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시즌 투(1)
야구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수비, 그리고 화끈한 공격이다. 건실한 수비는 의외로 눈에 띄지 않는다. 나의 수비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도 시즌 내내 충실한 것보다는 가끔씩 이렇게 곡예에 가까운 수비를 성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이슨 바틀렛은 그리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 긴 시간 레이 오도네즈의 아크로바틱한 수비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 팬들에게 바틀렛의 수비는 그냥 그저 그런 유격수의 수비에 불과했다.
“저거, 감독 양아들 또 나오네. 또 나와.”
“쟨 왜 저렇게 꾸준히 나오는 거야?”
“이건 그냥 소문인데, 감독 양아들이 아니라 단장이 강력하게 밀고 있다는 말이 있어. 이번에 에드가르도 알폰소 내주고 데리고 온 녀석이잖아. 자기 트레이드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어지간히 압박 준다고 하더라고.”
“젠장, 하여간 프런트 놈들이란. 에드가르도 보낼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아니, 에드가르도를 보낸 거야 프레스톤을 붙잡고 에이스급 투수를 데리고 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치자고. 솔직히 프레스톤을 저 가격에 잡은 건 엄청나게 잘한 일이니깐. 그런데 굳이 쟤를 쓸 필요는 없잖아. 마쓰이 가즈오가 가끔 실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빠따 하나는 쟤보다 훨씬 나은데, 마쓰이를 써야지. 마쓰이를. 그게 아니면 호세 레예스를 유격수로 활용하고 마쓰이를 이루수로 써먹던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애송이를 유격수 자리에 두는 거야.”
마쓰이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우리들이 느끼는 마쓰이의 실력보다 훨씬 후했다. 개막전에 치명적인 에러를 범하기는 했지만, 마쓰이 수비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에러보다는 잘못된 포구습관으로 인한 한 박자 느린 송구였던 만큼 사람들의 눈에는 그만큼 덜 띄었다. 반면 타격은 며칠 경기를 덜 봤다고 하더라도 직관적인 스탯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만큼 눈에 확 들어왔다. 0.227/0.314/0.398의 제이슨 바틀렛과 0.276/0.331/0.421의 마쓰이 가즈오. 둘의 타격은 분명 유의미하게 차이가 났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제이슨 쪽이 더 낫단 말이지.’
지금 제이슨을 보고 있자면 터지기 직전의 간질간질한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타구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혹은 각도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충분히 살아나갈 공들이 잡히는 느낌. 반면 마쓰이의 경우 지금이 최대치라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 모든 것이 본래 역사에서 제이슨이 올스타까지 수상하는 유격수이고, 마쓰이의 경우 콜로라도라는 타자친화구장에서 간신히 이루수로 자리 잡는 선수라는 나의 고정관념때문일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이봐, 마이크. 오늘 7이닝 110개나 던졌잖아. 한참 어깨에 염증 생길 타이밍인데, 그만 마시라고.”
“진호, 내가 지금 안 마시게 생겼어? 젠장. 너도 오늘 봤잖아.”
“그래 봤지.”
특별히 에러라고 할만한 플레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선수가 마쓰이가 아닌 제이슨이였다면 충분히 타자 주자까지 잡아낼 수 있던 땅볼 플레이가 두 번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 마이크는 3.15의 평균자책점이 3.32가 되면서 패전투수가 되는 대신 2.98까지 평균자책점을 끌어내리며 승리를 챙겼을 것이다.
“마쓰이 본인도 답답해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깐 너무 그러지 말라고.”
“젠장, 누가 마쓰이한테 짜증 낸다고 생각해? 발렌타인 그 영감탱이가 짜증 나는 거라고.”
“워워, 이봐 마이크 누가 듣겠다.”
“누가 듣기는. 이거 800만 달러짜리 펜트하우스라며. 여기서 뛰어다녀도 아래층에 소음이 안 나는 집이라고 자랑할 땐 언제고.”
마이크 햄튼이 다 마신 맥주캔을 찌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 영감, 프리드먼이랑 힘 싸움하는 거 너무 뻔히 보이잖아. 젠장, 안 그래도 루키들 많아서 불안불안하구만, 난 이러려고 메츠에 온 게 아니라고.”
“워워, 이봐 마이크.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차피 이것도 잠깐이야. 너도 프리드먼이 얼마나 영리한지 잘 알고 있잖아. 알아서 잘 조정해줄 거야.”
“젠장, 그거야 미야나 단장 밑에서 일할 때의 프리드먼이지. 영리한 녀석이 결정권을 쥔 다음 멍청해지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잖아.”
마이크가 투덜거리며 두 번째 맥주캔을 뜯는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다.
“술은 맥주 한 캔만이라고 했잖아.”
“쳇, 깐깐하기는.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도망치는 거야.”
“도망은 무슨. 그냥 뜻밖에 시상식 초청으로 유럽에 간 것뿐이거든?”
마이크의 손에서 뺏은 맥주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공을 던져서 팔꿈치의 염증을 걱정하며 푹 쉬어줘야 하는 녀석과 달리 나는 내일 있을 이동일 동안 푹 쉬면 되는 야수이니 상관없을 것이다. 아마도.
***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하나 더.”
빠르게 날아드는 공을 백핸드로 받아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1루 정확한 위치로 공을 뿌린다.
뻐엉
“굿. 좋아. 아주 좋아.”
몸이 노곤해질 정도의 훈련량. NPB의 연습량이 MLB에 비해 압도적이라고는 하지만 NPB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훈련에 몰두한 적은 없었다. 지금이 시즌 중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조금 무리했다는 생각까지 들 훈련량이다.
“하나만 더.”
“이봐, 가즈오. 오늘 충분히 무리했어. 내일이 이동일이라고 해도 이쯤 하자고.”
“하나만 더 하죠. 슬슬 감이 와서 그래요. 원래 훈련이라는 건 이렇게 아슬아슬할 때 하나 더 해서 몸에 박아 넣어야 효과가 있는 겁니다.”
일본에서 데리고 온 코치, 그리고 현지의 트레이너 두 사람 모두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고용주의 말이다.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그러면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자고.”
마쓰이의 머릿속에 오늘 경기의 기억이 스쳤다. 아무도 지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팀원들의 시선이, 마운드에 서 있던 투수의 표정이 이야기 해준다. 아니 무엇보다 그 공을 처리한 마쓰이 자신이 알고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저 제이슨 바틀렛이었다면 방금 그 타구는 땅볼 아웃이었을 거라고. 고교야구 시절부터 NPB까지 공 수 주 모든 면에서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마쓰이였기에 자신의 수비가 평균 이하를 넘어 써먹지 못할 수준이라는 것은 참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뻥!!
“훌륭해. 아주 훌륭해.”
완벽한 백핸드 캐치. 그리고 강한 어깨를 활용한 완벽한 송구. 이제 연습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이미 작년부터 말이다.
‘젠장.’
실전만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몸에 익은 수비를 펼치게 된다. 혹은 백핸드로 처리할 때에도 잠시 망설이게 된다. 무의식의 레벨에 박혀버린 수비 습관. 중학생 시절부터 근 15년 이상을 박아넣은 그 습관을 고치기에 1년은 너무 짧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마쓰이가 기울였던 지난 15년간의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프리드먼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벌써 사흘째 감지 못한 머리에서 하얀 가루가 풀풀 날린다. 개막 이후 한 달간 19승 14패. 0.576의 승률이다. 그리 나쁘지 않은 승률. 하지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라는 지긋지긋한 숙적이 존재하는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에서 지구 우승을 노리기에는 부족한 승률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야수들이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팀의 야수진. 특히 내야수들에게로 몰려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올 겨울 메츠가 가장 화끈하게 트레이드했던 곳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야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팀을 구성하는 것이 프리드먼의 권한이듯 그렇게 구성된 팀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비 발렌타인의 몫이다. 바비 발렌타인이 그 구성이 마음에 안 든다고 꼬장을 부리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 봐야 그의 계약은 올해까지이며 그 계약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프리드먼 자신이다. 발렌타인은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이 힘싸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프리드먼은 그것을 재계약하기 싫다는 앙탈로밖에 보지 않고 있다.
“우선 우리 예측보다 불펜이 너무 약합니다.”
마이너에 올린 투수들, 그리고 04년 괜찮은 활약을 보였던 불펜들이 줄줄이 터져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작년과 비교해 심각하게 터지지 않았다. 단지 다른 팀 불펜들이 너무 잘 던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팀 불펜 지금 평균자책점이 4.21이잖아. 이정도면 리그 평균 이상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보다 약물 타자들에게 손해 보는 투수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O.K 뭐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 손해는 걔들만 본 건가? 우리도 봤잖아. 대체 왜 우리만 이러냐고.”
“일단 지금 분석으로는 변화구 위주의 투수들보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의 평균자책점 하락이 매우 큰데, 저희의 경우······.”
올 시즌 트레이드와 FA에서 프리드먼이 가장 신경쓴 점은 다름아닌 수비였다. 프리드먼은 현재 리그에서 가장 저평가되고 있는 스탯이 수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데릭 지터가 평균 미만의 UZR로 꾸준히 골드 글러브를 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리그는 수비에 대한 스탯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프리드먼은 그것이야 말로 제2의 출루율. 새로운 시대의 머니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는 튼튼한 내야와 외야. 그리고 그런 야수진을 활용할 수 있는 더 많은 땅볼 투수 위주로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05시즌. 현재 메이저리그의 트랜드는 삼진이었다. 몇몇 프론트 라이너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9이닝당 삼진 9개의 벽을 넘은 투수가 현재 무려 21명. 약물이 빠진 타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약했고 지난 93년 이후 꾸준히 4점 중후반대에서 머물던 리그 전체 평균자책점은 무려 12년 만에 3점대로 떨어졌다.
“불펜도 불펜이지만 발렌타인 감독이 가장 큰 문제예요.”
“맞습니다. 지금 저희가 보내주는 자료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있어요.”
“이전의 자료들과 너무 다르다는 핑계인데 이대로는 우리가 이렇게 팀을 구성한 보람이 전혀 없어집니다.”
“맞아요. 당장 우리가 보내준 자료대로 팀을 운용하기만 했어도 아마 0.1점 정도는 덜 줬을 겁니다.”
프리드먼과 그의 팀이 준비한 것은 단순히 수비능력이 좋은 야수와 땅볼을 유도할 수 있는 투수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 역시 함께 준비했다.
2003년 등장한 PTS(Pitch Tracking System). 아직 메이저리그 전체에 보급되지도 않은 이 시스템은 투수들을 분석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들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을 비롯한 그의 팀원들은 PTS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HTS(Hit Tracking System). 타자의 타구가 최종적으로 흐른 방향만이 아니라 그 타구의 속도와 각도 그리고 세기까지 모조리 분석한 이 방대한 프로그램이야말로 그들이 어느 야수의 수비가 얼마큼 더 뛰어난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되어줬으며 동시에 그들이 어느 위치에 있을 때 얼마큼 더 높은 확률로 안타를 저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됐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좋은 불펜. 그리고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현대적인 야구를 구현해줄 좋은 감독입니다.”
“이봐, 오늘 그 영감 욕을 제일 먼저 한 건 나거든? 나라고 당장 지금 그 영감이 마음에 들겠어? 그런데 알잖아. 난 이제 1년차에 변변한 실적도 내지 못한 단장이고, 너희는 그런 단장이 데리고 온 돈만 잔뜩 쳐 먹는 너드들이야. 그리고 발렌타인 영감은 9년간 우승만 4번 해낸 전에 없을 명장이라고.”
프리드먼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그의 팀원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위축은커녕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빤히 바라본다.
“아, 젠장 그렇게 보지 말라고.”
“단장, 그런 거 다 처리하라고 단장이 저희보다 10배쯤 연봉 많이 받는 거잖습니까.”
“맞아요. 그러니까 가서 우리가 머리털 빠져가면서 만든 이 자료 제대로 써먹으라고 그 영감한테 똑바로 좀 전해주라고요. 44%짜리 우승확률이 40%가 될지 50%가 될지는 이 자료에 달렸다고요.”
뻔뻔한 팀원들의 반응에 사흘째 감지 못한 프리드먼의 머리에서 하얀 가루가 또다시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