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청문회 그 이후(3)
생각보다 빠른 전개였다. 의회 청문회에 배리 본즈와 제이슨 지암비가 포함된것만 하더라도 매우 큰 성과라고 생각했었는데 버드 셀릭이 기자회견을 통해 무덤을 파주었다.
‘이거 어쩌면 05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판이 나겠는데?’
이미 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 몇몇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따갑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이 아무리 따가워 봤자 사무국 차원의 제제와 징계 그리고 감시가 없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분위기대로라면 사무국도 지금까지처럼 적당한 떡밥, 혹은 사소한 제물 정도로 유야무야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설혹 그러려고 한다고 해도 그건 내쪽에서 사양할 생각이었다.
“제프, 나한테 인터뷰 들어온 것들 있다고 했죠.”
“네. 최근 도핑 사태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나올 것 같아서 일단 킵해둔 상황입니다.”
“그거 할게요.”
“네? 정말요?”
제프 보리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당연하다. 배리 본즈의 약물에 관한 의혹은 작년부터 꾸준히 흘러나왔고 02년 MVP 2위를 기록했던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가장 큰 피해자였던 만큼 인터뷰 요청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호들갑을 떠는 것은 일부 성급한 가십성 언론들뿐. 대부분의 메이저 팬들이나 보수적인 언론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을 일종의 음모론으로 취급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봤자 그저 MVP를 한번 뺏긴 것에 억울해 징징거리는 사람 취급밖에 받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인터뷰 요청 들어온 것 중에 좀 비중 있는게 어디어디죠?”
“전국방송 4개 채널 모두 제의는 들어와 있습니다. 시간대도 대체로 괜찮고요. 리스트는 지금 바로 팩스로 보내드리죠.”
***
“오래간만이네.”
“그러게, 그런데 갑자기 웬 기자야? 원래 MC로 간 거였지 않아?”
“나도 언제까지 스포츠 쇼의 MC로 남을 수는 없잖아.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지. 원래 뉴스 앵커라는 게 기자로 좀 돌아줘야 올라갈 수 있거든.”
카트리나가 웃으며 답했다.
“그보다 우리 방송 선택해준 건 고마워. 역시 과거 인연을 생각해서인가?”
“뭐 그런 것도 있고, FOX쪽이랑 인연도 있고 겸사겸사지. 게다가 그 방송 나도 봤거든.”
“방송? 아, 이번에 버드 셀릭 기자 회견한 거 말이구나. 뭐, 그거야 자기들이 제 무덤을 판 거지. 덕분에 나는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도 나올 수 있게 됐고 말이야.”
카트리나 에반스. 98년 말, 26살로 한창의 나이이던 그녀는 이제 32살이 되어있었다. 방송인인 만큼 외모에 많은 관리를 한 덕분인지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신에서 느껴지던 그 젊음의 풋풋함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그 풋풋함이 사라진 빈자리에는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훌륭한 방송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녹화 준비 다 됐네. 그러면 잘 부탁해.”
“맡겨만 두라고. 한나 스톰양.”
“뭐야,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거야?”
26살. 아직 사랑과 육욕에 빠져 허우적댈 법도 한 나이에 제2의 한나 스톰을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떠나갔던 옛 애인. 뭐 그렇다고 특별히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군가가 그녀가 되는 것이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호 선수, 최근 경기력 향상 약물 도핑 관련 이슈로 메이저리그 전체가 시끄럽습니다. 특히 강진호 선수의 경우 가장 큰 피해자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특별히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사실 PED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금 그걸 복용한 선수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진짜 문제는 그것을 방조하는 사무국에 있습니다. 개인의 일탈에 대해서는 개인을 비난하면 되지만, 그것이 개인의 일탈을 넘어 집단 전체에 만연한다면 그것은 집단의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의미일 겁니다.”
“잠깐만요.”
카트리나가 잠시 인터뷰를 끊는다.
“진호, 이거 괜찮겠어? 발언이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뭐,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지금 나 정도면 이런 말 정도는 해도 될만한 위치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지난 몇 년의 시간동안 보였던 꾸준한 활약은 나의 입지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물론 사무국 그리고 노조까지도 나의 이런 발언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들의 그런 눈총 정도는 얼마든지 웃어넘길 힘이 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아무런 생각없이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녹화가 이어졌다.
“물론 집단의 잘못이 개개인의 잘못된 선택을 변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집단 자체가 잘못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도덕심을 촉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일 겁니다. 맥과이어씨가 말했죠. 저는 지금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러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라고요. 의미는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더 정확한 검사, 그리고 더 엄격한 패널티. 그리고 더 단호한 사무국의 태도가 있을 때만 가능할 겁니다.”
-강진호 ‘나는 지금 메이저리그의 미래를 이야기 하고 싶다!!’-
-메이저리그의 약물 문제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선 구조적 문제!! 99, 01, 03년 NL MVP Kang의 쓴소리!!-
-메이저리그 전체를 향한 날선 태도. Kang의 도를 넘어선 발언.-
-Kang ‘몇몇 선수가 아니다.’ 메이저리그 전반적으로 퍼진 약물 문제!!-
-호세 칸세코 ‘샌님이 모처럼 맞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Kang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데릭 지터 ‘Kang은 진중한 친구. 저런 이야기를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앤디 패티트 ‘부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에 나쁜 길을 선택한 것을 거듭 후회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
-배리 본즈 강진호 저격? ‘나는 PED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내가 보기엔 그것을 언급하는 누구누구가 더 그것과 연관이 깊을 것 같다.’-
-로저 클레멘스 ‘PED를 사용하는 선수들에 대해 더 강한 제제에 적극 찬성한다.’-
-박찬화 ‘LA 다저스에서 허리 부상을 입었을 당시 나는······.’-
<저 노랑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몇 년 반짝 하더니 자기가 뭐라도 된 거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거 아냐?>
<아직 빅리그에서 10년도 뛰지 않은 주제에 너무 거만한 거 같은데. 아 물론 난 위의 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야. 하지만 몇몇 선수의 일탈을 메이저 전체의 경향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Kang은 내부자잖아. 우리보다 그들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으니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각종 언론부터 인터넷까지 나의 발언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쩍했다. 당연한 일이다. 나의 저 이야기는 지금 돌출된 몇몇 약물 복용자들뿐 아니라 메이저 전체에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약물 복용과 그것을 묵인하는 사무국 전체를 저격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그 발언들 대부분이 주로 선수 개개인을 향하고 있다는 점 정도가 차이일 뿐 이미 리그 안팎에서는 강경한 발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나의 발언으로 달라진 것은 그 발언의 방향이 선수 개개인이 아닌 사무국을 향하기 시작했다는 점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몇몇 선수들의 일탈은 인정할지언정 메이저리그 전체가 그렇게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조사로도 약물 복용에 관해 밝혀진 사람들은 BALCO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몇 명에 그쳤었다. 애초에 약물을 복용한 것은 테스트를 통해 걸리는 것이 아니면 밝혀지기 지극히 힘든 법인데 메이저리그는 그 테스트 자체를 소홀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언급되는 것은 약물 공급자인 빅터 콘테가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토설한 몇몇 빅네임들뿐이다.
‘슬슬 터트려 볼까?’
-뉴욕 트리뷴 단독 특종!! 2004년 비공개 테스트 결과 일부 입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단독 특종!! BALCO사 약물 구매 명단 확보!!-
-ESPN 2004년 비공개 테스트 결과 전체 입수!! 그의 말이 옳았다!! 리그 선수 20%가량이 불법약물에 양성 반응을!! 절반이 넘는 인원이 안드로스텐다이온(2004년 금지약물 지정)복용-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뜻밖에도 내가 준비한 것 이상의 성과가 터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내가 준비한 것은 프레드릭과의 인연을 연계로 한 BALCO사의 명단이었다. 마크 파이나와 랜스 윌리엄스가 들고있던 그 자료는 적당한 시간에 그들이 터트리기로 되어있던 기사였던 만큼 약간의 대가만으로 세간에 터트릴 수 있는 자료였다. 하지만 2004년에 있었던 비공개 테스트 결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고 저것은 굳이 자극이 없더라도 몇 년 뒤 퍼져나갈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온전한 형태로 이토록 빠른 타이밍에 터진 것은 역시 현재 약물에 대한 세간의 분위기와 나의 인터뷰가 제법 큰 영향을 끼친 것이 틀림없었다.
-호세 칸세코 ‘나의 말이 옳았다. 강진호와 데릭은 역시 깨끗하다.’-
-배리 본즈 ‘저것들은 조작된 자료들에 불과하다.’-
-로저 클레멘스 ‘나는 전혀 모르는 일. 테스트 결과가 오염된 것이 틀림없다.’-
-새미 소사 ‘이것은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분명하다.’-
<빌어먹을, 개자식들!! 난 그래도 끝까지 저 자식들을 믿었는데.>
<멍청하기는, 난 이미 청문회 직후에 저 자식들 유니폼 죄다 태워버리고 인증까지 했다고. 너도 지금이라도 얼른 태워버려.>
<이 와중에 빅맥은 인터뷰 거절하고 어디 틀어박혀 있다던데? 이 망할 자식!!>
<젠장, 난 얼마 전에 이베이에서 배리 본즈의 71호 홈런볼을 15만 달러나 주고 구입했다고.>
<난 저 빌어먹을 약쟁이 놈을 쫓아내지 않는 한 자이언츠의 시즌권을 구매하지 않겠어.>
<그보다 저 자식의 2002년 MVP를 뺏어서 Kang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젠장, 저 자식들의 결백을 믿었던 내 눈을 파버리고 싶다.>
<배리 본즈 저 자식은 강진호를 되려 물고 늘어지더니 이제는 또 조작이라고 그러고있네. 저 자식은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왜들 그러는 거야? 아직 저 증거들이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난 저들의 결백을 믿어.>
<뭐? 저게 확실한 게 아니라고? 결백을 믿는다고? 왜? 가서 UFO랑 네시도 믿는다고 하지 그러냐?>
<난 UFO는 믿는데?>
그리고 마침내 내가 가장 바라던 일이 이뤄졌다.
“저희 사무국은 이번 사태의 엄중함을 새삼 깨닫고 앞으로 이런 일의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도핑과 관련된 부서를 신설할 예정이며 도핑테스트와 그에 따른 처벌 기준은 기존보다 몇 배 더 강화함은 물론이거니와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역시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테스트 형식과 처벌 기준을 말씀해주시죠.”
“시즌 중 불규칙하게 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이고 이 테스트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든 선수들이 최소한 한 번은 받게 하겠습니다. 또한, 비시즌 중에도 랜덤한 테스트는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벌 기준은 삼진아웃제도로 세 번 적발시 영구추방조치를 단행할 예정이며 처음과 두 번째 적발시에도 기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기존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조치라면?”
“최소 50경기 이상의 출전정지입니다.”
버드 셀릭의 단호한 이야기에 기자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사실상 약물을 방조해온 것이나 다름없던 사무국의 태도를 생각해볼 때 지금 이 조치는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단호한 조치였다.
“기존의 약물복용자에 대한 처벌은 혹시 없습니까?”
“그 부분은 당시의 기준에서 금지약물로 지정된 약물을 복용했다는 완벽한 증거가 추후 발견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를 부과할 예정입니다.”
“패널티라면?”
“최대 기록말소까지도 고려 중에 있습니다.”
그 순간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던 회견장 전체에 적막이 내려왔다.
‘기록말소래.’
‘맙소사,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 확실 한거야?’
‘설마, 단순히 립서비스겠지.’
‘아니야, 버드 셀릭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몰라,’
본래의 역사보다 최소 몇 년은 빠른 반응이자 동시에 본래의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경한 발언이 나왔다. 나의 예상을 완벽하게 넘어선 발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버드 셀릭이라는 커미셔너가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커미셔너인 동시에 그가 약물을 일정부분 조장한것 자체가 1994년 파업으로 망해가던 MLB의 부흥을 위해서였다는 점이 주요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1994년의 파업에 비견될만큼 막중한 사태라고 판단했다.
'기록의 말소.'
그것은 메이저리그의 긴 역사속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물론 이것으로도 메이저리그의 약물이 완벽히 뿌리뽑힌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공공연하게 약물이 허용되는 일은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관행처럼 내려오던 기나긴 약물의 그늘이 걷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