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오직 야구(6)
[5회 말,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지금 2루 주자로 데이비드 라이트 선수가 나와 있습니다. 타석에는 리키 헨더슨. 리키 헨더슨 선수입니다.]
[여기서 리키 헨더슨이 출루에 성공하고 강진호가 홈런을 하나 쳐낸다면 사이클링 홈런, 사이클링 홈런입니다.]
[물론 절대 쉬운 기록은 아닙니다. 무려 메이저 130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못했던 기록. 마이너, 그리고 해외리그까지 모든 프로리그를 통틀어서도 지난 98년 7월 27일 더블A 텍사스 리그에서 타이론 혼 선수가 기록한 것이 유일한 기록입니다.]
[한 경기에 네 개의 홈런을, 그것도 1점 2점 3점 그리고 만루 홈런을 각각 기록해야 하는 터무니 없는 난이도입니다. 솔직히 한 경기 네 개의 홈런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서 지금까지 기록한 선수가 열 다섯명 밖에 되지 않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앞에 주자가 저렇게 놓인다는 조건까지 더해지면 이건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세 개의 홈런을 쳤다고 네 번째도 홈런을 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조금 설레발 같기는 합니다만 오늘 강진호 선수는 정말 뭔가 해낼 것 같단 말이죠. 느껴지는 기세 자체가 다릅니다.]
무려 메이저 역사상 누구도 기록하지 못했던 위대한 기록이 자신의 출루에 달려있는 상황이다. 만약 지금 타석에 선 타자가 다른 선수였다면 부담감에 짓눌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히려 리키 헨더슨의 전신에는 기이한 활력이 샘솟았다. 고작 이 정도 부담감에 짓눌리기에 27년의 프로 경험은 너무 길었다.
딱!!
리키 헨더슨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2, 3루 간을 뚫어내는 타구. 2루에 서 있던 데이비드 라이트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타구의 질을 봤을 때, 그리고 데이비드 라이트의 주루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홈까지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잠깐의 갈등. 물론 데이비드 라이트 역시 자신의 캡틴인 진호의 기록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의 승부에서 점수를 낼 수 있을 때 내지 않는 플레이가 과연 올바를까? 이렇게 억지로 만든 기록이 과연 가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뇌리를 스쳤다. 호세 레예스, 하다못해 제이슨 바틀렛만 됐더라도 하지 않았을 고민이다. 항상 올바른 삶, 올바른 플레이를 추구해온 데이비드 라이트였기에 가능한 고민이었다.
‘멈춰!!’
그 순간 팽팽한 내적 갈등을 깨주는 3루 코치인 제리 마누엘이 멈추라는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비드 라이트의 발걸음이 3루에서 멈춰 선다.
[쳤습니다!! 리키 헨더슨이 마이크 우드의 바깥쪽 속구를 제대로 밀어쳤습니다.]
[리키 헨더슨이 무난하게 1루까지!! 그 사이 2루 주자, 데이비드 라이트. 3루까지!! 3루에서 멈춰섭니다.]
[지금 점수가 무려 12:2. 10점 차이거든요. 데이비드 라이트, 강진호 선수의 기록도 기록이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메츠의 3루 코치 제리 마누엘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데이비드의 엉덩이를 툭 두들겼다.
“잘했어. 루키. 승부가 급박한 순간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여유로운 상황에선 팀원의 기록을 존중할 줄 알아야지. 우리가 하는 건 팀플레이잖아.”
흔쾌하게 동의하기에는 힘든 이야기였지만, 데이비드 라이트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빛.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정도 부담감에 짓눌릴 만큼 나의 경험은 짧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기대감들을 멋지게 충족시켜 주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쳤다.
[자, 타석에 우리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사실 오늘 경기 이전만 하더라도 강진호 선수의 네 번째 MVP는 조금 힘들어보였거든요. 물론 굉장한 성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만년 2인자였던 푸홀스, 그리고 강진호 선수와 함께 리그 최고의 중견수 수비를 자랑하는 앤드루 존스, 컵스의 일루수 데릭 리 선수와 비교하면 한 수 처지는게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오늘 3홈런으로 단숨에 경쟁권에 뛰어들었습니다.]
[헐리웃 스타와의 약혼이라는 기분좋은 소식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강진호 선수!! 만약 지금 홈런을 쳐낸다면 한 경기 4홈런. 그것도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앞서 나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했던 마이크 우드가 서있다. 녀석은 올라오자마자 만루 홈런을 허용했음에도 나이 답지 않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오늘 나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마이크 우드가 던지는 밋밋한 공 정도는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다. 문제는 우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
[아, 셰이 스타디움에 관객들의 야유가 울려퍼집니다.]
[물론 마이크 우드 선수의 심정도 이해는 갑니다만, 대기록을 앞둔 타자에게 이런 터무니 없는 공만 던지는 건, 마치 퍼펙트 게임을 앞둔 투수에게 번트를 대는 것 같은 느낌이로군요.]
2구 연속 볼. 그것도 존에서 상당히 벗어난 곳으로 들어오는 공이다. 의도적인 볼넷? 아니면 기록을 의식한 내가 더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를거라 생각한 피칭? 뭐가 됐건 이 공들은 도저히 칠만한 공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마이크 우드의 공이 날아들었다.
앞서 관객들의 야유가 부담스러웠던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실수였을까. 마이크 우드의 공이 이전보다 훨씬 존에 가깝게 들어왔다. 물론 존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기는 힘든 위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더 좋은 공을 던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점수는 12:2. 지금은 한 번의 출루를 더하는 것보다 내 개인의 기록에 욕심을 내봐도 좋을 상황이었다. 나의 배트가 존 바깥으로 빠지는 공을 강하게 두들겼다.
딱!!
[쳤습니다!! 강진호!! 우중간!! 높게 뜬 타구!!]
[존을 상당히 벗어나는 공이었는데 강진호가 이걸 받아쳤습니다!!]
배트의 격심을 꽤 벗어나 끄트머리에 걸린 타구가 세차게 날아올랐다. 손바닥 전체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 넘어가느냐, 넘어가지 못하 느냐. 나의 머릿속에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어가는 야구공의 궤적이 그려졌다.
‘됐어!! 이건 넘어간다.’
하지만 야구의 신이 130년 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미답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담장 앞, 데이비드 데헤수스가 점핑 캐치로 강진호의 타구를 잡아냅니다!!]
[여기서 하필 이런 호수비가 나오네요.]
[아, 너무 아쉬운 장면입니다. 이건 데이비드 데헤수스 선수가 조금 원망스럽네요.]
[바람도 좋지 않았습니다. 아, 조금만 더 뒷바람이 불어줬더라면······.]
작년 신인왕 6위. 올타임 No. 1을 다투는 나와 존스의 수비에 묻혀 그리 조명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리그 최고수준의 수비 실력을 보여주는 데이비드 데헤수스가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어가려는 나의 홈런볼을 낚아챘다.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만 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젠장.’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강진호 선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경기 이제 5회가 지났을 뿐이에요. 메츠에게는 아직 3번의 공격이 더 남아있고 강진호 선수에게도 최소한 한 번의 찬스가 더 돌아올 겁니다.]
[아, 오늘 경기가 홈경기인 게 또 이렇게 아쉽네요. 선공이었다면 높은 확률로 두 번의 찬스는 더 주어졌을 텐데, 고작 한 번밖에 찬스가 주어지지 않다니 말이죠.]
경기는 아직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와 글러브를 챙겨 들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거, 이거. 긴장해서 엉덩이 딱딱하게 굳어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정도는 아닌가 보네? 탱탱한데?”
“헨더슨 씨!!”
리키 헨더슨이였다.
“내가 소싯적에 기록 같은 거 좀 많이 갱신해봐서 아는데 그거 엄청나게 기분 좋다.”
이 순간까지도 자기 자랑이 섞인 너무나도 헨더슨다운 격려다.
“저도 알아요.”
“아, 맞다. 너도 50-50인가? 뭔가 치킨 패티 절반, 소고기 패티 절반 햄버거 같은 느낌의 기록 하나 세워봤지?”
“반반 패티라니. 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정체성 분명히 하고 홈런 기록 하나 세워 보란 말이야. 그래 봐야 이 몸의 위대함에 절반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내 엉덩이를 움켜쥔 헨더슨의 손에 한 번 더 힘이 실렸다.
“뭐, 이번에도 혼자 하는 건 아니고 팀원들 도움이 있어야 하는 기록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몸이랑 같은 팀인데 그 정도 어드벤티지는 있어 줘야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요?”
“뭐, 너무 그렇게 고마워하지는 말고. 아직 경기 길게 남았잖아. 앞으로 몇 번이라도 기회 만들어 줄 테니까. 어이, 애송이들 안 그런가?”
“역시 나이를 먹으면 힘이 혀로만 쏠린다더니. 뭐, 당연한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하고 그러십니까.”
호세 레예스의 건방진 답변. 리키 헨더슨이 기분 좋게 웃었다.
“너 10년 후에 꼭 보자. 그때도 그렇게 건방질 수 있다면 내가 칭찬해주지.”
그리고 7회 말. 리키 헨더슨이 자신의 호언장담을 지켰다. 조금은 볼썽사나운 형태였지만 말이다.
[7회 말 원 아웃. 주자 1, 3루. 리키 헨더슨!! 스윙 삼진!!]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습니다만 또다시 강진호에게 찬스가 돌아옵니다.]
[이거 리키 헨더슨 선수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전 사실 헨더슨이 여기서 땅볼로 병살을 당하느니 얌전히 삼진을 당했으면 했어요.]
[헨더슨 선수도 일부러 삼진을 당해준 건 아닐까요? 여기서 볼넷으로 출루했다면 그대로 강진호 선수의 사이클링 홈런 마지막 찬스가 날아가는 거였으니까요.]
[글쎄요, 평소 헨더슨 선수의 탐욕을 생각하면 마냥 그렇게 생각하긴 힘듭니다만, 그래도 강진호 선수와는 워낙에 각별한 사이인 만큼 또 모를 일이죠.]
[자, 어찌 됐건 타석에는 우리 강진호 선수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7회 말. 투아웃 주자 1, 3루. 오늘 경기 다섯 번째 타석. 메츠의 팀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완벽한 밥상을 또 한 번 대령했습니다.]
[점수는 여전히 12:2. 경기의 승패 자체는 이제 뒤집기 힘든 상황. 하지만 경기의 승패만큼이나 중요한 대기록의 달성이 걸려있는 중요한 타석 앞에 셰이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4만여 관중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
“노린 거죠?”
덕아웃으로 돌아온 헨더슨의 헬멧을 받아주며 프레스톤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를?”
“방금 그 삼진이요.”
프레스톤의 질문에 덕아웃 멤버들의 귀가 집중됐다.
“그렇지. 아무래도 대기록이 걸렸는데. 내가 일부러 삼진으로 물러나 줬지.”
리키 헨더슨의 대답에 데이비드 라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순간에는 저렇게 승리만을 생각하는 헨더슨조차도 양보를 하는구나.’
역시 이전 이닝 자신을 멈춰 세웠던 코치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그 확신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다.
“무슨 소리예요. 방금 그거 진지하게 안타 노린 거잖아요. 안 봐도 뻔하더구만. ‘내가 여기서 안타를 치면 3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오고 다시 내가 출루하니까 그대로 석 점 홈런에 도전할 찬스가 이어지겠지. 그러니까 안타를 치자.’라고 생각한 거잖아요. 병살 같은 건 머릿속에 생각도 안 했고.”
“무, 무슨 소리야. 방금 그 시원한 스윙 봤잖아.”
“네, 그러니까요. 속구를 노렸는데 슬라이더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시원한 스윙 잘 봤죠.”
대체 체인지업을 어떻게 구분하는 거냐고 징징거리던 애송이의 대견한 성장을 리키 헨더슨이 기뻐할 틈은 없었다.
타석에 선 진호를 향해 켄자스 시티 로얄스의 불펜. 제레미 아펠트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부웅
적극적인 스윙. 진호의 배트가 강하게 허공을 갈랐다.
“야, 우리 캡틴, 저번 타석부터 스윙이 평소보다 좀 큰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을까? 기록 달성 앞두고 흥분한 거 아니야?”
호세 레예스가 곁에 앉은 데이비드 라이트에게 속삭였다. 그런 그의 속삭임에 데이비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거 캡틴이 평소 연습 때 작정하고 담장 넘기는 스윙이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들어오는 공이 배팅볼이 아니잖아.”
레예스의 이야기에 데이비드 라이트 대신 다른 사람이 답했다. 대체 언제 접근했는지도 모를 프레스톤 이었다.
“야, 애송이. 네가 아는 걸 쟤라고 모르겠냐? 야구 네가 잘하냐? 아니면 쟤가 잘하냐?”
“아니, 지금 이게 야구를 누가 잘하는지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옆에서 보는 게 더 잘 보이는 법이잖아요.”
“그래, 옆에서 보는 게 더 잘 보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엄청나게 잘 보여. 망할.”
“네?”
프레스톤의 이해할 수 없는 답변과 레예스의 반문. 그 반문에 그라운드의 진호가 관중들의 환호성으로 답했다.
“우아아아아아!!!!”
[강진호!! 강진호!!!!]
[강진호, 시즌 21번째 홈런!! 메이저 사상 최초, 아니 세계 프로야구 최초의 사이클링 홈런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지금은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강진호 선수가 지금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갑니다.]
자리에 서서 타구를 지켜본 진호가 배트를 내려놓고 베이스 러닝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진호를 향해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진다. 오늘 벌써 다섯 번째 얼굴을 드러내는 셰이 스타디움의 붉은 사과. 그 위로 프런트가 부랴부랴 준비한 특대형의 폭죽들이 쏟아졌다.
-뉴욕 메츠의 Kang. 메이저리그 최초 사이클링 홈런!!-
-Kang 캔자스 시티 로얄스와의 1차전. 시즌 18, 19, 20, 21호 한 경기 4개의 홈런포 작렬!!-
-강진호!! 커리어 네 번째 MVP를 정조준하다!!-
-약혼녀를 향한 약혼 기념 선물? Kang, 약혼 발표 직후 만들어 낸 최고의 기록.-
-Kang ‘동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05시즌 68경기 21홈런. 과연 강진호 선수의 커리어 두 번째 50홈런은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