시나 선수의 땅볼 유도도 매우 훌륭합니다. 오늘 무시나 선수의 싱커에 메츠의 타자들이 크게 고전하고 있어요.]
물론 우리 팀의 1년 렌탈 에이스 제이슨 슈미트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제법 끈질긴 승부. 하지만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오늘 가장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양키스의 사나이. 데릭 지터였다.
딱!!
[데릭 지터!! 쳤습니다!! 양키 스타디움의 우측 담장 The short porch 을 짧게 밀어 넘기는 홈런!!]
[양키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기를 6차전으로 끌고 가는 홈런!!! 여러분 오늘 홈런의 주인공 데릭 지터가 지금 홈 플레이트를 밟았습니다. 11월의 사나이!! 데릭 지터입니다!!]
홈런이 넘어간 담장 바로 앞. 커다란 걸개 위에 Mr. November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오늘 날짜는 11월 1일. 이번 9.11로 인해 처음으로 11월까지 미뤄진 이번 월드 시리즈 5차전의 주인공이 데릭 지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5차전 양키스의 승리!! 이제 승부의 향방은 셰이 스타디움에서!!-
-경기 소감에 홈런보다 자신의 뛰어난 수비를 언급한 데릭 지터 ‘좋은 수비를 보여준 것 같아 기쁘다.’-
-6차전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지난 2차전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로저 클레멘스!! 메츠는 과연 그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로저 클레멘스, 강진호, 데릭 지터, 프레스톤 윌슨. 2001년 월드 시리즈 최고의 선수는?-
2차전 8이닝 14삼진이라는 압도적인 활약으로 우리 팀을 막아섰던 로저 클레멘스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내가 나이 먹어보니깐 29살 때랑 39살 때는 다르더라고. 아마 로켓도 오늘은 힘들어서 골골거리고 있을 거야.”
그토록 원하는 네 번째 반지까지 고작 1승밖에 남지 않았던 탓일까? 리키 헨더슨이 선수들을 격려했다. 항상 자신의 플레이에만 신경 쓰는 리키 헨더슨이었기에 저렇게 선수들을 격려하는 광경은 참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딱!!
로저 클레멘스의 슬라이더에 헨더슨의 배트가 완벽하게 밀렸다. 허공으로 떠오른 타구. 일루수인 티노 마르티네즈가 가볍게 타구를 처리했다.
[로저 클레멘스의 91마일 슬라이더!! 리키 헨더슨을 범타로 돌려 세웠습니다.]
[저 투수, 오늘도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요? 나이가 상당한데 117개나 되는 공을 던지고 불과 닷새 만에 다시 펄펄 날아다니는군요.]
[로저 클레멘스 선수 같은 경우 체격 조건부터가 딱 투수에게 가장 적절한 체격이거든요. 게다가 18년의 커리어 중 서른 초반에 보스턴에서 부상을 당했던 적을 제외하면 특별한 부상도 없어요. 내셔널리그의 랜디 존슨 선수나, 과거 놀란 라이언 선수처럼 타고난 강골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죠, 저런 강골은 결국 타고 나야 하는 거거든요. 우리 강진호 선수도 올 시즌 162경기를 모조리 소화하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아, 타석에 강진호 선수가 들어서네요. 지난 2차전 로저 클레멘스 선수를 상대로 2안타를 기록했던 강진호 선수. 비록 팀원들의 추가타가 없었던 탓에 득점을 올리지는 못했습니다만 오늘도 좋은 모습이 기대됩니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로저 클레멘스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당연한 일이다. 약쟁이들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비정상적인 회복력에 있었으니 말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로저 클레멘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90마일 후반대의 포심과 90마일을 오가는 스플리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약이라고 해도 한국 나이로 40이라는 나이는 선발투수로 시즌 내내 그 불같은 구속을 유지하기에 너무 많았다. 실제 재작년과 작년 4점대 초반의 ERA가 그것을 증명했다. 올 시즌 그가 반등한 것은 약도 약이지만 그의 레퍼토리에 강력한 슬라이더가 추가된 부분이 컸다.
딱!!
[강진호!! 이루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안타입니다. 강진호 선수 1루 지나 여유롭게 2루까지!!]
하지만 우완투수의 슬라이더란 나에게 그리 효율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물론 슬라이더를 제외해도 로저 클레멘스는 4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하는 준수한 투수다. 하지만 나는 4년만에 커리어 두 번째 MVP를 노리는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였다.
[아, 피아자에 이어 프레스톤 윌슨의 스윙 삼진!! 1회 잔루 2루. 메츠가 득점에 실패합니다.]
[이건 지난 2차전의 재탕인데요? 마이크 피아자, 프레스톤 윌슨. 두 선수 모두 로저 클레멘스의 슬라이더에 맥을 추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타자라도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거든요. 메츠, 조금 더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까지 패배하게 되면 2연패로 7차전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로 이번 시리즈를 끝낸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어야 해요.]
로저 클레멘스가 내려간 마운드. 우리 팀의 선발 투수 알 라이터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닷새간의 휴식을 가졌던 알 라이터이지만 서른다섯이라는 나이, 그리고 시즌 내내 쌓였던 피로는 그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93년과 97년 그리고 99년 월드 시리즈 승리했던 에이스급 투수다. 피곤함 속에서도 노련한 그의 피칭이 빛을 발했다.
뻐엉!!
88마일 포심 패스트볼이 존 구석 구석을 공략했다. 상대 타자의 스윙을 유도하는 속구, 그리고 변화구. 섣불리 뛰어나간 배트가 땅볼을 양산했다. 팽팽한 투수전. 그리고 4회 초. 타석에 11월의 사나이 데릭 지터가 올라왔다.
[어제 경기에서 결승홈런을 기록한 데릭 지터 선수. 앞선 타석에서는 아쉬운 플라이볼로 물러났는데요. 타구질이 상당히 좋습니다. 절대 방심할 수 없는 타자예요.]
마운드의 알 라이터가 신중하게 공을 뿌렸다. 파울, 볼, 볼, 스트라이크, 파울. 그렇게 볼카운트 2-2의 상황. 몸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속구를 데릭 지터가 그대로 받아쳤다.
[데릭 지터!! 쳤습니다!!]
잡아당긴 타구가 좌중간 담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슬아슬한 타구. 다행히 타구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가능하다.’
배트가 공을 두들기는 순간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잡고 있던 위치 역시 나쁘지 않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상당히 높게 떠오른 타구가 정점을 지나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좌중간 담장. 달리던 힘 그대로 나의 몸이 날아 올랐다.
퍼억
[강진호!! 잡아냈습니다!! 강진호 선수!! 놀라운 수비.]
[아니죠, 강진호 선수에게 저 정도는 이제 놀라운 수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일 년에도 수차례나 보여주는 강진호다운 수비가 나왔습니다!!]
[마침 카메라가 3루쪽 관중석 양키스의 팬들이 들고 온 11월의 사나이를 비추는군요. 어제 홈런을 통해 11월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은 데릭 지터 선수를 응원하는 플랜카드인데, 이거 어째 오늘은 저 11월의 사나이라는 말이 강진호 선수를 의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번 시리즈 전체적인 공헌도만 본다면 강진호 선수 쪽이 훨씬 높죠. 물론 임팩트에서는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 낸 데릭 지터 선수가 눈에 띕니다만 그래도 야구가 다섯 경기중에서 한 경기 홈런 쳤다고 공헌도가 확 올라가는 건 아니거든요.]
저 멀리 데릭 지터가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력을 다해 펜스에 부딪힌 몸이 조금 욱씬했지만 참을만하다.
‘셰이 스타디움인게 참 다행이야.’
올해가 시작되기 전 큰돈을 들여 가장 비싸고 안전한 펜스로 교체한 덕분인지 확실히 강한 충돌에도 불구하고 몸에 돌아오는 충격은 크지 않았다. 알 라이터가 언제나처럼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다. 나 역시 그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었다.
남은 것은 고작 1승. 관중석의 몇몇 줄무늬들은 눈에 거슬리지만 그래도 이곳은 우리의 홈구장 셰이 스타디움이다. 지난 99년의 압도적인 무패우승은 매우 좋았다. 하지만 이곳 셰이 스타디움, 우리의 홈구장에서 우리의 홈팬들에게 둘러 쌓인채 결정짓는 월드 시리즈 우승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남은 공격 찬스는 여섯 번. 로저 클레멘스가 그 약으로 찌든 둔중한 몸을 이끌고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