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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59화 (159/210)

# 159화.

시즌 투(4)

‘싫어.’ 라니. 이건 상상을 뛰어넘은 반응이었다. 이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얘한테 이별 통보한 건 맞지? 아, 혹시 내가 헤어져 달라고 말한 게 아니라 뭔가를 부탁했나?’

내가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한 것이 맞긴 한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당당한 거절에 한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재키 지금 내가 헤어지자고 이야기한 거 맞지?”

“맞아. 그리고 다시 대답하지만, 그거 거절할게.”

잠시 머릿속에 혼란이 온다. 그러니까 이별 통보가 택배 반송하듯이 거절이 되는 거였나?

‘그럴 리가!!’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연스러웠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뻔했다.

“이봐, 재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거 권유나 상의가 아니라 통보야.”

“응, 알아. 그러니깐 거절한다고.”

마치 벽과 대화하는 것 같은 단호함.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자기가 예전에 말했었잖아.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고, 이렇게 젊고 예쁜 내가 와주겠다는데 막지 말라고.”

“아니, 재키 잠깐만. 그건 일종의 관용적 표현인데, 지금 그 말을 그런 식으로 써버리면.”

지금 내가 한 이야기가 장난으로 들린 건가? 하는 생각에 말을 이으려는 찰나 재키가 마주보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내 옆에 앉아 나의 손을 움켜쥐는 그녀.

“미안해. 난 자기를 떠날 수 없어.”

바보 같았다.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안하다 말을 건네는 그녀의 이야기 한마디에 복잡하던 감정이 싸그리 사라지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하지만 이 순간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별을 말하는 남자에게 단호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 여성을 난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내가 괴로웠던 것은 내가 그만큼 그녀를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

발렌타인 감독이 원하는 바는 뻔했다. 자신에게 정면으로 반박한 호세 레예스의 트레이드. 그리고 프리드먼이 구상하는 팀이 아닌 지금 당장 이길 수 있는 이름값 있는 선수들의 팀. 하지만 두 가지 모두 프리드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온통 저 망할 영감 편이라는 점인데.’

알려진 거라고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젋은 GM이라는 타이틀 뿐. 암흑기에 빠졌던 팀을 구원하고 지난 9년간 4번이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현 메이저리그 최고의 감독에 비해 프리드먼의 입지는 너무 미약했다.

심지어 저 발렌타인은 언론전에 매우 능숙했으며 코치진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프리드먼은 한 때 발렌타인을 경질시키고 기존의 코치중 누군가에게 감독 대행을 시킬 구상도 해봤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코치는 없었다. 9년의 세월. 스티브 필립스와 오마 미야나라는 단장을 거치는 사이 발렌타인은 메츠라는 팀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자신만의 공고한 성채를 구축해두었다.

‘Kang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

잠깐 든 생각. 하지만 프리드먼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강진호라면 바비 발렌타인보다 더 커다란 명성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 바비 발렌타인의 편을 드는 언론들도 강진호가 입을 연다면 그 방향을 달리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권한을 위해 언론전을 불사하는 감독을 몰아내기 위해 선수가 언론전을 시작한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진호는 지금 주장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나이스 이닝 키드’

저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내뱉은 감독 밑에서 여전히 그럭저럭 경기를 해내고 있는 메츠의 선수단이 그것을 증명했다. 더군다나 발렌타인이 이렇게 여론을 통해 변죽을 울려대는 동안에도 메츠의 선수 중 발렌타인의 말에 반응해 여론전에 뛰어든 선수는 고작 세 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프리드먼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저 망할 제프 윌폰을 설득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

“진호, 그냥 확 들이받아보는 건 어때?”

프레스톤이 오늘도 나에게 충동질을 시작했다.

“그래, 내가 27년째 메이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살다 살다 저런 감독은 진짜 처음이다.”

리키 헨더슨이 추임새를 넣는다.

“내가 잘 아는 기자 있는데 불러 줄까?”

휴대전화를 움켜쥔 마이크 햄튼은 아예 돗자리를 깔 기세다.

“자자, 그러지들 말고 오늘 경기에 집중하자고요. 오늘 우리 적은 휴스턴이지 바비 발렌타인이 아니잖아요.”

“내가 보기에 휴스턴은 오늘만 우리 적이지만, 바비 발렌타인은 앞으로도 쭉 우리 적인데?”

“맞아.”

동료들의 이야기에 절로 쓴웃음이 났다. 솔직히 지금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나도 심정적으로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자, 프런트 일은 프런트에게 맡기고 우린 선수답게 움직여 보자고.”

피아자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저야 선수답고 싶죠. 그런데 감독이 좀 감독다워야 제가 선수다운 게 빛을 발하죠.”

프레스톤이 불퉁하게 대꾸했지만, 그의 손에는 이미 징 스파이크가 들려있었다. 현재 선수단의 불만은 포화에 가까워진 상황이었다. 피아자 역시 선수들을 다독이고는 있지만 내심은 단체로 한번 발렌타인에게 들이박고 싶어 하는 눈치다.

‘정말 한 번 나서 볼까?’

단순히 선수단을 다독여가며 프리드먼이 사태를 해결해주길 기다리는 것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나선다고 일이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이야 야구를 하는 것은 우리이고 바비 발렌타인이 얼마나 최악의 운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단체로 행동하면 그에게 무조건 빅엿을 먹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알고 있는 바비 발렌타인은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명장이라는 점이었다.

본래의 역사에서 바비 발렌타인은 지금보다 훨씬 무능했고 훨씬 막장이었으며 명성과 입지 모두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족했지만, 그에게 반항하며 들고 일어났던 보스턴 선수단과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했었다. 하물며 지금 그의 입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드높다.

‘플러스 요인은 프런트가 우리 편이라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보스턴 선수들보다 우리가 더 낫다는 점, 그리고 나 정도인가?’

더욱이 최근 언론 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발렌타인 감독은 언론에서의 이미지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7년간 내가 MVP를 3개나 수상하며 최고의 선수로 자리를 굳혔다면 그는 9년간 올해의 감독상을 세 차례나 수상하며 최고의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일부에서는 2차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명장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은퇴이후 명예의 전당 헌정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로 받아들여 질정도다.

“자, 일단 오늘 이기고 보자고.”

“젠장, 그래 일단 이기고 보자.”

***

[최근 이런저런 이야기가 좀 많이 나오고 있는 메츠입니다만, 여전히 경기력은 나쁘지 않네요.]

[그럴수 밖에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선수들이 바뀌었습니다만, 객관적으로 선발전력은 역대 최강이고 우승의 주역이었던 어린 선수들이 이제는 전성기입니다. 강할 수밖에 없어요.]

오늘 우리 팀의 선발로 출전한 선수는 부상으로 몇 년을 허비하고 구속까지 떨어졌지만 부단한 노력과 재능으로 그것을 극복한 종운이었다.

[게다가 오늘 우리 신종운 선수가 컨디션이 참 좋거든요. 로케이션이 너무 정교합니다.]

[공들이 일정하게 바깥쪽을 공략하고 있어요. 저런 제구력이라면 90마일에 불과한 구속이라고 해도 메이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치 브레이브스의 톰 글래빈 선수를 연상케 하는 피칭을 보여주는 신종운!! 오구째!!]

부웅

“스트라잌!!”

[스윙 스트라잌!!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4이닝 동안 17명의 타자를 상대로 4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실점을 기록 중인 신종운. 이제 잠시 후 다시 메츠의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오늘 볼 좋은데?”

“내야에서 잘 막아줘서 그렇지 뭐.”

“아니 다행이다. 오늘 승 추가하면 저녁은 네가 사는 거다?”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며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 최근 들어 가장 산뜻한 경기였다. 개판을 치고있는 바비 발렌타인이었지만 이미지 관리 만큼은 철저했다. 그가 개판을 치는 순간은 선수탓을 할 수 있는 순간 뿐이다. 이렇게 초반부터 명백하게 이기고 있는 경기, 그리고 뒤집힐 느낌조차 들지 않는 경기에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제이슨 바틀렛이 고개를 푹 숙이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를 흘겨보는 바비 발렌타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따갑다. 아니 이제 메이저에 처음 올라온 친구다. 게다가 레이 오도네즈만큼 화려한 수비는 아니어도 내야에서 자기 할 몫을 충분하게 해주고 있었고, 2할 4푼의 타율은 오도네즈의 커리어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성적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이슨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이슨.”

“네, 넵!!”

난 항상 선수들에게 다정하고 싹싹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레예스 같은 녀석은 이제 슬슬 농담까지 걸어오며 내가 홈런이라도 친 날에는 헤드락까지 시도해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 녀석은 나를 대하는 자세가 딱딱했다. 한국의 수직적인 선후배관계에 익숙한 종운이보다도 더 말이다.

“어깨 피고, 어차피 타자는 타석에서 3번 중 1번만 성공해도 이기는 거야. 오늘 이제 두 번밖에 안들어갔고 아직 기회는 두 번이나 남았어. 게다가 오늘 네가 잡아낸 빠른 타구가 벌써 두 개잖아. 그정도면 넌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거야.”

“네, 넵!!”

누가 보면 군기라도 잡는 줄 알 것 같은 긴장된 응답. 더 말을 걸어봤자 괜히 애만 더 경직될 것 같아 그대로 녀석의 머리만 조금 헝크러트려주고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호세 레예스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그건 전 오늘 하나 쳤으니깐 나머지는 좀 쉬어도 된다는 말씀이죠?”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놀라운 놈이다. 내가 그렇게 외부에 헛소리 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나서 놓고는 왜 자기만 미워하냐고 빼액 거리는 똘끼. 녀석의 말에 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런 마음으로 타석에 섰다가는 금방 마이너로 다시 쫒겨날거야.”

우리 팀의 영건 4인방 가운데서 가장 올바른 데이빗 라이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선배님, 이 녀석 헛소리 상대하지 마시고 다음 타석 준비하셔야죠. 헬멧 여기 있습니다.”

“어, 그래.”

본래 역사에서 메츠의 암흑기를 홀로 지탱했던 소년가장 데이빗 라이트. 녀석의 목에 두꺼운 팔뚝이 걸렸다.

“야, 진호만 선배고 난 꿔다 논 보릿자루냐? 왜 매일 진호 녀석만 챙기는건데.”

프레스톤의 짓궂은 질문에 데이빗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얘 또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그런다. 장난이야 장난.”

프레스톤이 슬며시 데이빗의 목에 건 팔뚝을 풀었다. 그라운드 위 타석의 종운이가 방망이를 휘두른다.

‘프리드먼, 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제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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