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죽음, 세금. 그리고(2)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오늘 시카고 컵스와 뉴욕 메츠의 시리즈 1차전 경기가 열리는 리글리 필드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시합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강진호 선수의 연속 안타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틀 전 The hitting streak를 언급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는데요. 뭐 일단 56경기까지 가려면 24경기라는 메츠의 프랜차이즈 기록부터 경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야구에서 매 경기 안타를 친다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한 달도 넘게 남은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일단은 눈앞의 오늘 경기에 집중해야죠.]
[게다가 오늘 경기에서 주목할 점은 강진호 선수의 연속 안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 화제는 조금 덜 됐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쪽이 더 주목할만한 기록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죠. 물론 메츠의 프랜차이즈 연속 안타도 중요한 기록이기는 합니다만, 이건 지금까지 총 열 두 명의 투수밖에 기록하지 못한 대기록이거든요. 바로 오늘 선발 투수인 그렉 매덕스 선수의 3000삼진입니다.]
[물론 매덕스 선수 역시 아직 2986삼진인 만큼 오늘 경기에서 3000삼진을 달성할 확률은 사실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최근 메츠의 타선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또한, 오늘 선발로 출전하는 그렉 매덕스 선수가 이상하게 강진호 선수에게 약하거든요.]
[그렇습니다. 매덕스 선수를 상대로 강진호 선수의 타율은 무려 0.347이네요. 이 정도면 정말 매덕스 킬러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겠네요.]
[매덕스 선수가 통산 피안타율이 0.243밖에 되지 않거든요? 강진호 선수의 저 타율은 그렉 매덕스 선수를 70타석 이상 상대한 타자 중에서 토니 그윈 선수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타율입니다.]
마운드를 바라보며 프레스톤이 입을 열었다.
“매덕스가 민무늬 유니폼이 아닌 저 파란 줄무늬를 입은 모습은 영 이상하단 말이야.”
“벌써 2년째인데 슬슬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
“글쎄다, 내가 마이너에 있던 시절부터 뭔가 끝판왕 같은 느낌으로 10년이 넘게 지켜봐서 그런지 영 적응이 안 되네.”
마운드에 선 매덕스의 얼굴에 주름이 선명하다. 작년 시즌 서른여덟, 한국 나이로 서른아홉에 매덕스는 11년간 뛰어온 애틀랜타를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시카고 컵스였다. 그는 컵스와 3년 2,4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매덕스라는 이름값에 비한다면 조금 저렴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와 3년의 다년계약을 고려한다면 딱 적절한 시장가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늘 메츠는 1번 타자로 리키 헨더슨 선수가 아닌 호세 레예스 선수를 출전시켰습니다. 오늘 리키 헨더슨 선수는 하루 쉬어가는군요.]
[최근 리키 헨더슨 선수가 여섯 경기를 연속으로 선발로 출장했던 만큼 휴식일을 줄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최근 매덕스 선수를 상대로 전적이 좋지 않은 점도 있고 말이죠.]
7월 말. 가장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시기. 여름이면 덥고 습한 시카고의 특성상 31도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끈적한 몸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은 상당했다. 호세 레예스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타석에 섰다.
[올 시즌 양대리그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 중인 호세 레예스 선수. 물론 단순히 발만 빠르다고 리드 오프로 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1루는 훔칠 수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호세 레예스 선수의 경우는 타석에서의 성적도 제법 괜찮거든요.]
[호세 레예스 선수의 올 시즌 지금까지 타격 성적이 0.261/0.349/0.413으로 이루수 중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성적이에요. 게다가 고무적인 것이 이 선수 성적이 점점 올라오고 있거든요. 최근 경기들만 보자면 리키 헨더슨 선수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매덕스, 매덕스 하는데. 그래 봐야 이제 40살 다 된 영감님이잖아.’
오늘 경기가 있기 전, 팀미팅에서 몇 번에 걸쳐 주의를 들었던 레예스는 코치와 선배들의 그런 주의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렉 매덕스는 대단한 투수‘였’다. 300승. 그리고 2986개의 삼진과 853개의 볼넷, 약물 시대를 관통한 16년의 커리어 동안 2점대를 사수하고 있는 평균자책점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서른 아홉 살. 오늘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기껏해야 80마일 중반의 공을 던지는 투수 따위, 한때 얼마나 잘나갔었는지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두들겨 줄 수 있다고 레예스는 생각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정확하게 2분 뒤, 레예스는 왜 선배들이 매덕스, 매덕스 노래를 불렀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쳐냈지만 파울 지역으로 튕겨 나가는 투심. 아슬아슬하게 바깥쪽 코스인 것 같아 내버려 뒀더니 머리털 하나 차이로 존 안에 들어오는 칼날 같은 제구. 배트를 휘둘렀더니 한참 뒤에 들어오는 체인지업. 오늘 마운드 위에 선 투수는 서른아홉의 늙어빠진 투수가 아닌 20년 치의 경험으로 군림하는 베테랑 에이스였다.
호세 레예스가 매덕스에게 통산 2987번째 삼진을 헌납했다.
[그렉 매덕스의 체인지업!! 호세 레예스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호세 레예스 선수가 좋은 타자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런 변화구는 쉽게 볼 수 있는 공이 아니니깐요. 정말 기가 막힌 체인지업이었습니다.]
[이거 오늘 매덕스 선수 컨디션이 정말 좋아 보이는데요? 어쩌면 정말 제대로 한 번 일을 낼지도 모르겠어요.]
[자, 호세 레예스 선수에 이어 타석에 강진호,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스물다섯 경기 연속 안타에 도전 중인 강진호 선수입니다.]
98년 처음 만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무서운 선수로 성장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 괜찮은 선수. 어쩌면 올스타급까지도 가능한 선수 정도가 매덕스가 생각했던 최고치였다. 하지만 저 눈앞의 징글징글한 녀석은 그런 매덕스의 예상을 우습게 비웃으며 끝도 없이 성장하여 결국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박살 내는 선봉장이 됐다. 엿 같은 토니 그윈 이후 가장 엿 같은 타자. 그것이 매덕스가 평가하는 강진호라는 타자였다.
[아, 그런데 오늘 경기 전 매덕스 선수의 인터뷰가 조금 흥미롭네요.]
[인터뷰요? 어떤 인터뷰인가요?]
[네, 기자 중에서 강진호 선수에 대해서 물어본 기자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Kang이요? 흐음, 이것 참. 벌써 몇 번을 이야기 한지를 모르겠군요. 그 자식은 그냥 규격 밖의 괴물이에요. 지난 몇 년 동안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배리 본즈와 그 자식 중에서 더 상대하기 더러운 타자는 그 자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뭐, 그래도 오늘은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매덕스 선수가 강진호 선수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인터뷰를 했다고요?]
[네, 기자가 그 방법이 뭔지를 물었습니다만 그건 경기를 지켜보면 알 수 있다고만 답변했다고 하더군요.]
[호, 방법이라. 그것참 흥미롭군요. 최근 타격에 한층 더 눈을 떴다는 평가를 받는 강진호 선수인데, 그렉 매덕스 선수의 눈에는 혹시 거기서 무슨 약점이라도 보인 걸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지금 강진호 선수는 정말 완전체에 가깝거든요. 하지만 매덕스만한 투수의 눈에는 또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거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홈플레이트 너머 마이클 바렛이 건네는 공을 매덕스가 가볍게 낚아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민활함. 진호의 가슴 속에 한 번 더 경계심이 생겨났다. 비록 상대전적에서 자신이 압도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렉 매덕스. 라이브 볼 시대 가장 위대한 투수였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은 커리어 말년이라고 해도 노장이 피어올리는 마지막 불꽃은 결코 경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레예스를 상대로 던진 공들을 보면 컨디션도 여간 좋아보이는 게 아니고 말이지.’
진호가 대지에 두 발을 단단히 뿌리 내린 채 방망이를 움켜쥐고 매덕스를 응시했다. 매덕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볍게 날아드는 매덕스의 공. 하지만 공의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응?’
[잠깐, 이게 뭐죠?]
[고의 사구. 고의 사구입니다. 맙소사. 이게 뭐죠? 1회 초 그렉 매덕스가 연속 안타를 기록 중인 강진호 선수에게 고의 사구를 던지고 있습니다.]
[허, 기가 막히는군요. 연속 안타를 기록 중인 선수에게 고의 사구라뇨. 이건 정말 대놓고 기록 경신을 막겠다는 악랄한 태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요.]
[아뇨,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게 연속 안타 규정의 경우 경기의 모든 타석이 볼넷, 번트, 타격 방해, 주루방해로는 깨지지 않거든요. 즉 최소 한 타석은 상대해야 하는데, 매덕스 선수로서는 1사 주자 없는 상황인 지금 그 승부를 미룰 필요가 없어요.]
[그 말은 지금 강진호 선수에게 볼넷을 주는 것이 그런 고의적인 방해가 아니다 이 말씀이신가요?]
[이거 어쩌면 정말 매덕스 선수가 강진호 선수를 배리 본즈 선수처럼 취급하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전성기 배리 본즈가 강진호보다 쉬운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그냥 고민할 것도 없이 볼넷을 던지면 되는 타자였다. 한참 약물을 빨아 재끼던 시절의 배리 본즈는 대결하는 것이 멍청한 그런 타자였다.
그리고 매덕스가 보기에 최근의 강진호 또한 그러했다. 28경기 121타석 98타수 41안타 11홈런 20볼넷. 0.418/0.525/0.857. 지난 캔자스 시티 로얄스와의 1차전 이후 진호의 성적이었다. 이런 타자를 상대로 정면으로 부딪친다? 매덕스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그냥 뇌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Kang도 예전의 Kang이 아니고, 메츠도 예전의 메츠가 아니니까 말이야.’
진호의 뒤를 이어 마이크 피아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격형 포수. 메이저 역사 속에서 10명밖에 되지 않는 포수 2000안타의 유력한 후보이자 유일한 400홈런의 주인공.
그리고 그가 바로 메츠가 예전의 메츠가 아닌 첫 번째 이유였다.
부웅!!
“스트라잌!!”
그렉 매덕스의 몸쪽 체인지업에 피아자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공격적인 초구 스트라이크. 시카고 컵스의 포수 마이클 바렛이 매덕스에게 공을 건넸다. 글러브로 공을 받으며 1루를 곁눈질하는 매덕스.
‘역시 이전만큼 위협적이지 않아.’
낮은 자세로 언제든 2루를 훔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호였지만 매덕스가 보기에 그것은 그저 주장에 불과했다. 예전, 0.1초라도 시선을 떼면 그대로 2루를 훔칠 것 같던 예리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 27경기. 진호의 도루는 고작 한 번에 불과했다.
몸쪽 투심 패스트볼. 빗맞은 볼이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 0-2. 세트업 포지션에서 매덕스의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딱!!
바깥쪽 체인지업. 방망이 아랫부분을 맞고 튕겨 나온 공이 내야를 한번 찍고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 첫 골드글러브를 받은 이래 2003년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무려 14개년 간 골드글러브를 독점해온 매덕스의 수비가 빛을 발했다.
[그렉 매덕스 땅볼 잡아 그대로 2루에!!]
빠르게 흐르는 타구를 맨손으로 잡아 그대로 2루로 던져버리는 매덕스의 수비. 그것은 도루를 줄였을 뿐. 그래도 여전히 빠른 진호의 발로도 도저히 도착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아웃!!”
[2루에서 아웃!! 토드 워커 그대로 1루의 데렉 리에게!! 아웃!! 삼자범퇴. 시카고 컵스가 무난하게 1회 초 수비이닝을 끝냅니다.]
적극적이지 못한, 그리고 실제로 실력 자체가 조금 감소한 진호의 주루 플레이. 그리고 이전만큼 위협적이지 않은 3번 타자. 마운드를 내려가는 매덕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맞설 수 없는 자연재해에 무식하게 굳이 정면으로 부딪쳐줄 필요가 뭐가 있냐고.’
이미 배리 본즈라는 재앙에게 톡톡하게 당해본 투수. 매덕스가 두 번째 재앙을 맞이해 귀와 귀 사이의 뇌라는 기관을 활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