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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53화 (153/210)

# 153화.

이름 값(1)

스프링 트레이닝의 시범경기들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뻘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몹시 눈에 띄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명백하게 성적이 잘 나오는 애들을 마이너로 내려보낼 수는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친구들 재능 만큼은 진짜배기였다. 타격이야 몇 가지 부분에서 조금 부족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운동능력과 순발력, 어깨 등의 툴이 매우 중요한 내야 수비에서 녀석들은 발군의 활약을 선보였다.

외야 역시 나쁘지 않았다. 리키 헨더슨은 분명 노쇠했지만 작년 AA에서 활약했던 래스팅스 밀리지의 재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마 헨더슨이 90경기, 밀리지가 70경기 정도를 소화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아.’

특히 고무적인 부분은 선발진이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마이크 햄튼, 알 라이터로 이어지는 상위선발라인은 비록 모두 전성기를 지나가고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리그 최정상급의 활약을 기대해볼만한 라인업이었다. 게다가 그 뒤를 따라오는 스티브 트락셀과 종운이 역시 어지간한 팀의 3선발급 활약을 기대해볼만한 투수들이었다. 내가 98년 데뷔한 이래 가장 단단한 선발진인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한 무적의 팀은 없다. 그런 팀은 남들이 1억 달러 쓸 때 혼자 2억 4천만 달러씩 쓰는 양키스 같은 팀이나 가능한 법이다. 올 시즌 우리 팀의 약점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불펜이었다. 프리드먼은 불펜 투수들을 사오는 데에는 상당히 인색했는데 이는 충분히 이닝을 먹어줄 좋은 선발진에 우선 투자하고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불펜은 젊은 투수들, 혹은 저렴한 투수들로 메워 넣겠다는 그의 생각이 엿보였다. 결과적으로 05시즌의 메츠는 신구가 조화된 야수진, 노후화됐지만 그래도 안정적이고 이름값 높은(대신 연봉도 매우 높은) 선발진. 그리고 평균연령 24세의 젊은 불펜진으로 구성됐다.

***

[메이저리그의 팬 여러분 겨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이곳 로버트 F 케네디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는 역사적인 순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1971년 워싱턴 새터너스가 텍사스로 이전한 이후 무려 34년 만에 다시 이곳 워싱턴에 메이저리그의 구단이 들어왔습니다.]

05시즌,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지금까지 몬트리올에 위치함으로 인해 캐나다의 높은 세율이나 이동 거리의 불리함 등을 껴안고 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이곳 워싱턴으로 팀을 이전한 것이다.

프레스톤이 원정팀 덕아웃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와우, 여기 생각보단 훨씬 양호한데?”

“뭐, 일단 선수들 새로 들어온다고 이런 기본적인 시설들은 적당히 리모델링 했을 테니까.”

“꼴랑 3년 쓰고 나가는 구장일텐데. 사무국이 신경 많이 썼나 보네. 뉴욕 한 복판에 있는 우리 구장이나 좀 신경 써주지. 우리 구장은 이렇게 리모델링 안하려나?”

“글쎄다. 조만간 뭔가 하지 않겠어?”

안 그래도 셰이 스타디움의 노후화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인기가 없는 팀이라면 모르겠지만 99년부터 무려 4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뉴욕팀이다. 99년만 하더라도 뉴욕에 소재한 주제에 평균 관중 수는 2만 5천 명이 채 되지 못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작년의 경우 하반기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음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관중 수 3만 2천명을 달성했다. 지은 지 40년이 넘어가는 노후화된 구장에 대한 불만이 나오지 않을 리 만무했다.

“어쨌거나 오늘 개막전인데 신나게 두들겨 보자고.”

“적당히들 하자고. 잘못해서 너무 심하게 두들겼다가 울면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간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면 또 일 년에 공짜로 해외여행 일주일씩 더 하는 거지 뭐.”

선수들간에 우스갯소리가 오간다. 뭐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상대는 워싱턴 내셔널스. 다시 말해 몬트리올 엑스포스다. 메이저 30개팀을 통틀어 최하위권의 상대. 딱히 우리가 긴장해야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나도 끼어들어 한마디 우스갯소리를 날릴만한 상황. 하지만 오늘 나의 역할은 그게 아니다.

“자자, 농담은 그쯤하고 집중하자고. 아무리 그래도 개막전, 그것도 하나의 팀이 처음 만들어지는 개막전이야. 자칫 잘못 하다가는 엉덩이 제대로 걷어차이고 절뚝거리면서 뉴욕으로 돌아가는 수가 생긴다.”

최소한 메츠의 선수단 내에서 나의 권위는 대단했다. 나의 한마디에 시끄럽던 덕아웃이 잠잠해진다. 달아오른 분위기를 깨트리는 것이 아니다. 너무 방방 떠서 방심할지도 모르는 선수들을 다잡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분위기를 살피지 못하는 친구는 있는 법. 미구엘 카이로가 나서서 한마디를 보탠다.

“에이, 지들이 워싱턴 내셔널스네 뭐네 해봐야 쟤들 결국 몬트리올인데 뭘.”

“맞아. 결국 몬트리올이지. 그런데 오늘 그 몬트리올의 선발이 리반 에르난데스인거 잊은 건 아니지?”

대차게 나섰던 미구엘이 조용히 찌그러진다. 당연하다. 몬트리올이 약팀이었다고는 해도 명색의 메이저리그 팀이었고, 그 팀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에이스급 투수는 절대 무시할만한 투수가 아니다. 올란도 에르난데스의 동생으로 유명한 리반 에르난데스는 연평균 230이닝과 150개 가량의 삼진. 그리고 평균자책점 3점 중후반이라는 성적을 기록 중인 투수였다. 빅마켓구단의 도미넌트한 에이스라고 보긴 힘들지만 그래도 중소 마켓에서는 충분히 에이스로 활용 가능한 완투형 투수. 선수들이 보이는 자신감은 좋지만 그렇다고 결코 방심해도 좋을 투수는 아니었다.

뻐엉!!

“스트라잌!!”

84마일 패스트볼이 아슬아슬한 코스를 가로질렀다. 리키 헨더슨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리키 헨더슨, 초구 지켜봅니다만 스트라이크입니다.]

[01년 말 처음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후 무려 3년째 더 메이저에서 뛰고 있는 리키 헨더슨 선수. 올 시즌 46살. 애틀랜타의 훌리오 프랑코 선수와 더불어 가장 많은 나이의 선수입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훌리오 프랑코 선수는 그 2000년에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바로 그 선수입니다. 당시에도 마흔 살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재계약을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마흔 여섯이 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사실 46살의 선수가 개막전 선발로 나온다는 건 메츠의 외야진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02년부터 벌써 외야 유망주만 몇 명이 지나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수비 범위만 보더라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요. 지금 중견수를 보고 있는 우리 강진호 선수가 역대급 수비능력을 보여주기에 티가 덜 나긴 합니다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강진호 선수가 수비 이닝에서 뛰는 걸 보면 정말 힘들어 보이거든요. 우리 강진호 선수도 이제 우리 나이로 서른입니다. 체력적으로 안배가 필요해요.]

[자 투수 2구 째. 스윙!! 스트라이크. 뚝 떨어지는 커브에 배트가 나갔습니다.]

[확실히 전성기의 리키 헨더슨을 생각하면 나오기 힘든 광경입니다. 본래 저 선수가 이런 공들을 골라내는 것에는 도사였거든요.]

리키 헨더슨이 잠시 손을 들어 타석 밖으로 나왔다. 크게 숨을 내쉬며 자세를 가다듬는 리키 헨더슨. 그가 다시 타석에 들어갔다.

딱!!

[파울!! 뒤로 빠지는 파울입니다.]

[리키 헨더슨!! 방금은 침착하게 잘 끊어냈습니다. 초구와 비슷한 코스의 공이었거든요.]

[볼카운트는 여전히 0-2. 몰린 상황입니다.]

[작년의 경우에도 강진호 선수 타점이 간신히 101타점이었어요. 189안타. 그중에 홈런만 37개였거든요. 물론 리키 헨더슨 선수가 전설적인 베테랑으로 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우리 강진호 선수와의 친분도 괜찮다고는 하지만 이제 메츠도 슬슬 더 괜찮은 리드오프를 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딱!!

[리키 헨더슨!! 쳤습니다!! 2, 3루 간으로 빠지는 땅볼 안타. 리키 헨더슨!! 2루까진 달리지 않습니다. 선두 타자 안타!! 리키 헨더슨이 4구째 몸쪽 공을 받아쳐 안타를 만듭니다.]

[자 1회 초, 노 아웃 주자 1루. 강진호 선수의 타석이 돌아왔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강진호 선수는 묘한 징크스가 있습니다.]

[아, 저도 알고있습니다. 그 홀수 해 징크스 말씀하시는 거죠?]

[네, 바로 그겁니다. 98년 데뷔해서 올해로 8년 차. 그리고 강진호 선수가 MVP를 타낸 해는 99년 01년 03년이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올해도 좀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는 않네.’

마운드에 선 리반 에르난데스의 컨디션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팀 역사의 시작이 되는 진정한 의미의 개막전 첫 마운드다. 충분히 긴장할 만하다.

1루에 나간 리키 헨더슨이 자세를 낮춘다. 무려 1453도루라는 터무니없는 숫자를 기록 중인 리키 헨더슨이다. 역대 2위의 루 브록이 19년간 기록한 도루가 938개. 아마 메이저리그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리키 헨더슨의 도루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1500이라는 숫자에 매우 욕심내고 있다. 아마 지금도 타이밍만 잡으면 달릴 것이 분명했다.

리반 에르난데스가 세트 모션에 들어갔다. 짧은 정지 동작. 그의 오른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깥쪽.’

바깥쪽 높은 코스. 공 한 개 정도 빠지는 빠른 공. 그대로 둔다고 해도 심판의 손이 절대 올라오지 않을 공이다. 하지만 배트를 멈추지 않는다. 89마일 딱 좋은 공이다.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선 만큼 거리도 충분했다.

딱!!

헨더슨의 고개가 돌아간다. 30도. 매우 좋은 타구각으로 날아가는 타구. 몬트리올, 아니 워싱턴 내셔널스의 중견수 브래드 윌커슨이 빠르게 달려간다. 미식축구 겸용 구장 특유의 넓은 외야를 높게 가로지르는 타구. 1루와 2루 사이에 서서 타구를 지켤보는 리키 헨더슨의 모습이 여유롭다.

[강진호,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쭉쭉 뻗어 나갑니다.]

[타구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강진호의 타구!! RFK 스타디움. 담장을 넘어 2층 외야에 직격합니다!!]

[05 시즌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개막전!! 강진호 선수가 첫 타석에서 초구를 받아쳐 그대로 2점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강진호 선수가 워싱턴 내셔널스 프랜차이즈의 개막전 첫 번째 경기. 첫 번째 이닝에 홈런을 선물합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 선수 홀수 시즌에 징크스가 있다고 했잖습니까.]

타구를 확인한 리키 헨더슨이 마침내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고는 나를 기다렸다. 덕아웃에서 몰려나온 동료들이 나를 격하게 환영한다. 아직 나를 서먹하게 대하는 어린 친구들 조차도 이 환영만큼은 화끈했다.

“너 인마, 내가 도루 신기록 세울까봐 그걸 못 참고 그렇게 날려버리냐?”

리키 헨더슨이 나의 목을 감으며 반쯤 진심이 담긴 농담을 걸어온다.

“어휴, 1450개면 됐지 대체 얼마나 하시려고요. 원래 기록이라는 게 뒷사람이 좀 깰 듯 말 듯 한 맛이 있어야죠.”

“이왕 1450개 돌파한 거 1500은 채워야지. 네가 다른 건 다 깨부셔도 내 도루는 절대 못깨게 하고 은퇴할테니 그렇게 알라고.”

“지금도 충분히 못 깰 것 같은 기록이거든요.”

나의 투덜거림에 리키 헨더슨이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05시즌. 프리드먼이 만들어낸 새로운 메츠가 나의 홈런으로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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