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오직 야구(5)
[데이비드 라이트!! 1, 2루 간 밀어친 안타!! 2루의 호세 레예스가 홈까지!! 그 사이 1루 주자 제이슨 바틀렛은 2루 지나 3루까지 무사히 도착합니다.]
[3회, 벌써 넉 점째. 와, 메츠 오늘 정말 매섭습니다.]
[시즌 중반 급작스러운 감독 교체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네요.]
[사실 메츠 상위 타순이야 이미 증명된 선수들인 만큼 주변 환경에 크게 흔들리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만, 오늘 하위 타선을 살펴보면 호세 레예스, 제이슨 바틀렛, 데이비드 라이트까지 모두 데뷔 1, 2년 차의 신인들이거든요. 이건 메츠 선수단 관리가 정말 잘 되고 있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그나저나 아직 3회밖에 되지 않았는데 잭 그레인키 선수 투구 수가 벌써 70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투구 수도 투구 수인데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 보이거든요. 앞서 리키 헨더슨 선수를 삼진으로 잡아낼 때만 하더라도 참 좋았는데 말이죠.]
[아직 어린 투수인데 2.1이닝 3피홈런. 그리고 7실점은 조금 가혹했죠.]
원 아웃 주자 1, 3루. 멘탈이 엉망이 된 와중에도 그레인키가 던지는 97마일의 포심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어지는 9번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리키 헨더슨. 46세의 노련한 타자. 하지만 그 노련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무기를 세월에 뺏긴 사나이였다.
[앞선 타석에서 내야 안타와 삼진을 기록했던 리키 헨더슨입니다.]
[사실 내야 안타도 앙헬 베로아의 아쉬운 수비 때문이었음을 감안 한다면 오늘 리키 헨더슨 선수는 잭 그레인키 선수를 전혀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잭 그레인키 선수 비록 점수를 많이 내주기는 했지만 여기서 침착하게 삼진, 혹은 땅볼을 유도해서 이닝을 끝내면 됩니다. 아직 경기는 3회밖에 되지 않았어요. 충분히 뒤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출루에 성공한다면 또다시 이번 경기 두 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진호거든요. 잭 그레인키 선수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휘유, 데이빗 녀석 꼭 안타를 쳐도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친단 말이죠. 이 몸이 아니었으면 절대 홈까지 들어오는 건 무리였을 거라고요.”
“그래 수고했다.”
호세 레예스가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진호를 향해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 너스레에 진호가 웃으며 한마디 건네주자 그가 새카만 얼굴에 대비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마치 리키 헨더슨을 연상케 하는 자신만만한 미소에 진호는 팀의 세대교체가 그리 머지 않았다음을 느꼈다.
‘헨더슨 씨.’
타석에 선 리키 헨더슨이 방망이를 쥐고 특유의 타격자세를 잡았다. 32경기 선발 출장에 0.208/0.313/0.306. 올 시즌 그가 기록하고 있는 성적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해 먹긴 해 먹었단 말이지.’
처음 은퇴를 입에 담고 무려 4년을 더 해먹고 있다. 01년 가리비아를 처음 만난 이후 매년 겨울 쉬지 못하는 시간은 늘어갔고 작년과 올해 겨울에는 정말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 열심히 운동했다. 어차피 100경기 이상 출전하지 않을 것을 예측했기에 가능한 오버워크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리키 헨더슨이 한껏 고개를 숙인 자세로 잭 그레인키의 공을 기다렸다. 한계는 한계. 그리고 시합은 시합이다. 잭 그레인키의 아슬아슬한 초구를 헨더슨이 지켜봤다.
뻐엉!!
“스트라잌!!”
존의 구석을 빡빡하게 파고드는 96마일의 빠른 공. 완벽하게 흔들린 것 같았는데 삼진 하나에 이만큼 회복할 줄이야. 헨더슨이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재능이 넘치는 유망주다. 헨더슨이 어깨를 슬쩍 으쓱하며 심판을 한번 바라본다. 물론 판정이 바뀔 일은 없다. 게다가 애초에 빡빡하긴 해도 이 공은 분명 스트라이크다.
‘크흠.’
하지만 타석에 선 타자는 37세의 구심 존 슈미츠가 어린 시절 열광했던 최고의 야구영웅, 전설적인 경력을 쌓아 올린 46세의 리키 헨더슨이다.
뻐엉!!
2구째,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는다. 리키 헨더슨의 어필이 성공적으로 통했다. 완벽하게 심판역할을 수행하던 존 슈미츠의 존이 살짝 흔들렸다.
‘이걸 안 잡아준다고?’
잭 그레인키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포수인 존 벅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안정됐던 잭 그레인키의 멘탈이 다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존 벅이 재빨리 마운드로 향했다.
“이봐, 잭 진정하라고. 네 공은 아주 좋아. 지금 저 양반 네 공에 손도 못 댄다고.”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잭 그레인키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과감하게 가자고. 과감하게. 조금 더 중앙에 몰려도 되니깐 구위에 신경 써서 과감하게 던지고 이대로 이닝 마무리 짓는 거야.”
“알겠어.”
마지못한 대답. 애초에 그레인키에게 존 벅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번 이닝 투구 수가 벌써 30개를 넘어가고 있다. 데뷔한 이후 처음 경험해보는 극도의 스트레스. 본래도 예민하던 잭 그레인키의 머릿속은 이미 튀겨질 대로 튀겨진 상태다. 연달아 빗나가는 야구공. 마운드의 잭 그레인키 표정이 점점 썩어갔다.
[아, 볼, 또 볼입니다. 로얄스 덕아웃 지금 뭐하나요. 지금은 투수를 교체해줘야죠.]
[보고 있기 괴로운 상황입니다. 벌투도 아니고, 이건 정말 아니죠.]
마침내 리키 헨더슨이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하며 누상에 주자가 가득 찼다.
[강진호를 앞두고 로얄스 드디어 투수를 교체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얄스 오늘 투수 교체 타이밍이 너무 늦었습니다.]
[잭 그레인키 선수, 무척 힘들어 보입니다. 오늘 여러모로 운이 좋지 않았어요. 아무리 재능 넘치는 투수라고 해도 신인에게 너무 가혹한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호된 경험이 투수를 성장시키는 법입니다. 어린 나이부터 좋은 재능을 보여준 선수인 만큼 추후 더 좋은 투수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자, 잭 그레인키를 대신해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마이크 우드, 마이크 우드입니다.]
[작년에 오클랜드에서 켄자스 시티 로얄스로 자리를 옮겼던 마이크 우드. 올해로 메이저 3년 차입니다.]
[재작년 확장 로스터로 데뷔했는데, 작년 초에는 마이너에 있다가 시즌 중반 트레이드를 통해 로얄스로 온 이후 선발로만 17경기에 나왔던 선수입니다.]
[작년 성적은 17경기 5승 12패 5.94의 ERA를 기록했습니다. 올해에는 선발 경쟁에서 밀렸습니다만 오히려 성적은 더 좋아졌어요. 지금까지 불펜으로 24경기 38이닝 동안 3.69의 ERA를 기록 중입니다.]
[게다가 작년까지 꾸준히 선발로만 경기를 뛰었던 만큼 긴 이닝을 끌어나가는 요령도 있는 선수입니다. 선발이 조기에 강판당한 만큼 긴 이닝을 먹어줄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투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석에는 강진호. 우리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투 아웃 주자 만루. 이건 뭐 강진호 선수에게 완벽하게 밥상이 차려졌다고 봐야겠는데요? 오늘 경기 2타석 2타수 2안타 2홈런. 커리어로는 네 번째, 재작년 8월 7일 쿠어스 이후 첫 멀티 홈런입니다. 오늘 이 멀티 홈런으로 경기 전 0.317/0.402/0.578이던 성적이 0.322/0.406/0.602로 껑충 뛰었습니다.]
[와, 장타율이 순식간에 6할을 넘어섰네요. 대단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오늘 경기 이제 3회 말 투 아웃이거든요. 앞으로 타석이 세 번, 어쩌면 네 번도 더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강진호 선수 컨디션이 대단한 만큼 남은 경기 얼마나 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투아웃 주자 만루. 21살의 잭 그레인키가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조금 아쉬운데?’
완벽하게 흔들리는 투수가 내려가고 생소한 투수가 올라왔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마이크 우드. 처음 보는 투수다. 물론 자료로는 한차례 봤지만, 좌완이라는 것이 조금 거슬릴 뿐 그리 인상 깊은 투수는 아니었다.
‘최고 93마일짜리 속구에 80마일 초반 슬라이더. 그리고 어설픈 체인지업이었나?’
어차피 만루라서 도루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마운드의 투수가 마음껏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일단 하나 지켜볼까?’
적극적으로 스윙하겠다기 보다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공을 관찰했다. 마이크 우드의 손을 떠나 날아드는 누런 공.
느리다. 그리고 밋밋하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스윙하겠다는 마음이 없더라도 이런 공을 놓치는 건 야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의 몸통이 시원하게 돌아갔다.
따악!!
[어?]
특별한 움직임 없이 너무 밋밋해서 의아하기까지한 공이었다. 그야말로 포심 패스트볼의 교과서에 나오는 것 같은 공. 나의 배트가 그 공의 중앙을 정확하게 명중했다. 아름다운 각도,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타구. 이건 무조건 넘어가는 공이다. 방망이를 내려 놓고 아주 잠깐 타구의 모습을 지켜봤다.
[호, 홈런!! 또 홈런입니다.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시원한 만루 홈런포!!]
[맙소사. 강진호!! 강진호!! 한 이닝 두 개의 홈런을 기록합니다.]
[한 이닝 두 개의 홈런이라니. 이거 올 해에는 처음 나온 기록 아닌가요?]
[맞습니다. 작년 6월 19일 지금은 워싱턴 내셔널스로 변경된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후안 리베라 이후 첫 기록입니다.]
[강진호!! 대단합니다!! 강진호. 오늘 경기 세 번째이자 이번이닝 두 번째 홈런포!! 시즌 20번째 홈런을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냅니다.]
[강진호의 만루포!! 이번 경기 7개의 타점을 쓸어담습니다.]
[항상 기록에 비해 타점이 아쉬웠던 강진호 선수였는데 이거 올해는 타점 부분도 기대해봐도 좋겠는데요?]
[아, 잠깐만요. 그런데 지금 강진호 선수 분명 1회에 2점 홈런, 그리고 이번 이닝에 솔로 홈런과 만루홈런을 기록했죠?]
기분좋게 베이스를 밟고 홈으로 돌아왔다. 덕아웃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는 주자들. 그리고 덕아웃에서 뛰쳐나온 선수들로 홈베이스 부근이 시끄럽다.
“이 이런 미친 자식!!”
“와, 한 이닝 2 홈런이라니. 정말 별 짓을 다하네.”
“뛰기 귀찮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노인 공경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고.”
열렬한 환영. 고참 선수들의 손바닥이 나의 헬멧을, 그리고 루키들의 소심한 손바닥이 나의 등허리를 두들긴다. 열렬한 손바닥 세례의 끄트머리. 큼지막한 손바닥 하나가 나의 눈 앞에 놓였다.
‘응?’
“축하하네.”
손바닥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조 매든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활약을 하건 간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덕아웃에 앉아있던 바비 발렌타인과는 다른 친근함. 사실 어느것이 더 좋은 감독의 모습이라고 단정짓긴 힘들었다. 하지만 바비 발렌타인이 마지막에 보여줬던 그 안좋은 모습 덕분일까? 이렇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밉지 않았다. 그가 내민 그 손바닥을 강하게 붙잡았다.
“부탁 들어드리느라 힘들었습니다.”
“부탁?”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의 웃음에 그제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는 듯 그가 이마를 탁 치며 웃는다.
“아!! 맙소사. 하하. 이런, 부탁이라니. 설마 그 부탁을 이런 식으로 들어줄 줄은 몰랐는데. 이거 종종 부탁을 해야겠는데?”
“그 부탁, 아예 출루를 안하는 걸로 들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어허, 이 친구가!!”
조 매든과 나 사이에 가볍게 농담이 오갔다. 3회 말, 투 아웃. 점수는 11:0.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맙소사, 이거 사이클링 홈런까지 석점 홈런 하나 남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