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60화 (160/210)

# 160화.

시즌 투(5)

-05시즌 13승 페이스? 신종운 시즌 4승째 수확!!-

-7이닝 1실점 완벽한 피칭 신종운.-

-메츠 Sin ‘내야의 도움이 컸다. 무엇보다 Kang의 격려가 큰 힘이 된 것 같다.’-

-호세 레예스 5일만의 출전 4타수 1안타 1볼넷. 1득점.-

-마이크 피아자 ‘루키들 사이에 끈끈함이 생긴 것 같다. 이번 시즌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비 발렌타인 ‘평소 선수들에게 강조했던 적극적인 스윙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다. 오늘 승부는 좋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전력 보강에 관해서는 아직 1달의 시간이 남은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부족한 전력으로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생각하고 트레이드 시장이 닫히기 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우승도 노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브루클린. 월 1100달러짜리 스튜디오 형태의 허름한 아파트. 변변한 취사도구조차 없는 그 허름한 방안에 연 소득 이천만 달러의 여인과 만이천 달러의 남자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제대로 된 컵조차 없이 하나는 밥그릇, 하나는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는 남녀. 한참동안 여자의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뭐 이런 멍청한 년을 다 보냐는 듯한 눈빛으로 답했다.

“야, 이 바보 같은 지지배야. 남자가 아무리 커리어를 존중해준다고 말해도 네가 그렇게까지 하면 당연히 삐지지.”

“에이, 삐지다니. 그건 아닐거야. 진호가 얼마나 남자다운데.”

“그래, 그렇게 남자다우니까 참고 참다가 그냥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는 거잖아. 에휴. 이거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그래도 솔직히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정말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져서 뭐라고 해야될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니까.”

“너 작년부터 약속을 몇 번 취소했다고?”

앤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최근 1년 동안 무려 7번이나 약속을 취소한 것은 조금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탓이다.

“너 아무리 그래도 내 친오빠인데 너무 진호 편 드는 거 아니야?”

“흥, 악랄한 동생이랑 잘생긴 남자면 당연히 잘생긴 남자 편을 들어야지. 그래서 어떻게 헤어진거야? 헤어진거면 얼른 진호씨 번호나 좀 줘봐.”

“웃겨, 진호는 완전 스트레이트거든. 그리고 안헤어졌고, 헤어질 예정 전혀 없거든.”

“그래서 뭐 어떻게 했는데?”

“그냥 무조건 싫다고 했어. 헤어질 생각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꼭 안아주던데? 그리고 대화도 했어. 그러니까 이 정도면 일단 풀린 거 아닌가?”

“무슨 대화를 했는데?”

“그냥 앞으로는 기분 나쁜 일 있으면 그때 그때 이야기 해달라고? 그러니깐 앞으로는 그러겠다고 하더라고.”

마이클이 한숨을 내쉬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 멍청아. 진호같은 타입의 남자가 헤어지자고까지 말한거면 그건 너같은 애들이 저녁 밥 맛없다고 헤어지자고 하는거랑은 완전 다른거거든. 게다가 뭐? 앞으로는 사소한것도 다 이야기해달라고? 그 사람이 잘도 그렇게 하겠다.”

“웃겨!! 오빠가 뭐라고 나보다 진호씨를 잘 아는 척 하는 건데? 그리고 나도 저녁밥 맛 없다고 헤어지자고 한 적 없거든?”

“주니어 하이 스쿨 7학년 때 잭슨 기억 안나? 걔가 데리고 갔던 가게 음식이 맛없어서 툴툴거리다가 헤어졌잖아.”

“그것도 오빠는 모르는 복잡한 이유가 있거든!!”

“아, 됐고. 너 그 따위로 굴면 진짜 뻥 차인다. 솔직히 내 남자친구가 자기 일하겠다고 약속을 저렇게 취소했으면 난 진작에 갈아탔어.”

“하지만 우리 진호씨는 내 배우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고 그랬고 다 이해한다고 이야기 했는걸. 게다가 나도 진호씨 일정에 엄청 맞춰주고 있다고.”

“멍청한 동생아, 커리어를 인정해주는거랑 커리어 때문에 나와의 약속이 취소되는 건 다르지. 전자는 커리어도 나만큼 중요한거지만 후자는 커리어가 나보다 더 중요한거잖아!! 너 진짜 머릿 속에 뇌는 안녕 하시냐?”

“내가 고등학교때 성적은 너보다 좋았거든?”

“그러면 그 이후로 LA에서 마리화나 빨아대면서 뇌가 가출했나보지.”

“그런 거 빤 적 없거든? 진짜 박사과정 좀 밟고 있다고 잘난척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큰소리와 달리 오빠의 이야기에 불안감이 생긴 앤이 사발에 담긴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힘차게 사발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깔만큼 깠으면 어디 해결책도 좀 내놔보시지.”

“너 나한테 뭐 맡겨놨냐? 고민상담 해줬으면 됐지 해결책은 무슨 해결책이야.”

“오빠, 너 지금 이 집 집세랑 보증금 누가 내줬는지 잊은 거 같은데.”

“와, 이 지지배. 연 3.4%짜리 거치식으로 대출해준걸 내준것처럼 이야기하는거 보게.”

“그래서, 지금 당장 그거 갚을 거야?”

“동생아, 내가 봤을 때 역시 가장 좋은 건 지금까지 섭섭함을 잊게 할만한 충격적인 이벤트가 아닐까 싶어. 네가 네 커리어 만큼 진호도 아끼고 있다는 걸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이벤트 말이야.”

“그래서, 그 이벤트가 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난 니들같은 셀럽이 아니잖아. 영화 같은거 보니까 막 식당이나 배 같으거 통째로 빌려서 이벤트하던지, 오케스트라 불러다 놓고 연주시키고 막 그러더만. 너도 그런거나 하면 되겠네.”

“오케스트라?”

앤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것을 본 마이클이 황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야이, 넌 그냥 막 던진 말이랑 진담도 구분 못하냐. 그런 말도 안되는 건 멍청한 남자들이 프로포즈 할 때나 쓰는 거잖아. 그냥 적당한 선물이랑 앞으로는 그를 더 소중히 여기겠다고 사과나 하라고.”

***

“단장님, 강진호 선수 왔습니다.”

“네,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생긴것과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그 너머에 몇 달 만에 3년 정도 늙은 것 같은 프리드먼이 앉아있었다.

“녹차로?”

“아뇨, 그냥 물이요.”

약 이주 전, 레예스가 언론을 통해 사건을 터트렸을 때, 프리드먼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거기서 나는 바비 발렌타인이 마이크에게 했던 ‘나이스 이닝 키드.’에 대해 이야기 했고, 바비 발렌타인과 현재 선수단의 관계는 돌이키기 힘들 만큼 험악해졌음을 설명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쇼.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나에게 선수단의 단속을 부탁했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리그 내 위상과 이미지는 대단했다. 뭐 한국 팬들에게야 그저 나의 앞길을 막지 않는 감독. 나를 믿어주는 감독. 강진호라는 선수빨로 우승을 하는 감독 정도의 이미지였지만, 이곳 메이저에서 바비 발렌타인의 인지도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라루사리즘의 토니 라루사와 함께 2차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아마 올해까지 우승을 차지한다면 1920년대의 조상님인 조 맥그로우를 소환해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위상이다. 물론 냉정하게 실력, 그리고 커리어로 이야기한다면 그런 위대한 감독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바비 발렌타인의 언론 플레이 능력이었다. 팀의 선수들보다 담당 기자들에게 더 친절한 그는 내가 보기에 괴벨스의 화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줄충한 인물이었다. KBO의 팬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하자면 전성기 살구아재급의 커리어에 야신급의 언론장악력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그런 언론관리능력을 지닌 바비 발렌타인이었던 만큼 이슈가 터진다는 것은 점점 그에게 유리해진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안그래도 바비 발렌타인에게 몰리고 있는 프리드먼이다. 여기서 더 입지가 불리해진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끓어오른 선수단의 분위기를 달래줄 유일한 방법은 ‘바비 발렌타인의 확실한 사과. 혹은 그의 경질.’ 뿐이었다. 그리고 저 조건들은 선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저것을 이루는 방법은 오직 프런트 단위의 움직임 뿐. 물론 선수단의 단합된 움직임이 프런트를 압박, 혹은 지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프런트 자체가 감독과 싸우는 상황에서 프런트를 압박할 필요는 없었고 남는 것은 단체적인 지원뿐인데, 언론전, 특히 뉴욕단위 방송에서 이미 완벽하게 지고 들어가는 상황이다. 그냥 프리드먼의 말을 믿고 선수단 전체를 단속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것은 야구를 제외한 모든 일에 그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나의 기질 탓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런 나의 결정이 좋은 결정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죄송합니다.”

프리드먼이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제프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죄송합니다.”

“지금 발렌타인 감독으로는 힘들거라고, 그리고 그와 선수단의 관계는 이미 파탄지경이라는 점 이야기 했나요?”

“그게 지금 중요한 사업이 있다고 구단의 이미지가 망가지면 곤란하다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이유였다. 이 놈의 구단은 어떻게 된 것이 온통 암덩어리들이 가득하다. 뭐 그러니 뉴욕이라는 곳에 적을 두고, 괜찮은 중계권 계약까지 한 주제에 십수년간을 암흑기로 보냈겠지.

그나저나 제프 윌폰의 중요한 사업이라니. 그 순간 무언가가 뇌리를 번뜩였다.

“버나드....., 혹시 그 중요한 사업이 버나드라는 사람과 하는 사업 아닙니까?”

“어, 그걸 어떻게. 맞습니다. 버나드 메이도프. 월가에서 아주 대단한 입지를 다져둔 사업가라고 들었습니다.”

망할. 제프 윌폰. 이 빌어먹을 자식. 사업을 핑계로 구단이 망가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것만 해도 짜증이 나는데, 그 사업이라는 것이 고작 그것이었다니.

“그래서 생각해두신 대안은 뭡니까.”

“제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건······, 프레드로군요.”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물러난 제프 윌폰의 아버지 프레드 윌폰. 그 역시 그리 좋은 사람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최소한 그는 좋은 사업가였고 동시에 좋은 구단주가 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 구단주를 하면서 가장 성공적으로 해낸 일이 나의 국제 유망주 계약을 강행했던 일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인물이기도 했다. 프레드가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분명 나의 설득이라면 넘어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프레드가 설득한다고 제프가 순순히 넘어올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지금 제프가 움직이기 싫어하는 이유는 구단의 운영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업 때문이다. 아무리 프레드가 구단을 위해서는 발렌타인 감독의 경질이 필요함을 주장하더라도 그가 순순히 움직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구단의 정상화를 위해 발렌타인 감독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쪽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 끝은 프리드먼의 경질 쪽이겠지.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프리드먼의 얼굴에 한층 더 수심이 깃든다. 그리고 그런 프리드먼을 바라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어제 앤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기는 가끔 살 것 다 살은 노인 같아. 야구를 제외한 모든 일에 너무 수동적이야. 나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걸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난 신이 아니고 자기가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걸 모두 알 수는 없단 말이야.’

돌아온 삶에서 난 전생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살아왔다. 전생의 나는 그저 사뒀던 코인이 올라서 부자가 됐고 그 돈으로 사뒀던 건물이 올라서 갑부가 되었으며 다시 그 돈으로 구매한 건물 값이 올라가면서 성공한 부동산 사업가가 됐었다. 그에 비한다면 이번 생의 나는 충분히 적극적으로 살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복잡해지는 팀의 상황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을 쓰는 대신, 나에게 맡겨진 주장이라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불만을 이야기했더라면 어제 그녀를 잃어버릴뻔한 일이 없었을 것처럼, 지금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표정의 프리드먼을 향해 내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제프 윌폰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단 둘이서 말이죠.”

“네? 하지만!!”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만나게 해주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프리드먼. 마침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오, Kang. 요즘 경기 잘 보고 있습니다. 저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네, 제프 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발렌타인 감독에 관한 이야기라면 저도 생각 중에 있습니다. 물론 선수단과의 불화가 조금 있는 걸로 알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9년이나 팀을 잘 끌어왔고 반지를 4개나 수집한 감독을 이렇게 보내는 것은 보기 좀 그래서 말이죠.”

제프 윌폰이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능글맞게 웃는 얼굴이 참으로 재수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굳이 내가 단 둘이 만나서 하고자 한 이야기는 발렌타인 감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종국적으로 그 방향의 끝에는 발렌타인 감독의 경질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보다 혹시 폰지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폰지요?”

나의 기습적인 질문에 제프가 침착하게 자기 앞의 물컵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제법 자연스러운 모습. 하지만 이미 확신을 갖고 있는 나에게 그런 그의 모습은 당황을 숨기기 위한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폰지라면 혹시 찰스 폰지의 그 폰지 사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잘 알고 계시네요. 그게 참 재밌는 사기인 것 같아서요. 되도않는 상품으로 신규투자가들을 모으고 그 돈을 기존 투자가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신뢰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뢰로 새로운 투자가들을 모으는 방식의 사기라니.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렇게 명성과 신뢰가 만들어지는 것이 참 재밌다는 느낌이라서요.”

“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왜 폰지 사기를 이야기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아, 그냥 비유입니다. 단순한 비유요. 전 발렌타인 감독이 마치 그 폰지 사기와도 같다고 느끼거든요. 뭐 제프 씨도 잘 아시겠지만 폰지 사기는 사기꾼 외에도 초반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득을 보는 구조잖습니까. 그래서 사기인 걸 알고 있어도 초반 투자자들은 적극적으로 신규 투자자를 모집하고요.”

“그, 그렇죠.”

에어콘으로 시원한 실내, 제프 윌폰이 행거치프를 꺼내 이마의 땀을 닦는다.

“지금 발렌타인 감독의 상태는 그 폰지 사기의 끄트머리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투자가가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선 역시 사기가 들통난 사기꾼이 도망가기 전에 위약금을 지불하더라도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최선이죠.”“하하, 바비 발렌타인과 폰지 사기라니 참 재밌는 비유로군요.”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참 재밌는 비유인 것 같습니다. 아, 잔이 비었네요. 이거 드시죠.”

비어있는 자신의 물컵을 연신 들어올리는 제프 윌폰에게 나의 잔을 내밀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제프 윌폰. 그를 향해 내가 말을 잇는다.

“참, 그거 아시죠? 초기 투자자가 사기의 마지막 순간에 돈을 회수하는 것은 자신이 사기의 공범임을 밝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걸 말이죠. 그 사람이 사기꾼의 공범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손을 떼야 하는것도 말이에요.”

쿨럭

물을 마시던 제프가 입가로 물을 흘렸다. 이미 그의 행거치프는 땀으로 젖은지 오래. 근처의 티슈를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제프 씨. 저는 제프 씨가 현명한 선택을 하실거라고 믿습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할 말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제프 윌폰이 묻는다.

“저기,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말입니다만, 그 폰지 사기의 초기 투자자가 똑바로 된 행동을 한다면 그러니까, 음, 언론!! 그래 언론에서는 그를 내버려 둘까요?”

“언론이라, 글쎄요. 뭐 상황에따라 달라질테니 제가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최소한 언론의 비위에 맞는 행동을 한다면 좀 괜찮지 않을까요?”

“알겠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던 제프 윌폰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지금 그 손을 잡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

‘빌어먹을, 그 자식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이거 버나드에게 이야기 해줘야 하는 건가? 아냐, 확실한 게 아니잖아. 그냥 찔러본 걸 수도 있어. 만약 이걸 확신하고 있다면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특종인데 굳이 나에게 이렇게 찌를 이유가 없잖아.’

진호가 떠나간 자리. 제프 윌폰이 책상 앞을 서성였다. 최근 그가 버나드 메이도프라는 월가의 성공한 투자가와 집중하고 있는 사업은 일종의 폰지 사기였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현재 호황에 호황을 거듭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기가 들통날 가능성은 극도로 낮다. 게다가 이 사업에는 수많은 셀럽들을 포함해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자금이 들어와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최소한 10년, 아니 어쩌면 20년, 30년까지도 안전할 그런 ‘사업’이다.

‘그래, 그냥 우연일거야. 발렌타인 감독을 비난하고 싶어서 만든 비유가 하필 폰지였던거지.’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결론. 하지만 수억 달러 단위의 사업이다. 그것은 그의 사고력이 스스로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기 충분한 거금이었다.

‘그래도 일단 녀석이 원하는 건 해주자고. 어차피 발렌타인 감독은 올해까지만 함께 할 생각이었잖아.’

***

멍청한 제프 자식. 역시 녀석은 사업가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쓰레기였다. 본래 세상에서 윌폰 가문의 폰지사기 가담 혐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증거불충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남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은 이번 사기의 주동자 중 하나다.

‘어쨌든 말은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네.’

차를 운전해 약속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며칠 전의 일 때문인지 최근 재키는 나에게 유독 사근사근하게 굴고 있었고, 평소 집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던 그녀가 무슨 일인지 제법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외식까지 제안했다.

“응?”

퀸스에서 제법 유명한 차이니즈 레스토랑. 70석 규모의 식당이 텅 비어있다. 말 그대로 테이블까지 싹 사라진 레스토랑. 그리고 그 가운데 유일한 테이블에 재키가 혼자 앉아있었다.

“재키, 이게 뭐야?”

“자기를 위해 준비했어. 내가 자기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특별 이벤트야.”

“특별 이벤트?”

“오, 벌써 감동하긴 일러. 아직 좀 남았다고.”

감동은 무슨. 내가 느낀 감정은 당황이었다. 며칠 전 그 일이 그녀를 어지간히 불안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레스토랑을 빌리다니. 뭐 슈퍼스타라고 할만한 그녀의 수입을 생각한다면 그리 부담이 가는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시간대도 가장 붐비는 저녁시간대를 넘어 10시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식당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크게 민폐도 아닐테고 말이다.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줄지어 나오는 미국식 중국 요리들. 음식들의 맛은 괜찮았지만 그보다 대체 준비한 이벤트가 더 궁금하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것 같은 식사가 진행 될 때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이런 미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자기 몸통만한 콘트라 베이스에 첼로까지. 거기서 끝이 아니다.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의 목관들과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 튜바의 금관. 팀파니까지 등장한다. 슈퍼스타다운 스케일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관현악단을 통째로 불러오다니.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관현악단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음악이 울려퍼지고 자리에 앉아있던 재키가 일어나 나에게 다가온다.

“자기야.”

“응?”

나의 앞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는 그녀. 4년이나 만난 그녀다. 난 그녀를 충분히 알고 있기에 지금 이게 무엇일지 싸하게 느낌이 왔다. 젠장. 이건 아니다. 이상하다. 이건 그림이 매우 이상하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네모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오, 망할!!’

“우리 결혼하자.”

두번째 인생의 2막이 예상치 못한 순간 나를 기습했다.

***

“그러니깐 그런 대규모 이벤트는 프로포즈 할 때나 하는거라 이거지?”

“그래 이 멍청한 동생아. 그러니깐 적당한 걸로 하라고.”

‘프로포즈라······.’

마이클 해서웨이가 며칠전 기억을 떠올렸다.

‘와, 내 동생이지만 진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친년이었구나.’

-강진호, 앤 해서웨이 약혼 발표!!-

-충격!! 강진호의 그녀 앤 해서웨이는 누구인가!!-

-서른 살 강진호가 지금까지 만난 여인들을 살펴본다.-

-뉴욕의 연인 강진호, 이제는 헐리웃 스타 앤 해서웨이만의 연인으로!!-

모든 신문을 가득 메운 기사들. 그리고 그 기사들 틈 사이로 작게 실린 기사 하나가 보였다.

-뉴욕 메츠, 바비 발렌타인 감독 전격 경질, 차기 감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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