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캡틴(1)
“흠, 이걸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시작한 건 석 달 전부터입니다. 아 그런데 이번 도핑 사건 때문에 수정할 내용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저랑 리테시 둘이서 모두 수정하기에는 양도 양이고, 도저히 기간 내로 보여드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오마 미야나의 얼굴에 감탄이 스쳤다.
‘과연.’
스스로 수정할 내용이 많다고는 이야기했지만, 전체적인 방향성만큼은 뚜렷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뉴욕 메츠라는 구단의 현재 상황에 꼭 들어맞았다. 미야나는 메츠의 단장으로 했던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좋군.”
“역시!! 단장님이라면 바로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할까요?”
“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로선 이걸 승낙할 수가 없겠군.”
“네?”
오마 미야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 시간 오마 미야나와 함께 생활해온 프리드먼이 그의 제스쳐를 한 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다.
“맙소사. 단장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비록 올해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01년부터 사 년간 무려 세 번의 우승을 연달아 만든 단장님을 해임이라뇨.”
부임 직후 3연패. 메이저 역사 속에서 그 어떤 단장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물론 그 3연패를 위해 팀의 미래를 완벽하게 갈아먹었다는 평이 있긴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미래를 갈아먹지 않고 우승을 할 수 있는 팀은 없다. 본래 우승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 그렇게 갈아먹고도 우승은커녕 암흑기만 불러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오마 미야나는 너무나도 유능한 단장이었다.
“하하, 그런 게 아니야. 사실 안사람이 몸이 좋지 않아.”
“네? 사모님이요?”
“아, 물론 그것 때문에 뭐 마지막을 불사르고 떠나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런 무리를 했던 건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전히 난 당시 나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상황에서는 도박을 해보는 것이 옳았어.”
“하지만!!”
“물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고 자네 말처럼 대비하는 쪽이 훨씬 현명한 일로 판명 났지만 말이야. 어찌 됐건 이번 실패와 상관없이 내가 그만두는 것은 본래 정해진 일이었어. 이미 사표도 제출하고 왔지.”
미야나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건 자네가 직접 승인하라고.”
“네?”
“축하해. 메이저리그 최연소 단장.”
***
딱!!
“나이스 배팅.”
“일찍 나왔네?”
“좀이 쑤셔서 말이지.”
2월 말, 05시즌의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메이저 7년 차. 시즌 막판이 될 때면 너무 피곤해 휴식이 간절하다가도 다시 야구 시즌이 시작될 즈음이면 다시 또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신이 근질근질 거린다.
“그나저나 용케 남았네.”
“프리드먼이 남아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는데 뭐 별수 있나. 게다가 너도 떠날 생각 없다며.”
“뭐, 일단은. 근데 내가 떠날 생각이 없다고 떠나지 않는 건 아니지. 너도 잘 알잖아. 메이저리그.”
“그야 그렇긴 한데, 쟤들도 뇌가 있으면 널 보낼 수는 없지. 널 다른 팀으로 떠나 보내면 아마 폭동 일어날걸?”
“그거야 내가 지금처럼 계속 잘한다는 전제하에 이야기지. 당장 몇 경기만 부진해도 트레이드설이 솔솔 피어날걸?”
윈터시즌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프레스톤이 팀에 남을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다. 비록 커리어 타율은 2할 7푼이 채 되지 못했지만, 매년 40개의 홈런과 3할 후반의 출루율을 기록중인 코너외야수다. 메츠의 현재 재정으로는 너무 빠듯했다.
“어쨋든 앞으로 16년은 먹고 살 걱정은 없겠네?”
“그렇지 뭐. 설마 이런 식의 계약을 맺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8년 1억 2천만 달러. 홈디스카운트 따윈 없어 보이는 계약이다. 하지만 내실을 살펴보면 프레스톤이 상당 부분 양보한 계약이었다. 프레스톤은 계약 기간인 8년 동안 연평균 1000만 달러를, 그리고 이후 8년 동안 매년 500만 달러를 지급 받는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한다면 프레스톤이 상당히 큰 양보를 한 셈이다.
“여기 모여서들 뭐하는 거야.”
“어휴, 영감님. 올해도 뛰는 거에요? 이제 슬슬 은퇴 좀 하죠.”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새로 온 단장이 워낙에 간절히 부탁을 해놔서 말이지. 뭐 나만한 좌익수 찾는 게 힘들긴 힘들지. 게다가 나도 1500도루 마일스톤은 좀 욕심나고 말이야.”
“우와, 영감님 그건 좀 너무한 욕심 아닙니까? 그거 아직 50개쯤 남았잖아요.”
“정확히는 47개거든. 뭐 앞으로 한 2년만 더 뛰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어휴, 이제 손자가 메이저 데뷔할 나이 다된 양반이 욕심은.”
헨더슨을 필두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얼굴들도 많았다. 한때 라커룸을 양분했던 에드가르도와 벤츄라는 물론이거니와 화려한 수비로 내야를 든든하게 지키던 유격수 레이 오도네즈. 1루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토드 제일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선수단 구성이 나쁘지 않은데? 난 그 어린 자식이 새로 단장이 됐다고 해서 완전 뒤집어엎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맞아요. 뭐 나도 결국에는 내가 좀 깎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맞춰주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알이랑 옥타비오도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뭐 우리 입장에선 잘된 일이죠. 프리드먼 그 자식 직원으로 있을 때부터 느꼈지만 제법 괜찮은 녀석인 것 같아요.”
우연하게도 팀에 남은 선수들은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라고 멍청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이건 일종의 의사표시다. 프리드먼 자신의 구상에 내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물론 그렇다고해서 마냥 나와 친한 선수들을 모조리 남긴 것은 아니었다. 레이 오도네즈나 반스 윌슨 같은 친구들도 나와 무척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었지만 템파베이와 디트로이트로 각각 자리를 옮겼으니 말이다.
‘전력이 될만한 친구들을 남기면서 덤으로 나와의 친분도 고려했다 이거네.’
영리하다면 영리한 선택이었다. 이런 식으로 존중받는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애초에 같은 값이면 메츠를 떠날 생각 자체가 적긴 했다. 데뷔한 팀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마켓을 가진 구단 출신 선수만의 특권이고, 그런 의미에서 메츠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 안녕하십니까!!”
나와 5~6살씩은 차이나는 풋풋한 녀석들이 앞다투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리 팜 출신의 유망주들과 이번 트레이드를 통해 건너온 유망주들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유망주들 보다는 검증된 자원들에게 단년 혹은 2년정도의 계약을 주고 데리고 왔던 것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눈에 띄는 선수도 몇몇 보였다.
‘프리드먼은 역시 프리드먼이네. 제이슨 바틀렛이라니.’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보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성적이라고 해봐야 작년 메이저 8경기에 나와 12타수 1안타 1볼넷 0.083/0.154/0.083의 처참한 성적뿐. 뭐 AAA리그인 인터네셔널 리그에서 제법 좋은 타격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BA리포트 기준으로 상위권에 등록되지도 못한 유망주였다.
그런 제이슨 바틀렛을 5년 6천만 달러의 계약이 남은 에드가르도를 주고 받아온 것이다. 일부에서는 프리드먼이 프레스톤을 잡기 위해 에드가르도를 급하게 팔아넘긴 어리석은 딜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평가하기에 제이슨 바틀렛은 특별하다.
‘몸만 건강하다면 평균 이상의 타격과 리그 최상급의 수비를 보여줄 수 있는 유격수.’
게다가 에드가르도를 비운 선택 역시 탁월했다. 메츠의 캡틴 데이비드 라이트. 지난 2001년 드래프트를 통해 입단한 그는 마이너에서 제법 괜찮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에드가르도 알폰조라는 준수한 3루수 덕분에 메이저에서 도무지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 그가 출전한 경기라고 해봐야 고작 3경기. 하지만 프리드먼은 저 한 번의 트레이드를 통해 유격수와 3루수를 단숨에 처리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잦은 부상으로 이제는 수비마저 위태로운 레이 오도네즈를 완전하게 방출했다.
‘당장 전력만 보자면 약화 된 것 같지만, 효율적으로 길을 열었어. 역시 프리드먼이라고 해야하나.’
지극히 프리드먼 다운 교통정리였다. 현재의 올스타급 선수가 있다고 해도 그에 필적하는 재능을 지닌 유망주가 있다면 움직이는 과감함. 지금 100승을 거두는 팀이 내년에 80승을 거두게 하는것보다 지금에서 5승을 빼고 미래에 10승을 채워넣는 이런 방식의 운영은 프리드먼에게 프기꾼이라는 찬사를 붙게 만든 트레이드 방식 그대로였다.
‘그런 주제에 또 지르는 건 과감하게 지른단 말이지.’
올 시즌 고액계약을 맺은 것은 프레스톤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데릭 지터,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아메리칸리그 3대 유격수로 평가받던 노마 가르시아파라. 보스턴의 프랜차이즈였던 그는 05시즌 FA를 앞두고 보스턴과의 연봉협상에 실패하고 04시즌 도중 컵스로 트레이드됐었다. 한때 A-ROD나 데릭 지터와 비견되던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그들에 필적하는 고액의 계약을 원했지만 이미 많은 부상으로 운동능력이 떨어져 전성기의 기량을 기대할 수 없던 그에게 그런 고액의 장기계약을 안겨줄 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대로 FA재수에 들어가는가 싶었던 노마 가르시아파라에게 접근한 것은 프리드먼이었다.
‘1루수로의 컨버전을 조건으로 3년 옵션 제외 2,000만 달러. 모든 옵션 달성 시 최대 3,500만 달러’
고작 알렉스 로드리게스 1년 치 연봉에 불과한 적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FA 재수의 위기에 놓여있던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이것저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르시아파라 본인 스스로도 계속 유격수로 뛰는 것은 이제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프리드먼의 과감한 지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뻐엉!!
역동적인 자세에서 튀어나온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이 미트를 폭격했다.
“나이스 볼.”
공을 받아낸 피아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다. 올 시즌 FA 투수 최대어. 커리어 통산 6번의 올스타와 3번의 사이 영. 13년간 통산 182승 76패. 2296이닝. 2.71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2653개의 삼진아웃. 라이브 볼 시대 가장 위대한 시즌을 보냈던 사나이.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마운드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피아자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 높지 않았어?”
“아냐, 괜찮았어. 슬슬 몸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그런가? 아직 손에서 공이 좀 덜 달라붙는 느낌이라서 말이야.”
“그래?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98년 처음 그를 목격했을 때 느꼈던 떨림은 이제 없었다. 99년과 00년 그 압도적이던 포스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페드로 마르티네즈였다. 약간의 설렘을 담아 두 배터리에게 소리쳤다.
“괜찮으시면 제가 타석에 한 번 서볼까요?”
“응? 진호? 벌써 라이브 배팅을? 으음, 괜찮겠어?”
“네, 페드로씨만 괜찮다면요.”
“나야 환영이지. 리그 최고의 타자가 내 공을 점검해주겠다는데 사양할 이유야 없지.”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 팀의 캡틴과 가장 뛰어난 타자. 그리고 최고의 투수다. 연습을 하던 선수들이 슬금슬금 모여든다. 빠르게 페드로 앞으로 안전망이 설치됐다.
‘후, 3년 만인가?’
안전망 뒤편. 페드로의 두 눈이 빛났다. 그것은 점검을 바란다던 겸손한 투수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