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이름 값(3)
“스트라잌!! 아웃!!”
아론 하일맨이 7개의 공으로 삼진을 하나 잡아냈다. 원아웃 주자 2루. 타석에 브라이언 슈나이더가 들어온다. 외야수들이 전체적으로 조금씩 앞으로 다가갔다. 2000년 데뷔이후 지난 5년간 커리어 출루율이 3할 3푼 장타율이 4할을 채 넘지 못하는 똑딱이다. 브라이언 슈나이더의 배트가 간결하게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적극적인 피칭. 좋은 선택이다. 장타가 거의 나오지 않는 타자를 상대로 소극적인 피칭을 할 이유는 없다. 아론 하일맨의 공이 또 한 번 존을 파고들었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세 번째 몸쪽 깊숙한 코스. 날카로운 커터가 존을 가른다. 그리고 그 순간 브라이언 슈나이더의 배트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브라이언 슈나이더!! 3구째 몸쪽 낮은 공을 그대로 퍼올립니다!!]
[빠른 타구!! 우중간 깊숙한 곳을 향해 날아갑니다.]
‘젠장.’
평소 위치였다면 무난하게 잡아낼 만한 타구. 하지만 위치가 좋지 않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달려본다. 이대로 공을 놓친다면 2루 주자는 무조건 홈으로, 브라이언 슈나이더도 2루, 어쩌면 3루까지 진루하게 될지도 몰랐다.
[강진호!! 빠르게 달립니다. 타격과 거의 동시에 달리기 시작하는 강진호!!]
[하지만 타구가 너무 깊숙합니다. 수비 위치가 좋지 못했어요.]
안 그래도 힘든 상황 바람마저 좋지 않다. 높게 뜬 타구를 밀어주는 순탄한 바람. 이건 펜스까지 직격할만한 커다란 타구다. 내가 있던 위치에서 저기까지 도착하는 것은 무조건 늦는다.
‘늦었어, 이거 홈 승부는 가능할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가 100마일이 아니라 110마일짜리 송구를 하더라도 이건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 실점은 거의 확정적인 상황.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어차피 1점 내줄 거라면.’
펜스까지는 약 10미터 가량 남은 위치에서 침착하게 몸을 돌려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평범한 플라이볼을 처리한다는 듯한 움직임.
[어? 어? 강진호 선수, 지금 타구 위치를 착각 한건가요?]
[타구, 우중간 담장!! 직격 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치 내 글러브에 공이 꼽힐 것처럼 연기한다. 그리고 타구가 나의 머리를 지나가는 그 순간 그대로 몸을 돌려 담장을 맞고 튕겨 나온 공을 낚아챘다.
‘될까?’
제 자리에서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글러브 안에서 요동치던 공은 이미 내 손아귀 안에서 잠잠하다. 실밥까지 신경 쓸 시간은 부족했다. 전신의 힘을 다해 홈으로 공을 던졌다.
[맙소사!! 강진호!! 완벽한 페이크!! 강진호 선수의 완벽한 페이크에 2루 주자 호세 비드로가 속아 넘어갔습니다.]
[호세 비드로!! 3루 지나 홈으로!!]
[강진호 홈 송구!!]
손 끝에 채인 공의 느낌이 훌륭하다. 100마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를지도. 홈플레이트 근처 피아자가 절묘한 위치에 몸을 잡고 서 있다. 조금은 위험한 위치. 멍청하게 속아넘어간 것이 어지간히 분했는지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달려드는 호세 비드로를 피아자가 완벽하게 막아선다.
조금 낮고, 우측으로 살짝 벗어나긴 했지만, 무려 90미터 밖에서 던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송구는 매우 훌륭했다. 거의 정확하게 피아자의 글러브로 틀어박힌 야구공. 호세 비드로가 피아자를 향해 어깨를 내밀었다.
콰앙!!
달려오던 힘을 그대로 실은 비드로의 공격과 장구류의 무게를 더한 피아자의 수비가 부딪혔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승부의 결과. 피아자의 뒤에 서 있던 심판이 소리쳤다.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마이크 피아자가 홈플레이트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네요. 노련한 수비!! 훌륭합니다.]
[와, 그런데 조금 전 정말 대단한 장면이 나왔어요. 지금 리플레이 화면 나옵니다.]
[저기 보시면 전 처음에 강진호 선수가 낙구 지점보다 한참 앞에서 공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 보이실 겁니다. 전 처음에 강진호 선수가 낙구 지점을 착각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여기 보시면 2루 주자 호세 비드로가 달리지를 못합니다.]
[저희야 카메라를 통해 조금 위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니 강진호 선수의 수비 위치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지만 2차원적으로 봐야 하는 호세 비드로 선수나, 워싱턴 내셔널스의 3루 코치는 다르거든요. 지금 저 사람들 눈에는 강진호 선수가 외야 플라이를 잡으려고 자세를 잡는 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저기 보시면 강진호 선수의 시선 보세요. 마지막까지 진짜 공을 잡을 것 같은 완벽한 모습입니다. 저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죠.]
[연기도 연기인데, 전 그보다 오늘 상대가 워싱턴 내셔널스, 그러니까 몬트리올 엑스포스였다는 점이 더 주요했다고 봅니다. 저 선수들 매년 강진호 선수를 6번에서 10번씩은 만나는 선수들이거든요. 7년 연속 골드글러브. 우리 강진호 선수의 수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이에요. 그러니깐 자연스럽게 강진호가 공을 잡으려고 한다? 그러면 플라이볼이겠구나. 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후로 이어진 플레이 역시 너무 대단합니다. 사실 호세 비드로 선수가 덩치에 비해 발이 그리 느린 선수가 아니에요.]
[맞습니다. 저 정도 깊은 외야 플라이면 홈까지 충분히 살아갈 만한 선수거든요. 게다가 방금 전에는 그냥 공을 잡은 플라이도 아니고 땅에 떨어진 공을 주워서 다시 던지는 시간이 걸렸단 말이죠.]
[물론 호세 비드로 선수도 당황해서인지 출발이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강진호 선수의 어깨가 아니었으면 무조건 1점을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진호, 이거 8년 연속 골드글러브 무조건 가겠는데요?]
[이번 이닝, 많은 점수를 내주면서 조금 몰리는 느낌이던 메츠였습니다만, 이런 호수비가 나오면 또 달라집니다. 원래 야구라는 게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거든요. 괜히 호수비 뒤에 빅 이닝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심판의 콜이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뱃속 깊숙한 곳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한바탕 도박이 성공한 것 같은 짜릿함. 근처에서 달려온 프레스톤이 나를 끌어안고 등을 강하게 두들긴다.
“이 미친 자식!!”
좋은 수비 덕분일까? 아니면 아론 하일맨의 어깨가 드디어 풀린 것일까. 대타로 나온 말론 버드가 2구 째 커터를 건드리며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7회 말, 길었던 워싱턴의 공격이 끝이 납니다. 점수는 7:5. 아직 메츠가 2점을 앞서고 있습니다.]
[발렌타인 감독으로서는 정말 가슴이 철렁한 이닝이었을 거에요. 뭐 7회 초 솔로 홈런만 생각하면 좋은 대타라고 볼 수도 있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제이슨 바틀렛 선수를 빼고 마쓰이 가즈오 선수를 넣는 바람에 이런 사단이 난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마쓰이 선수는 더욱더 유격수로 얼굴을 비추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 참 NPB에서는 탈아시안급의 수비라고까지 불렸던 마쓰이 선수인데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하는 것 같아서 입맛이 조금 씁쓸합니다.]
덕아웃, 동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너희 비드로 그 자식 표정 봤어? 큭큭큭, 진호 머리 뒤로 공이 넘어가는데 그 어리둥절한 표정이라니.”
“3루 코치 데이브 위페르는 어떻고. 뛰려고 하던 비드로에게 돌아가라고 하더니 Kang의 머리 뒤로 공이 넘어가는 순간 얼굴이 벌개져서 팔을 돌리는데.”
큰 점수를 내준 이닝 뒤였지만 쳐지지 않은 분위기. 덕아웃에서 패배의 향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명 덕아웃 구석에서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은 마쓰이 가즈오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봐, 괜찮아?”
“어? 어. 정말 좋은 수비였어. 거기서 페이크라니.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나도 거기서 걔들이 눈치챘으면 페이크가 아니라 아주 제대로 된 에러였을 테니까.”
“그래 봐야 주자가 2루까지 달리는 정도에서 그쳤을 텐데 뭘.”
“너도 뭐, 거기서 네가 잘 막았다고 쳐도 어차피 뒤에 2루타 나왔으니 2점 더 내준 것뿐이잖아.”
“······.”
“정, 뭐하면 나가서 한 방 더 날리던지. 7회 초에 1점 가지고 왔으니 1점만 더 가지고 오면 쌤쌤이겠네.”
나의 이야기에 마쓰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이 몇 마디가 그에게 큰 힘이 됐다던지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계기가 될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자책하는 팀원에게 격려를 건네는 것은 리더로써 당연한 일이다.
‘너도 고생이 참 많다.’
게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비 발렌타인의 선수 기용이지 거기에 휘둘리는 마쓰이가 아니다. 뭐가됐건 그는 25인 로스터 안에 들어있는, 올 시즌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야 할 우리의 동료였으니 말이다.
-강진호, 팀을 위기에서 구하는 놀라운 수비!!-
-워싱턴 내셔널스 프랜차이즈 첫 경기. 워싱턴 시민들에게 악몽을 선물한 강진호의 수비.-
-코치들까지 완벽하게 속여넘기는 강진호의 페이크!!-
-이름과 연고지를 바꿔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뉴욕 메츠, 워싱턴 내셔널스에게 9:5 승리-
-홀수 해 징크스의 실존? 강진호 개막전 4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3출루 경기. 0.500/0.600/1.250 대활약.-
-강진호 커리어 4번째 MVP를 정조준?-
-FOX 8 앵커 카트리나 에반스 ‘강진호 선수는 이대로 3년만 채우고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선수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뉴욕에서 조 디마지오의 플레이를 본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를 본 것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뉴욕 메츠 기분 좋은 출발. 시리즈 스윕 승!!-
***
“어, 그래. 뭐 바쁜데 어쩔 수 없지.”
휴대전화를 접었다. 짜증이 치민다. 성질 같아서는 휴대전화를 내동댕이 치고 싶다. 하지만 참았다. 고작 이런 일로 휴대전화를 부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헤어지자.’
뭐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녀와 내가 맞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02년 재키는 자신의 첫 주연작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최고의 스타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라는 최고의 배우 사이에서 그녀는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몇 개의 영화가 이어졌다. 뭐,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를 꼭 돕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 여자친구가 완벽하게 폭망할 영화를 선택하는 것을 지켜볼 만큼 나는 고구마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본래도 성공할만한 배우가 뛰어난 작품을 연달아 만난 결과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더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게 돼버렸다. 독점욕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할 때 내 곁에 없는 사람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내가 아직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의 얼굴만 보게 되면 그 섭섭함이 풀린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작년부터 벌써 네 번째 약속 취소.
‘이번에 만나면 진짜 헤어지는 거야.’
내가 나름의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