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오직 야구(4)
대기 타석에서 기다리던 피아자가 홈런을 치고 힘차게 내야를 한 바퀴 돌아 들어오는 진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을 보는 것도 벌써 8년째로군.’
처음 볼 때만 하더라도 재능 넘치는 동양인 아이에 불과했다. 녀석의 나이가 21살이라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러던 녀석이 어느새 28살. 이제는 제법 관록 있는 타자로 변신해있는 모습이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짜악
진호와 힘차게 손바닥을 부딪치고 타석으로 걸어 나간다. 그의 주변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병아리들이 귀엽다. 마치 8년 전 자신을 바라보던 녀석을 보는 것 같다. 8년의 세월이란 놀라워서 야구선수라고 하기에 조금 메말랐던 녀석이 어느새 듬직한 사내의 몸으로 변해 있었다. 저 듬직함이 있었기에 녀석에게 주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부담 없이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비록 이번 시즌, 미쳐버린 감독이라는 1년 차 주장이 해결하기에, 아니 애초에 한 명의 선수가 해결하기에 버거운 짐이 그를 덮쳤지만 진호는 그 무거운 부담감을 비교적 무난하게 감당했다. 어쩌면 진호는 피아자 자신보다 더 캡틴이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선수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셰이 스타디움도 햇수로 벌써 8년이로군.’
고작 총액 1,000만 달러의 견해 차이로 상의조차 하지 않은 채 자신을 트레이드 시켰던 다저스에서 플로리다를 거쳐 이곳 뉴욕 메츠에 자리를 잡은 지도 벌써 8년째. 시간은 흐르는 물과도 같아 이제는 그토록 분노했던 다저스에 대한 원한마저도 대부분 씻겨 내려갔다. 남은 것은 힘이 빠져가는 근육과 만 36세의 나이뿐.
넓게 펼쳐진 셰이 스타디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낡고 남루한 모습의 운동장이다. 구단 수뇌부들 사이에서 최근 새로운 운동장의 건설 문제가 솔솔 불거져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했다. 저 낡은 운동장의 모습이 마치 피아자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피아자가 올해 총 68경기 중 선발로 출전한 경기는 62경기. 물론 나이를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횟수다. 하지만 내역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62경기의 출전 중에서 포수로 나선 경기는 고작 39경기. 무려 23경기나 포수로 출전하지 못했다. 특히 아메리칸리그와의 인터리그에서는 전 경기 지명타자로만 출전했을 뿐 피아자는 단 한 번도 포수로 출전하지 못했다.
‘역시 올해가 마지막이겠지?’
수비는 조금 미흡했지만 그래도 배트 하나만큼은 진퉁이라고 볼 수 있던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 그래도 명색의 유격수 출신이다. 전 포지션을 통틀어 가장 수비 부담이 적은 일루수로서는 차고 넘치는 선수였다. 그런 그를 3년간 기본 2천만 달러, 옵션 달성시 최대 3,500만 달러의 거금에 데리고 온 것은 늙고 노쇠하여 작년 경기의 2할 이상을 일루수와 지명타자로 출전했던 있는 피아자에게 너의 자리가 없다는 은근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래도 드래프트 62라운드 1390번 1만 5천 달러짜리 선수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개인 커리어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격형 포수라는 타이틀을, 그리고 팀 성적에서는 다저스를 떠나 이곳 메츠라는 팀에서 20세기 초반 양키스 이후 가장 위대한 왕조의 주장으로 무려 네 개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 이만하면 야구 선수로서 남부럽지 않은 위대한 커리어였다. 물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야구에서 이기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뉴욕 메츠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직장이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을 허투루 넘길 수는 없지.’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그라운드에 서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반쪽짜리 선수로 취급받는다는 불쾌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벼웠다. 무거운 장구류를 끼고 끝없이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느라 혹사당했던 무릎이,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다시 공을 돌려보내야 했던 어깨가 너무나도 쌩쌩했다.
마운드의 투수를 노려본다. 스무 살에 빅리그에 콜업되어 풀 시즌을 치른 재능 넘치는 투수 잭 그레인키. 약간의 질투가 밀려온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빅리그에 설 수 있는 눈부신 재능이. 그리고 앞으로 십수 년을 메이저에서 뛰게 될 저 젊음이. 굳은살 위에 다시 또 굳은살이 배긴 손바닥으로 배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2.1이닝. 4실점. 두 번의 피홈런. 그럼에도 멘탈을 놓지 않은 드래프트 1라운더의 공이 빠르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볼, 파울, 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다섯 번째. 그레인키의 다섯 번째 빠른 공이 바깥쪽 꽉 찬 코스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 공을 향해 피아자의 배트가 힘차게 움직였다.
‘좋았어!!’
회심의 슬라이더에 배트를 내미는 피아자를 바라보며 마운드의 잭 그레인키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방심이었다. 쭉 내민 피아자의 배트가 기어코 그레인키의 슬라이더를 후려쳤다.
딱!!
바닥을 한번 강하게 찍은 타구가 2, 3루 간으로 흘렀다. 잭 그레인키의 시선이 유격수 앙헬 베로아에게 향한다. 약간의 기대. 그래도 명색이 메이저리그 팀의 주전 유격수인데 이 정도 공은 능숙하게 처리해야 하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담긴 눈빛이었다.
[유격수 앙헬 베로아!! 공 잡아서 1루에!!]
[1루에서!!]
“세이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앙헬 베로아가 그레인키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신했다. 미안함으로 가득한 표정의 앙헬 베로아. 하지만 1회 초 실수에 노골적으로 짜증을 얼굴에 드러냈던 잭 그레인키의 표정이 침착하다.
‘베로아의 실수가 아니야.’
약간 먹혔던 타구를 앙헬 베로아는 훌륭하게 잡아냈다. 조금 더 과감하게 전진해서 잡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애초에 앙헬 정도의 유격수에게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치다. 게다가 송구 역시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특별히 나쁘지도 않았다. 평균 수준의 수비. 이 정도만 하더라도 앙헬 베로아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다만 문제는 피아자가 생각보다 조금 더 빨랐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세이프가 성립될 리는 만무하다.
[화면으로 보기에는 송구가 조금 빨랐던 것 같은데 세이프가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심판이 보는 것은 각도상 차이가 조금 있으니까요.]
평소보다 조금 빨랐던 주자. 그리고 홈 선수단에 호의적인 심판. 풀리지 않는 경기가 잭 그레인키를 괴롭혔다.
‘아슬아슬했어.’
1루에 선 피아자가 이마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옷소매로 닦아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고작 30미터를 달렸음에도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린다. 이래서야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출전한 것을 불평할 수도 없다. 만약 앞선 이닝 그가 포수 역할을 했더라면 방금 1루까지의 달리기는 조금 더 늦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덕아웃을 바라본다. 진호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왕이면 백투백 홈런 같은 걸 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 옆자리, 마흔여섯.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는 헨더슨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고 있다. 가리비아에게 함께 트레이닝을 받을 때도 여전히 피아자 자신보다 더 좋은 지구력과 순발력을 자랑하는 괴물이다. 괜히 호세 칸세코가 규격을 벗어난 돌연변이라고 칭한 것이 아니었다. 부러운 마음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이크 피아자가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이름을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셰이 스타디움의 1루 내야 관중석. 수많은 팬이 피아자의 전력 질주에 환호를 보낸다. 그가 8년간 쌓아 온 커리어가 만들어낸 팬들이었다. 피아자가 웃었다.
‘아직이다.’
배팅 장갑을 벗어든 피아자가 회색빛의 우스꽝스러운 벙어리장갑을 조여 맺는다. 포수로 뛰지 못하더라도, 멋진 홈런이 아닌 볼품 없는 내야 안타에 전력으로 달리더라도, 아직 공을 치고 1루까지 살아나올 수 있다면 끝이 아니다. 마이크 피아자의 시선이 2루를 향했다.
***
한때 언론에서는 프레스톤과 강진호를 가리켜 메츠의 미래를 책임질 외야수라고, 누가 먼저 빅리그에 콜업될지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이라 칭했었다. 또한, 한때는 BA 리포트에서 그의 순위가 진호보다 높은 곳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언론에서는 더는 그를 강진호의 라이벌로 취급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도 강진호와 그를 비교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레스톤 자신조차도 이제는 진호를 향해 라이벌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프레스톤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8년 1억 2천만 달러.
A-rod의 10년 2억5천2백만 달러 이후 대형 계약이 늘어난 덕분에 몇 년 전에 비교해 1억 달러 이상의 계약이 비교적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리그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대형 계약이었다. 커리어 두 번의 올스타와 한 번의 실버 슬러거. 프레스톤 윌슨은 분명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최고의 외야수였다.
문제는 그와 비견‘됐었던’ 진호가 시대를 넘어 2차 대전 당시의 조상님들을 줄줄이 소환할만한 역대급의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아웃 주자는 1루. 4번 타자 프레스톤 윌슨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이번에 8년 1억 2천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죠? 저 프레스톤 윌슨 선수도 충분히 그만큼은 받을 자격이 있는 참 좋은 선수예요. 사실 야구라는 것이 한 선수만 특출나게 잘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강진호 선수가 지난 7년 동안 반지를 네 개나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건 강진호 선수 스스로가 잘하는 것도 있지만 저런 든든한 동료가 뒤를 받쳐주기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96년, 97년만 하더라도 강진호 선수의 콜업을 가로막을 가장 큰 라이벌로 꼽혔던 프레스톤 윌슨 선수인데 이제는 누구보다 든든한 도우미라고 봐야죠. 사실 강진호 선수의 뒤 타순에 저 피아자 선수와 프레스톤 윌슨 선수가 없었더라면 고의사구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겁니다.]
해설자들의 말처럼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도우미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은 관계. 하지만 세상 모두가 그들을 라이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프레스톤 윌슨은 진호보다 좋은 타자가 되는 것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파괴될지언정 절대 패배하지 않는 어떤 늙은 어부처럼. 긴 시간 속에서 포기와 패배 대신 오기와 집념을 손에 넣은 프레스톤이 타석에 들어왔다.
이전이었다면 타석에서도 진호의 멀티 홈런에 집중했을 프레스톤이 오직 눈앞의 투수만을 바라본다. 진호를 이기기 위해서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녀석의 화려한 플레이에 넋이 나가면 안 된다. 오직 하나하나 자신의 플레이를 완성하는 것만이 잘난 척 안 해서 더 잘나 보이는 잘난 녀석의 콧대를 시원하게 갈겨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프레스톤의 시선이 잭 그레인키를 훑었다. 21살. 1라운더. 멀쑥한 미남. 약팀의 에이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어린놈. 그리고 이미 몇 대 두들겨 맞아서 반쯤 그로기 상태. 로진백을 두들기는 손에 짜증이 묻어나는 것이 읽힌다.
‘마이크, 땡큐.’
안 그래도 비틀거리는 녀석의 멘탈에 크게 한 방 더 먹여준 피아자에게 가볍게 감사를 표하고 왼 발꿈치를 살짝 들어 타격 자세를 잡는다. 마운드의 잭 그레인키가 세트업 포지션에 들어갔다. 제구력이 좋은 녀석이지만 전업 투수를 시작한 지 고작 5년이다. 세트업 포지션에서까지 와인드업의 제구력이 나올 리 만무했다.
빠르게 날아드는 공. 바깥쪽 낮은 코스. 프레스톤이 가장 싫어하는 코스였다. 하지만 살짝 중앙으로 몰린 공이다. 쳐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딱!!
프레스톤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배트의 끝에 96마일 속구가 걸리는 순간 프레스톤은 녀석의 공이 깃털처럼 가볍다고 느꼈다. 그리고 긴 경험을 통해 프레스톤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하나 따라잡았다.’
데뷔 2년 차. 메이저리그 최악, 최약의 팀 켄자스 시티 로얄스의 어린 에이스 잭 그레인키. 단단한 척하려고 애쓰고 또 애썼던 그의 멘탈이 마침내 바사삭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