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시즌 투(3)
그 날의 ‘나이스 이닝 키드’를 기점으로 발렌타인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겼다. 뭐, 교체야 감독 고유의 권한이고, 상황에 따라 그가 마이크 햄튼에 대한 악감정으로 마운드에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아닌 그를 믿고 마운드에 내버려 뒀다고 억지로 믿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량실점을 하고 돌아온 선수에게 나이스 이닝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감독이라고 믿기 힘든 저열함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감독의 지휘에 선수들이 순순히 응할리는 만무했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나를 비롯한 팀의 베테랑들이었다. 우리는 이미 단순한 삐거덕거림을 넘어 개판 오 분 전의 콩가루가 돼버린 팀을 그럭저럭 이라도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이크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가장 큰 피해자인 마이크가 정면으로 덤벼들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유효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를 비롯한 팀의 베테랑들의 필사적인 다독임이 있건 없건 들이박을 친구들이 팀에는 넘쳤으니 말이다. 게다가 천만다행으로 좋지 않은 팀의 분위기에 비교해 승률은 그리 나쁘지 않게 유지됐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투수와 타자 간의 1:1에서 시작되는 게임이었다. 감독이 아무리 삽질을 한다고 해도 그가 정말 패배를 위해 일부러 방해하는 것이 아닌 이상 선수들의 상태가 좋다면 경기는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프로 스포츠에서 승리는 많은 것들을 묻어둘 수 있는 법이었다.
‘잘하면 이대로 이번 시즌 잘 봉합하고 갈 수도 있겠어.’
미약한 희망. 물론 바비 발렌타인은 그날 이후 한층 더 막무가내로 굴었지만 그정도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리그 우승은 몰라도 와일드카드 진출 정도는 너끈히 가능할만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주가 흘렀다. 시즌의 1/3가량이 지난 시점. 묻어뒀던 것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쉽습니다. 메츠. 5:3 패배. 이거 오늘 경기는 정말 안타깝네요.]
[오늘 전체적으로 메츠가 괜찮았거든요? 이건 그냥 단순히 운이 없다고 이야기하기에 너무 안타까운 경기였습니다.]
[오늘 메츠 잔루만 대체 몇 개였는지. 메츠 이러면 안 됩니다. 오늘 타선의 결정력이 너무 부족했어요.]
[안타가 두 자릿수인데 득점이 고작 3점이라뇨. 조금 더 집중이 필요합니다.]
[강진호 선수 오늘 2안타 2볼넷으로 무려 4출루 경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득점은 고작 1점입니다.]
[오늘 보면 피아자 선수의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습니다. 최근들어 쭉 부진하고 있는데 이건 딱 봐도 휴식이 좀 필요해 보이거든요. 하지만 지금 문제는 메츠의 포수 중에 피아자 만한 선수가 없다는 점이에요. 발렌타인 감독으로서도 참 답답할 겁니다.]
라커룸으로 돌아온 호세 레예스가 거칠게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빌어먹을!!”
특별한 경기는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바비 발렌타인은 적극적으로 작전을 지시했다. 그리고 작전이란 항상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만큼 그중 몇 개의 시도가 실패한 것. 딱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미운 놈이 무언가를 하면 더 미운 법이다. 안 그래도 감정이 좋지 않던 발렌타인의 행동이었기에 오늘의 작전 실패들은 한층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승리는 불협화음을 묻어둘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거지로 묻어둔 것들은 언제고 폭발하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호세 레예스 ‘이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대타 기용과 작전지시는 명백한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포문을 연 것은 21살의 젊은 유망주 호세 레예스였다. 지난 2년간 메츠의 팜내 1위.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던 유망주이기에 결코 적은 무게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메이저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만큼의 슈퍼스타는 아니었고 그의 발언이 전국단위로 퍼져나갈 일은 없어야 했다.
-바비 발렌타인 ‘호세 레예스는 과대평가된 애송이. 그는 메츠라는 명문에서 뛸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아이(Kid)에게 필요한 것은 유망주라고 떠받들어 주는 아첨꾼들이 아니라 따끔하게 혼내줄 어른이다.’-
이 인터뷰가 없었다면 말이다. 뭐 아직 평균 관중수 10위를 오락가락하는 팀이라고는 해도 지난 몇 년간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던 뉴욕 메츠였다. 게다가 팀내의 갈등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가십거리도 없었다. 여론, 그리고 언론의 관심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모여들었다.
-호세 레예스 ‘나를 혼낼 어른은 팀에 넘쳐난다. 하지만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것에 익숙한 누군가를 혼낼 어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것 같다.’-
-바비 발렌타인 ‘넘쳐나는 어른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야말로 뒷골을 잡게 만드는 광역 도발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인터뷰. 마침내 오래전부터 분노를 축적해온 마이크 햄튼이 입을 열었다.
-마이크 햄튼 ‘어른들이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누가 어른이 필요한지는 알 것 같다.’-
-바비 발렌타인 ‘지난 몇 년간 메츠는 훌륭한 팀이었다. 지금은? 충성스럽고 자신의 역할을 하던 어른들은 종적을 감췄다. 나는 뛸 준비가 되어있는 성숙한 이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점점 도를 더해가는 디스전. 아니 21세기 SNS를 활용한 디스전도 아니고 최소 지역언론사의 기자를 끼고 벌어지는 이 처참한 인터뷰들을 대체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아니 고작 팀의 주장으로 이런 일을 막을 수는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도를 더해가는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메츠 선수들 간의 갈등. 이제는 프런트가 움직일 타이밍이다.-
-메츠 00시즌 이후 첫 시리즈 스윕 패!!-
-도를 넘은 선수단의 방만함? 아니면 9년간 4번의 우승을 차지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지도력 부재?-
<이거 대충 봐도 강진호가 문제 아님?>
<아니 가만히 있던 우리 진호는 갑자기 왜 나옵니까?>
<작년까지 잠잠하다가 진호가 주장 달자마자 일 터졌잖아. 피아자는 하던 선수단 관리를 강진호는 전혀 못하고 있다는 소리 아님?>
<누가 보면 주장이 무소불위의 권한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애초에 이건 바비 발렌타인이 미쳐 날뛰는 건데 주장이 뭘 어떻게 커버를 친다는 거야.>
<맞아. 그리고 지금 바비 발렌타인이 저러는 것도 솔직히 선수단보다 그냥 프런트랑 싸우고 털린걸 선수단한테 화풀이 하는 거 아님?>
<누가 봐도 지금 애새끼는 바비 발렌타인이지. 자기 사달라는 장난감 안 사줬다고 마트에서 드러 누운 애새끼잖아.>
<근데 이 와중에 강진호 성적 좀 봐라. 평소에 인터뷰나 파파라치샷 나오는 것들 보면 클럽하우스에서 다른 선수들이랑 진짜 친한 것 같은데 저렇게 클럽하우스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에서 혼자 야구 잘하는 거 보소.>
<메츠 어떻게 되는지는 솔직히 관심 없고, 강진호 메츠 계약 이제 1+1년 남았는데, 이렇게 되면 있던 정도 뚝 떨어질 듯. 메츠 이제 강진호랑 연장계약은 텄네. 텄어.>
<난 솔직히 강진호 줄무늬 유니폼 입는 거 보고 싶다. 솔직히 강진호가 양키스에 있었으면 00년이랑 04년까지 쭉 반지 꼈을 거 같은데.>
<에이, 이왕 갈거면 시애틀 가서 박찬화랑 한솥밥 먹는 게 좋지 않겠음?>
<맞아, 시애틀 가면 이치로에 박찬화에 강진호까지. 이야기만 들어도 행복하네. 거기다가 김병규까지 딱!! 와주면 이건 완전 메이저리그 아시아 대표팀 아님?>
<네, 지금까지 야알못들의 장래희망 잘 들었고요. 솔직히 메츠가 지금 싸우는 애들 다 짜르면 짤랐지 강진호 내놓을 리가 있겠어? 지금 메츠 중심이 강진호인데.>
-팀내 징벌일까? 호세 레예스 3경기 연속 결장.-
-뉴욕 메츠 ‘팀내 징벌은 사실무근. 단지 호세 레예스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뉴욕 메츠 트레이드 움직임?-
-바비 발렌타인과 호세 레예스의 치열했던 설전. 호세 레예스의 트레이드로 귀결될까?-
-BA 리포트 2003년 전체 4위 호세 레예스를 노리는 구단들.-
“이런, 젠장!! 이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제가 트레이드라니.”
“그냥 헛소문일거야. 프리드먼도 생각이 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겠죠?”
레예스를 통해 내려온 이야기도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그의 트레이드설. 애써 그를 달래기는 했지만, 2010년대 한국의 기레기들도 아니고 지역신문이라고 해도 아무런 소스 없이 뇌내망상만으로 기사를 쓸 리는 만무했다.
‘젠장.’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머리가 지끈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던가?’
***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향긋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최근 재키가 빠졌다는 인도네시아쪽 음식의 향기였다.
“어? 자기!! 어서 와!!”
동글동글 귀여운 안경을 쓴 그녀가 현관 앞으로 달려왔따. 아무리 미인이라도 매일 보다 보면 얼마나 예쁜지 무덤덤해지기 마련이었지만 피차간에 바쁜 일정 때문에 뜸하기 때문일까? 이제 한국 나이로 스물넷. 한창 여성의 아름다움이 가장 화려하게 피어날 나이.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카메라 샤워를 받아온 그녀는 이전보다 한층 더 아름다웠다.
“요즘 일 때문에 신경 많이 쓰이지? 내가 맛있는 음식 준비해뒀으니까 어서 가서 먹자.”
환하게 웃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거듭되는 그녀의 약속 취소에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충만하다가도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져버리는 것은 역시 내가 그만큼 그녀에게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맛있는 식사와 어울리는 술. 그리고 오래간만에 보는 아름다운 여자친구. 오늘도 구단의 일 때문에 지끈하던 머리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어제 자기 경기 방송으로 봤어. 어제 완전 날아다니던데?”
“뭐, 그냥 그렇지.”
“역시, MVP 3회 수상자에게 MVP급 활약은 그냥 그런 거라 이건가요!!”
시끌벅쩍한 언론 보도를 통해 팀의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재키가 유달리 밝은 모습으로 나를 띄워줬다. 함께 이야기하면 즐겁고 힘이 나는 사람. 그녀의 밝은 기운이 나에게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번 올스타 브레이크 때 1박 2일로 여행 가기로 한 거 말이야. 그때는 내가 올스타전 나가는 게 확정 되야 여행 장소도 확정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었잖아. 디트로이트 근처에 세인트 클레어 호수에 괜찮은 장소가 있더라고. 거기서 놀게 되면 프레스톤이랑 피아자씨 커플도 함께 하겠다는데. 어때?”
내심 내가 올스타전에 선발되지 못할 리는 없으리라 자신하고 있었지만, 괜히 그러다 미끄러지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은 없었기에 약속 장소를 확정 짓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나의 일곱 번째 올스타전 출장이 확정됐다. 장소만 미정이었을 뿐 일정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야기 해왔었기에 별 생각 없이 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재키의 표정이 어둡다.
“그게······.”
“재키. 너 설마?”
“이번에 시나리오 들어온 게 너무 좋아서. 미안해.”
“미안해라니. 재키 너 지금 이게 대체 몇 번째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목소리. 그녀의 표정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저 미안함도 한, 두 번이다. 물론 커리어는 중요하지만 이건 한참 전에 이야기 했던 여행인 만큼 꼭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는 미팅이었을 것이다.
“자기야. 내가 정말 미안해. 충분히 화날 수 있는 것 알아. 하지만 자기도 알잖아. 여배우에게 20대 커리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애교를 부리며 들러붙는 그녀. 하지만 불과 몇 초전 좋았던 기분은 이미 사라졌다. 거듭되는 약속의 취소. 물론 그녀에게도 항상 타당한 이유는 존재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감정이 그렇지 못했다. 이미 몇 주간 스트레스로 지친 마음이다. 그 순간, 그녀가 문자로, 전화로, 가끔 이렇게 얼굴을 맞대며 약속을 취소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불뚝거렸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우리 그냥 헤어지자.”
종종 머리로 혹은 감정으로 뱉어왔던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새로웠다. 무언가 철커덕하는 느낌. 긴 인생을 통해 수많은 여자를 만나왔고 그중에는 결실이라고 하는 것을 맺은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철커덕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내가 실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아니야, 어차피 즐겁자고 하는 연애야. 안그래도 인생에 스트레스 받을 일 투성이인데 연애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하고 싶지는 않아.’
고개를 들어 눈앞의 재키를 똑바로 바라봤다. 앞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던 재키의 자세가 반듯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 방금 4년을 사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답지 않은 올곧은 자세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