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62화 (162/210)

# 162화.

오직 야구(2)

감독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빠른데?’

아직 만으로 28세. 한국 나이로 해도 서른 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늦은 걸지도.’

7+1년 8300만 달러. 연 천만 달러가 넘어가는 대형 계약을 맺은 지도 벌써 육 년째다. 메이저리그가 점점 고액연봉자들에게 도루의 자제를 요청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동안 나에게 재량껏 도루하도록 허락을 해준 것이 이상한 걸지도 몰랐다.

“물론 갑자기 감독이 바뀌고 제한을 거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다시피.”

“알겠습니다.”

“응?”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알겠고, 납득했습니다.”

나의 대답을 들은 조 매든 감독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당황, 기쁨, 걱정. 그가 입을 열었다.

“이해해준다니 다행입니다.”

게다가 그린 라이트의 취소라고 해도 우리 팀의 현재 사정상 내가 도루해야 할 일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뭐, 레예스나 바틀렛이 궤도에 오른 다음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

인터넷이 온통 강진호의 결혼 소식과 감독 교체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오직 진호의 야구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한 명의 팬이 있었다. MLB Town 아이디 ‘JHlove’. MLB Town의 터줏대감. 이제는 네임드 중의 네임드 유저로 통하는 형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타자의 최고 전성기는 27세부터 31세까지. 작년이야 짝수 해에 팀 성적 엉망이었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올해까지 이러면 안 되는데.”

99년 01년 03년 세 번이나 되는 MVP 1위. 물론 그중 99년은 여러모로 운이 따랐던 해라고 치더라도 01년과 03년은 부정하기 힘든 MVP였다.

그리고 05년. 개막전 첫 타석에서 대뜸 홈런을 갈길 때만 하더라도 형석은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강진호 커리어의 정점이 찾아온 것인가 하고 감격했다. 하지만 시즌 67경기를 치른 현재 강진호의 성적은 330타석 287타수 91안타(2루타 18개 3루타 3개) 17홈런 17도루 2도루 실패 0.317/0.402/0.578로 01, 03년의 그것보다는 04년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

<01, 03년이 플루크였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되면 슬슬 가닥이 나오는데 작년 강진호가 보여준 게 강진호의 실링이라고 봐야죠. 사실 04 강진호 정도만 되더라도 MVP급이에요. 경쟁 상대들이 죄다 약을 빨아대서 상대적으로 돋보이지 않았던 게 문제였지만요.>

덕분에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저런 이야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형석으로서는 짜증이 나는 이야기다.

<플루크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거 아닙니다. 평균 성적이랑 01, 03 성적의 차이가 OPS 0.1 정도인데 이런 걸 플루크라고 표현하는 건 좀 그렇죠. 게다가 올해까지 포함해서 커리어 8년. 심지어 데뷔년 이후로 4년 차까지 꾸준히 발전해온 선수한테 플루크라뇨. 장담하는데 저건 플루크도 아닐뿐더러 강진호의 커리어 하이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02년만 보더라도 부상 전까지 성적이 점점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부상 때문에 뚝 떨어졌었어요. 작년부터 올해까지는 외적으로 좋지 않았고요. 이번에 결혼 소식도 들리고 팀도 감독 새로 선임하면서 안정되는 것 같으니 앞으로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을 겁니다.>

장문의 댓글을 달아보지만, 형석 자신도 지금 이것이 희망이 다분하게 섞인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진호가 이대로 성적을 유지하기만 해도 역대급 외야수이자 명예의 전당이 예약된 선수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01년과 03년. 그 말도 안 되는 성적을 찍으면서 2차대전 전후의 조상님들을 줄줄이 소환할 것 같던 포스가 아니라는 점은 98년 진호가 아직 주전으로 자리 잡기도 전부터 응원했던 형석에게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하긴 이제 8년 차에 성적이 저렇게 나오는데 플루크는 좀 오바죠.>

<강진호 엄청나게 오래 본 느낌인데 생각해보니 이제 8년 차네요. 생각해보면 진짜 02년 부상이 참 아쉬워요. 그것만 아니었어도 올해 300홈런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강진호 선수도 JHlove님의 응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근데 진짜 생각해보면 강진호가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전 JHlove님의 의견에 좀 동의 하는 게 강진호 같은 경우 빅리그 올라온 건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 터진 게 굉장히 빨랐거든요. 보면 기술적으로는 이미 거의 완성단계고 신체 기량만 차곡차곡 올라간다는 느낌? 그러니까 신체적으로 완성된다는 27~31살 정도 즈음에 한번 역대급 시즌 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근데 강진호가 남은 시즌 엄청 버닝해서 01년 기록했던 51홈런 넘어서 52홈런까지 쳐버리고 300-300 달성하면 역대 가장 빠른 300-300클럽 가입 아닌가요?>

<그건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 달성해도 역대 가장 짧은 기간일 거예요. 배리 본즈도 300-300클럽 가입까지 11년 걸렸어요. 뭐 애초에 300홈런이나 칠만한 타자가 도루를 저렇게 하는 경우는 진짜 드무니까요. 300-300클럽 가입자 중에서 본즈 부자 빼면 대부분 말년에 300도루 간신히 달성함.>

언제나처럼 형석의 댓글에 사람들의 응원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진호의 성적이 조금 부진하면 진호를 까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폭풍처럼 나타나는 MLB Town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이곳은 진호를 가장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를 응원하는 글에 호의적인 반응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강진호 선수, 이렇게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러니까 힘 좀 내보란 말이야.’

***

아침 11시, 야구 선수에게는 상당히 이른 아침이었다. 기분 좋은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미국 생활만 8년째. 이제는 미국식의 아침에도 충분히 적응됐다고 생각했지만,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재키?”

“벌써 일어났어? 어제도 늦게 들어왔잖아. 좀 더 자지?”

“이게 다 뭐야?”

식탁에 차려진 것은 완벽한 한식. 물론 밥과 밑반찬은 사 온 것 같았다. 하지만 된장찌개만큼은 직접 끓인 티가 완연했다.

“헤헤, 어머님이 소스랑 레시피를 보내주셔서 그대로 만들어봤어. 다른 음식 레시피들도 보내주셨는데 그건 너무 어려워 보이더라고.”

“일도 힘들 텐데 뭐 이런 걸 다했어.”

“이번 올스타전 때 함께 하지 못하잖아. 대신 앞으로 일주일 정도 시간 남으니깐 내가 원정까지 따라다니면서 챙겨줄게!!”

앞치마를 입은 채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리는 재키의 모습이 귀여웠다. 프로포즈를 받고나서 깨달은 것이었는데 난 재키가 나와의 약속을 깨트리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재키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그녀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섭섭함이었다. 그리고 그런 섭섭함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나를 절대 놓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눈녹듯이 사그라들었다.

“그래, 이번 홈 시리즈 끝나고 이동일 하루 끼어있으니깐 그 날은 데이트도 하자.”

“시즌 중인데 괜찮겠어?”

“뭐, 콜로라도면 그리 멀지 않은 동네니까. 그날 연습 해도 아마 오후에는 시간이 상당히 남을 거야.”

“O.K. 내가 그쪽에 괜찮은 가게들 조사해둘게.”

평소보다 30분 정도 이른 기상이었지만 오래간만의 한식 때문인지, 아니면 재키와의 좋은 관계 때문인지 몸은 상쾌했다.

따악!!

시원하게 날아가는 배팅 볼. 물론 단순히 멀리 날아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강하게 날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배팅 볼이 날아가는 모양 그리고 날아가는 위치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진호, 오늘 컨디션 좋아보이는데?”

“뭐, 그냥 그렇지. 프레스톤 너도 오늘 타구질 괜찮던데?”

“어휴, 안그래도 요즘 발렌타인 때문에 애들이 징징거리는 거 스트레스였는데 그거 사라지니깐 아주 살 것 같다.”

“너도 그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았어?”

“나야 뭐 특별히 터치하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라커룸 쓰는 애들이 그꼴인데 신경 안쓰이겠냐? 진호 너야 말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겠네? 주장이라서 마음 고생 꽤나 했잖아.”

“에이, 뭐 고생이랄게 있나.”

“하긴, 너야 그런 건 그런 거고, 경기는 경기였으니까. 솔직히 내가 너였으면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그런 성적 내는 건 절대 무리였을 걸?”

“그런가?”

프레스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니까. 솔직히 이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야구 하던 거 생각해보면 진짜, 난 네가 헤어진 것도 기사 보고 알았잖아. 보통 그렇게 사생활에서 문제 생기면 조금은 경기력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걸 그렇게 티를 안 내냐.”

“에이, 과장도 심하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지.”

“솔직히 그 정도였거든?”

프레스톤과 가볍게 투닥거리며 BP(Batting Practice)티켓으로 입장한 팬들에게 다가갔다.

“Kang!! 약혼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Kang. 총각파티 때 날 불러줘요. 내가 랩댄스 쳐줄 테니까.”

“하하, 재닛이라고 했죠? 제가 기억해둘 겁니다.”

“오늘 그 빌어먹을 놈들 콧대를 아주 부러트려달라고 Kang.”

“최선을 다해볼게요.”

수많은 팬이 건네는 야구공, 배트. 그리고 저지에 사인을 건넸다. 보통 티켓보다 80달러 가깝게 비싼 BP티켓으로 입장한 팬의 숫자가 이 정도라니. 확실히 메츠의 인기가 늘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원정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사용하는 사이, 덕아웃에서 선수들과 늦은 점심 식사가 시작됐다.

“오우! 오늘 메뉴 괜찮은데? 확실히 뉴욕은 뉴욕이야. 애너하임과는 나오는 메뉴부터가 다르구만.”

그리고 그사이에 우리의 새로운 감독 조 매든이 끼어있었다. 베테랑들이야 그냥 그러려니 하는 느낌으로 감독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생애 첫 메이저리그 감독을 바비 발렌타인으로 시작했고, 그나마도 험악한 분위기로 경험했던 루키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조 매든이 아직은 어색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감독님이 뭘 좀 아시는군요.”

“당연하지. 내가 또 한 미각 하거든.”

“여기 이 바비큐도 좀 드셔보세요. 이게 소스가 아주 죽입니다.”

물론 전임 감독과 아무 거리낌 없이 언론전을 벌였던 우리의 멘탈갑 호세 레예스는 조금 달랐다. 서른 살 가깝게 차이나는 조 매든 감독에게 다가가 음식을 권하는 그 모습이 기꺼웠다. 발렌타인 감독과 언론을 통해 다투던 때에는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더니 또 이런 순간에는 도움이 된다. 조 매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그의 모습에 어색해하던 루키들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특별히 대단할 것도 없는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라커룸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 한구석에 맺혀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다.

돌이켜보면 올해 2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이 야구인지 아니면 정치인지 헷갈릴 만큼 다사다난했다. 이 순간, 마침내 나는 내가 다시 야구에만 오롯하게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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