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67화 (167/210)

# 167화.

별중의 별

“진호야. 여기야 여기.”

“선배!!”

수염이 숭숭 난 찬화 선배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나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2년 만인가? 그래도 요새 너 TV에 너무 자주 나와서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지는 않네.”

“하하, 그러는 선배도 올해 어마어마하시던데요. 올해 우리 상대가 서부지구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 녀석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하고 있네. 일단 천천히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여기 음식 맛있더라.”

“그럴까요?”

지난 2001년 FA를 앞두고 고질적인 허리 부상이 크게 도졌던 찬화 선배는 통증을 참아내며 FA를 준비하는 대신 과감한 시즌 아웃을 선택했다. 본래의 역사에서 대박 FA를 따내고 바로 드러누웠던 것과 다르게 8개월이라는 제법 긴 재활을 거쳐 돌아온 찬화 선배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뽐냈다.

본래 역사에서 부상에 대한 의혹으로 디스카운트 됐던 5년 6,500만 달러와 금액적으로는 크게 차이 없는 8년 1억 1000만 달러(5년차 옵트아웃 가능)에 텍사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요즘 기세로 보면 후년 옵트아웃 선언은 거의 확실하고 그렇게 되면 만 34세, 아직 다년 계약을 한 번은 더 맺을 수 있는 젊은 나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 시즌 아웃 선택은 매우 좋은 선택이 된 셈이었다.

“그나저나 선배 올해 무난하게 124승 정도는 하실 수 있겠네요?”

“124승? 뭐 그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왜 하필 124승이야? 딱 거기까지만 이기고 그만 이기라 이 소리야?”

“아뇨, 뭐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숫자가 124라서요.”

“짜식이, 실없기는.”

찬화 선배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네가 올해 까지 하면 벌써 7년 연속인가? 대단하네.”

“운이 좋았죠. 뉴욕이라서 득을 본 것도 있고요.”

“에이, 그것도 기본적으로 성적이 되니깐 가능한거지. 너 2년차에 MVP였잖아.”

“그 MVP야 말로 정말로 운이 정말 좋았던 거고요.”

오늘 우리가 만난 장소는 디트로이트. 올해 올스타전이 열리는 도시였다. 올 시즌 텍사스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찬화 선배는 커리어 두 번째 올스타로 선정됐다.

“그보다 선배네 팀 요즘 잘나가던데요?”

“글쎄다. 우리 팀도 확실히 로드리게스 그 녀석이 양키스로 가고 나니깐 좀 괜찮아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아직 좀 부족하지. 게다가 그 녀석 연봉보조도 만만치 않잖아. 그게 무려 2010년까지니까 말이야. 이러다가 진짜 까딱하면 계약 끝날 때 까지 포스트시즌 구경도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하긴, 다른 팀으로 보냈는데 연봉보조만 연 900만 달러라니. 그거 완전 제 연봉 수준이잖아요.”

“어휴, 그렇게 들으니까 메츠가 왜 그렇게 잘나가는지 알겠다. 네 녀석 같은 선수를 고작 천만 달러 수준으로 써먹고 있으니, 잘나가지 않을 수가 있겠어?”

본래의 역사처럼 지난겨울 양키스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받아왔다. 다만 본래의 역사와 조금 달라질 점은 그가 옵트아웃을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최근 빅리그의 약물검사는 여간 깐깐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한 이후 약 20 여일 동안 무려 두 번의 테스트를 받았다. 게다가 호세 칸세코와 마크 맥과이어의 경우 기록의 말소까지도 심사되고 있었으며, 몇몇 추가 대상들 역시 자신들의 약물 복용에 관해 제법 지루한 싸움을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추가로 약물을 빠는 일은 어지간해선 벌어지기 힘들었다. 그 결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4점대 중반에 달했던 리그 평균자책점은 현재 3.97로 뚝 떨어져 있었으며 그것이 약물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슬럼프인지 확정할 수는 없었으나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성적 역시 몰라보게 하락해 있었다. 당장 올해 올스타전에도 선정되지 못할 만큼 말이다.

“그나저나 너희 팀 프런트도 제법 머리 아프겠다. 너 이제 후년 부터 FA잖아.”

“그야 그렇죠. 근데 그런데 머리 썩이라고 프런트 직원들이 그 비싼 연봉 받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팀 옮길 생각은 없어? 보니까 우리 구단도 생각은 좀 있는 것 같던데? 이번에 걔 내보내고 연 천육백만씩이나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말이야.”

“에이, 선배 솔직히 텍사스는 없는 살림 쥐어짜서 저 데리고 가는 것보다 구석구석 쓸만한 선수들로 메우는 게 낫잖아요. 텍사스 지금 구멍이 한, 두 개가 아니던데. 그 구멍 제가 간다고 메워지는 건 아니잖아요.”

“크흠, 뭐 구멍이라고까지 표현할 건 없고. 어쨌든 우리 구단에서도 관심 보이는 거 기억이나 해두라고. 솔직히 투타를 대표하는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한 팀에 모이면 한국 팬들이 응원하기도 좋잖냐.”

“글쎄요, 요즘 종운이 던지는 거 보면 선배도 그 대표라는 거 좀 위태위태해 보이던데요.”

“어휴, 이게 또 까부네. 빨리 현섭이나 성수가 좀 터져줘야 너도 내 심정을 이해할 텐데.”

물론 현재 플로리다 말린스를 거쳐 다저스에서 일루수로 고전 중인 현섭이와 01년부터 마이너에서 박박 구르고 있는 성수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여간 고생 중인 것이 아니었다.

“네, 저도 그 심정 이해할 수 있도록 걔들도 빨리 좀 터져줬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식사 다 하셨으면 일어나죠?”

“그래, 그러자.”

“그러면 여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타자가 계산하겠습니다.”

“어허, 연봉도 얼마 안 되는 게 그 계산서 얌전히 내려 놔라.”

“그 고액연봉 수령 하신 지 얼마 안 돼서 모아둔 돈도 없으시잖아요. 전 고액연봉자 생활 7년 차입니다.”

계산서를 재빨리 빼 들고 카드와 함께 웨이터에게 건넸다.

“그러면 2차는 내가 쏘는 거로 할까?”

“2차 하시게요?”

“왜, 뭐 바쁜 일이라도 있어? 어차피 너도 오늘은 솔로라서 한가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전 내일 경기가 좀 중요해서요.”

농담을 가득 담은 나의 이야기에 찬화 선배의 얼굴에 궁금증이 어렸다. 올스타전이 중요하면 둘 다 중요했지 왜 나만 중요하다고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 하지만 그 궁금증은 이내 어이없음과 분함으로 바뀌었다.

“허, 너 이 자식. 설마 벌써 월드 시리즈 걱정이라 이거냐?”

“네, 어차피 하게 될 거 미리미리 대비해둬야죠.”

“와, 이 녀석 자신감 좀 보게.”

02년까지만 하더라도 번갈아 가면서 주어지던 월드 시리즈 홈 어드밴티지는 올스타전의 흥행이라는 명목으로 올스타전에서 승리한 리그에 주어지도록 변경됐다. 지난 2년간의 결과는 1승 1패. 03년 내셔널리그가 홈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왔을 때는 우리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했고, 작년 아메리칸리그가 홈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갔을 때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풀어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올스타전의 승리를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이유였다.

“그나저나 ‘저는’ 이라니. 우리는 월드 시리즈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 같다?”

“에이, 설마요.”

얇게 실눈을 뜨고 있던 선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았어. 네 그 걱정 잘 받아들였다. 나도 우리 텍사스의 월드 시리즈를 아주 진지하게 걱정해보도록 해주지.”

“아니, 선배 뭐 그렇게까지 걱정하진 않으셔도······.”

***

뻐엉!!

“스트라잌!! 아웃!!”

97마일 속구가 미트를 꿰뚫을 기세로 날아들었다.

‘저 선배, 진지하게 한다더니 진짜 이 악물고 던지시네.’

올해 올스타전이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홈구장 코메리카 파크의 마운드에 선 투수는 다름아닌 찬화 선배였다. FA 3년 차인 올 시즌 또 한 번 커리어 하이를 써 내려가며 생애 두 번째 올스타로 선정된 선배의 공이 우리 내셔널리그 올스타들의 배트를 연신 돌려 세웠다.

[Park. 대단합니다. 두 타자 연속 삼진!! 오늘 커브가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사실상 이번 시즌 마크 벌리, 요한 산타나와 함께 아메리카 리그를 통틀어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투수답습니다.]

찬화 선배가 세 번째 타자인 치퍼 존스를 기어코 땅볼로 잡아내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진호, 네 고향 친구는 아메리칸리그로 가더니 아주 펄펄 날아다니는데?”

“그러게 말이다.”

“올해 우리의 인터리그 상대가 중부지구인 게 참 다행이네.”

어제 내가 찬화 선배에게 했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치퍼 존스. 그의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우리 인터리그 상대가 서부지구가 아닌 게 참 다행이야.”

또한, 다행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늘 경기는 올스타전. 투수의 컨디션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 명의 투수가 던질 수 있는 이닝은 오직 1이닝뿐이다. 반면 선발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나에게 돌아오는 타석은 두 번. 그리고 최근 절정의 컨디션을 달리고 있는 나에게 두 번의 타석이면 충분했다.

-강진호 올스타전 커리어 첫 올스타전 MVP 선정!!-

-별 중의 별!! 강진호. 2타수 2안타 1홈런 4타점 2득점 올스타들을 압도하는 최고의 활약.-

-징크스는 이어질 것인가!! 월드 시리즈 홈 어드벤티지를 들고 온 내셔널 리그 올스타. 03년 올스타전 홈 어드벤티지 룰 이후 두 번의 월드 시리즈 모두 우승팀은 홈 어드벤티지를 들고 온 리그 소속이었던 징크스는 올해도 반복될까?-

-박찬화 1이닝 2삼진 무실점 삼자범퇴 완벽투. 하지만 아쉽게도 승리는 내셔널리그 올스타에게.-

-박찬화 ‘좋은 모습으로 다시 팬들께 인사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 2001년 처음 올스타에 선정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다시 올스타전에 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힘든 재활을 이겨내고 텍사스와의 장기 계약을 맺은 직후(중략) 앞으로도 좋은 모습으로 팬들에게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하, 이제는 이거 마냥 좋아만 하기도 힘들 만큼 대단하네.”

모니터를 바라보는 앤드류 프리드먼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팀 내 문제가 해결되고 한 달여. 달아오른 진호의 방망이가 도무지 식을 줄을 몰랐다.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단장이라는 직책이 뭔지 프리드먼은 그 좋은 일을 마냥 즐길 수가 없었다.

진호와의 재계약까지는 이제 1년 6개월. 어찌어찌 홈 디스카운트를 해준다고 해도, 기존의 성적만으로도 일단 2억 달러가 시작지점이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진호의 에이전트가 무리를 해서라도 전구단을 상대로 최대한 돈을 뜯어내는 스캇 보라스 같은 인간이 아닌 리키 헨더슨과의 몇차례 연장 계약을 통해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은 제프 보리스 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해도 지금 같은 성적이면 최소 10년 2억 5천. 아니, 어쩌면 3억을 넘길지도 몰라.’

현재 메츠의 페이롤은 1억 2천만 달러. 작년에 비해 천만 달러를 줄였음에도 양키스에 이어 리그 2위의 페이롤이었다. 물론 경기당 관중수가 크게 늘어났고 거액의 중계권료가 들어오고 있는 만큼 적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펑펑 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톰 힉스 같으니. 죽을꺼면 혼자 죽던지.’

알렉스 로드리게스라는 규격 외의 계약을 덜커덕 체결했던 텍사스의 구단주를 속으로 욕했다. 진호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라는 선례에 맞춰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물이다. 문제는 이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계약이 너무 명백한 오버페이였다는 점이다. 메이저 전체 연봉 2위의 선수와 25%이상 차이나는 터무니 없는 계약. 이것은 계약 당시에도 그랬고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덕분에 텍사스의 최근 몇 년은 엉망 그 자체였다. 팀 페이롤 8,500만 달러짜리 팀이 한 선수에게 2,500만 달러를 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구단주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프리드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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