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오직 야구(3)
그의 고교 시절 성적은 그야말로 어메이징 그 자체였다. 1, 2학년 시절 준수한 수비의 유격수로 4할의 타율과 통산 31홈런이라는 리그 최고 수준의 타격을 보여주던 그는 3학년이 되던 해에 팀의 사정상 투수를 하기 시작하여 4학년 때에는 63이닝 9승 2패 ERA 0.55 118탈삼진을 기록하며 그대로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6픽으로 켄자스시티 로얄스에 드래프트 됐다.
메이저에 ‘선발 투수’로 콜업되기까지 걸린 기간 1년 2개월. 주 무기는 90마일 중후반대의 속구와 각이 큰 슬라이더. 커브와 체인지업의 완성도 역시 만만치 않았고 커맨드 역시 존 구석구석을 모조리 활용할 만큼 나쁘지 않았다. 04년 데뷔 해에 그는 켄자스 시티 로얄스의 모든 선발 중 가장 낮은 ERA와 두 번째로 많은 승수를 기록하며 호투했다. 그야말로 결점을 찾기 힘든 대형 신인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05시즌. 결점을 찾기 힘든 대형 신인 ‘잭 그레인키’의 유일한 결점이 셰이 스타디움의 그라운드 위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2, 3루 간 땅볼 타구!! 유격수 앙헬 베로아!! 공을 잡아서, 잡아서!! 1루에!!]
“세이프!!”
[세입!! 세입입니다. 앙헬 베로아의 아쉬운 수비!! 방금 글러브 안에서 공을 뽑는 게 한 박자 늦었습니다.]
[물론 글러브로 공을 잡았다고 글러브 안에서 공이 완벽히 멈춰있는 건 아닌 만큼 그래도 이건 좀 아쉬운 장면입니다. 발레리노 오마 비즈켈처럼 우아하게 공을 빼는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렇게 더듬는 건 좀 아니거든요. 앙헬 베로아, 이제 메이저 풀타임 3년 차인데 여전히 수비가 너무 아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잭 그레인키에게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1회 말 노아웃 주자 1루. 타석에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참 대단한 선수라고밖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는 선수죠. 타격, 주루, 수비.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한 선수예요. 오죽하면 3/4/5를 기록하고 있는 와중에 더 잘할 수 있는 선수가 부진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형편입니다.]
[하하, 아무래도 이미 보여준 것이 있는 선수이니까요.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겠죠.]
잭 그레인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운드에서 동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려 강진호. 그 강진호였다. 잭 그레인키 자신이 하이스쿨에 막 진학하던 때에 메이저에 데뷔하여 무려 8년째 최정상급의 타자로 군림하고 있는 사실상 현역 최고의 타자. 그레인키의 시선이 잠시 1루로 향했다. 그곳에는 초라한 늙은 주자가 서 있다. 그레인키가 태어나기도 전에 메이저에 데뷔했다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평균 이하의 타격과 평균을 간신히 상회하는 주루 플레이밖에 남지 않은 주자다.
‘잡아냈어야 했는데.’
21살, 아직 어린 나이인 그레인키의 미간에 가벼운 주름이 생겼다. 하이스쿨 2학년까지 유격수를 경험했던 그가 보기에 저 앙헬 베로아의 수비는 처참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이라도 자기가 유격수 글러브를 끼고 저 자리에 대신 서고 싶을 정도다. 앙헬 베로아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켄자스 시티 로얄스라는 팀은 전체적으로 수비가 엉망이었다. 그나마 사람 같은 수비를 보여주는 것은 오직 포수인 존 벅뿐, 나머지는 모조리 메이저의 그라운드에서 글러브를 손에 끼면 안 될 것 같은 썩을 대로 썩은 수비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전적으로 켄자스 시티 로얄스의 유망주 육성이 타격에 집중되고, 또 콜업 역시 타격 성적을 최우선으로 하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니 투수들 성적이 이 모양이지.’
물론 수비 이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던지는 투수다. 하지만 내, 외야가 모두 이 모양이어서야 저 톰 글래빈이 마운드에 올라온다고 해도 4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할 수밖에 없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둘러본 그레인키의 시선이 덕아웃의 밥 쉐퍼 감독에게 향했다. 시즌 초 8승 25패라는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방출된 토니 페나를 대신하는 임시 감독. 그의 표정이 흐리멍덩하다.
‘이번에도 아무런 지시는 없다 이거네.’
그레인키가 생각하기에 강진호를 상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볼넷이었다. 물론 그의 빠른 발은 성가시다. 하지만 선행 주자가 있는 상황이다. 만약 수비만 괜찮다면 강진호에게 볼넷을 내주고 후속 타자의 땅볼을 유도해서 병살을 끌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시 한번 그레인키의 시선이 내야수들에게 향했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오는 구성. 잭 그레인키가 야구공을 강하게 움켜쥔다.
‘역시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어.’
비록 상대는 내셔널리그 구단이었지만 투수라는 직업에 프로의식이 투철한 그레인키답게 분석은 완벽했다. 전력분석팀이 건네준 자료 외에도 에이전트에서 따로 구해준 분석 자료들까지도 이미 완벽하게 섭렵한 이후다.
‘노.’
‘노?’
홈플레이트 너머 존 벅이 그레인키의 의견을 존중했다. 평소 자신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저 어린 투수는 가끔 이렇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럴 땐 그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확률이 높다는 것을 존 벅은 지난 몇 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최소한 마운드의 저 투수는 상대 타자들에 대한 공부만큼은 존 벅 자신 이상으로 열심히 하는 학구파였으니 말이다.
‘정말 여기로?’
‘OK.’
하지만 그레인키의 선택은 그런 존 벅이라고 해도 믿기 힘들 만큼 뜻밖이었다. 그레인키의 선택은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존 벅이 의구심을 가득 담은 눈빛을 그레인키에게 보냈다.
‘이봐 그레인키, 이 녀석 강진호야. 리그에서 빠른 공을 가장 잘 쳐 내는 타자.’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강진호가 초구에 스윙하는 건 4할이 채 되지 못하고 그나마도 느린 공에 반응하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우선 가장 빠른 공으로 볼카운트를 잡고 시작하는 쪽이 가장 유리합니다.’
하지만 그레인키의 표정은 굳건했다. 결국 존 벅의 몸이 한걸음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투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좋은 포수다. 그것을 본 잭 그레인키의 얼굴에 살짝 보조개가 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잭 그레인키 자신의 공을 던지는 것뿐.
타석에 선 남자가 주는 압박감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가장 좋은 공을 던지는 것이다. 잭 그레인키의 오른손에서 그가 던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속구가 출발했다. 96마일의 구속. 횡 무브먼트가 리그 평균보다 0.7인치 더 큰 최고의 속구였다.
그리고 정확히 0.3초의 시간이 흘렀다. 잭 그레인키의 시선에 타석에 서 있던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양대 리그를 통틀어 가장 무서운 타자. 그의 몸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
마운드 뒤편에 잭 그레인키가 서 있다. 작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4위. 언젠가는 매우 위대해질 투수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투수도 아직은 21살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그의 앳된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마치 무언가 결심했다는 얼굴로 마운드에 섰다. 몇 차례 고개를 휘휘젓던 잭 그레인키가 어설픈 미소와 함께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표정. 그의 손에서 누런 공이 날아들었다.
‘몸 쪽 높은 코스.’
또렷하게 보이는 공의 궤적.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수박만큼 커다란 공에 실밥까지 똑똑히 보였다. 이런 쉬운 공을 그냥 보내는 건 역시 예의가 아니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공을 두들겼다
딱!!
[쳤습니다, 강진호!! 강한 스윙. 잭 그레인키의 96마일 몸쪽 공을 그대로 받아칩니다.]
[우측 강한 타구!! 그대로 담장을!!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강진호, 1회 초 2점 홈런!! 강진호가 2주일 만에 또다시 홈런을 추가하면서 시즌 18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사실 강진호 선수의 스타일이 공을 좀 지켜 보는 스타일이잖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구를 함부로 넣을 수 없는 것이 종종 이렇게 초구에 적극적으로 스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이번 시즌 두 번째 초구 홈런입니다.]
[그보다 전 강진호 선수의 배트 스피드가 새삼 놀랍게 느껴집니다. 방금 보시면 96마일 빠른 공, 그것도 몸쪽 높은 코스의 공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거의 대놓고 받아 치는 느낌으로 넘겨버렸습니다.]
[감독의 교체로 팀이 뒤숭숭한 상황에서 리키 헨더슨과 강진호 두 베테랑이 듬직하게 팀을 이끌어가는 모습입니다. 뉴욕 메츠. 역시 21세기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 답게 저력이 있습니다.]
[베테랑이 저렇게 듬직하게 끌어주면 신인들도 힘을 낼 수밖에 없거든요. 이제 시즌이 100경기 정도 남았는데, 메츠 올 시즌도 충분히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끝의 느낌이 좋았다. 잠시 방망이를 내리고 타구가 날아가는 방향을 살핀다. 넘어가는 공이다. 1루를 향해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광판 96이라는 숫자가 조금 놀랍다. 방금 그 공이 저렇게 빠른 공이었다니.
‘그렇게 빠른 것 같진 않았는데 말이야.’
느낌상으로는 제구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손에서 공이 조금 빠진게 아니었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가볍게 베이스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언제나와 같은 선수들의 축하. 호세 레예스 녀석이 달려와 나를 끌어 안았다.
“캡틴!! 멋있는데?”
그런 레예스를 손바닥만 한번씩 치고 지나간 제이슨 바틀렛과 데이비드 라이트가 부럽게(?) 바라본다.
‘짜식들이.’
귀여운 막내동생, 혹은 조카정도 되는 아이들을 보는 느낌으로 녀석들의 머리를 가볍게 헝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예스가 자신의 머리를 들이민다. 이 자식 아무리 생각해도 난놈은 난놈이다.
조 매든 감독이 특별하게 한 일은 없었지만 마치 팀 자체가 달라진 것처럼 경기가 술술 풀려나갔다. 확실히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만으로도 감독이 해야 할 역할의 절반은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옳게 느껴진다.
3회 말, 두 번째 타석. 마운드에는 여전히 잭 그레인키가 서 있었다. 1회 말에 비해 확연하게 몰린 모습. 나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들이미는 우리 팀 루키들 또래에 불과한 잭 그레인키다. 어린 나이에 한 팀의 실질적 에이스 자리를 담당하고 있는 부담감이 힘겨워 보였다.
‘게다가 수비가 저 모양이면 딱히 에이스가 아니더라도 멘탈 부서질 만하지.’
잭 그레인키의 와인드 업. 심리적으로 몰려있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잘 던지려고 한 탓일까? 그의 공이 코스를 크게 벗어났다.
뻐엉
볼카운트 1-0.
나의 두눈이 전광판으로 향했다.
97
‘이게 97마일이었다고?’
문득 경기 전 있었던 프레스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야 스트레스는 스트레스고, 경기는 경기니까. 넌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딱히 시합에 지장을 받지 않잖아.’
면전에다 대고 동의하진 않았지만 사실 프레스톤의 말에 나도 어느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시합에 들어서서는 오직 시합에 집중하는 프로선수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작년 팀의 부진, 그리고 올해 팀내의 복잡한 상황이라는 스트레스 속에서도 꾸준했던 나의 성적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정신적 부담감에서 해방된 나는 나 스스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타자였다.
마운드의 잭 그레인키가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의 손에서 출발하는 야구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똑똑하게 보였다.
딱!!
1회에 이어 셰이 스타디움 중앙 붉은 사과가 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3회 말!! 강진호의 솔로 홈런포!! 강진호가 1회에 이어 연타석 홈런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