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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0화 (170/210)

# 170화.

죽음, 세금. 그리고(3)

39세 자신과 똑같은 나이의 투수가 활약하고 간 마운드에 알 라이터가 올라섰다. 강한 에고이즘, 그리고 영리함과 그 영리함을 뒷받침해줄 최소한의 구위까지. 이만큼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매덕스는 질투조차 나지 않을 완벽한 선발 투수였다.

‘뭐, 그러니까 그는 매덕스고 나는 알 라이터지.’

86년 스무 살의 나이로 데뷔해서 2년 차에 곧바로 풀타임 선발 투수를. 그리고 3년 차에 올스타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던 매덕스와 다르게 87년 간신히 빅리그에 데뷔했던 알 라이터가 풀타임 선발이 되기까지 걸렸던 시간은 무려 9년. 그리고 1년이 더 지난 데뷔 10년 차 만 30세의 나이에서야 그는 첫 올스타에 선정될 수 있었다.

마운드에 올라선 알 라이터가 언제나처럼 야수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렉 매덕스에 맞서는 메츠의 선발 투수. 알 라이터입니다.]

[지난 98년 메츠에 자리 잡은 이후 벌써 8년째 메츠에서 뛰고 있는 알 라이터 선수입니다.]

[8년째 투수진의 중심으로 꾸준히 활약해온 알 라이터 선수. 올해 성적은 썩 좋지 못합니다만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죠.]

[올 시즌 지금까지 6승 5패. 평균자책점은 5.49로 작년보다 무려 2점 가깝게 상승했습니다.]

[메츠와의 계약도 올해까지인 만큼 아마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군요.]

[새로운 어메이징 메츠의 시작을 알린 1999년 우승 당시 메츠의 투타의 중심이었던 알 라이터와 마이크 피아자라는 두 선수가 이렇게 부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세월의 흐름이 무섭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알 라이터 선수가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합니다. 지금 통산 승수가 189승으로 200승까지 고작 11승 남았거든요.]

[사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1년 정도 연장계약을 통해 충분히 200승을 달성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습니다만 올해 성적을 봐선 그것도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볍게 주먹을 움켜쥔다. 39살. 한국 나이로 41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두툼한 전완근이 꿈틀댄다. 운동을 게을리한 적은 없었다. 비싼 연봉을 받는 만큼 최고의 트레이너에게 최고의 도움을 받으며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부족했다. 아주 조금의 차이. 그 조금의 차이가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그의 지저분한 변화구들을 앗아갔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 그는 20대 시절 지금의 변화구들을 손에 넣기 전, 그 부족했던 투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컵스의 1번 타자 제리 헤어스톤이 타석에 들어왔다. 2할 중반의 타율과 3할 초반의 출루율 그리고 3할 후반의 장타율을 보여주는 중견수치고는 별 볼 일 없는 방망이의 타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상대하는 알 라이터의 모습은 신중했다. 피아자의 사인에 맞춰 공을 뿌린다. 많은 사람이 피아자의 약한 어깨만을 보고 좋지 못한 포수라 폄훼했지만, 그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알 라이터가 느끼기에 피아자는 분명 좋은 포수였다.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 피아자의 미트가 교묘하게 움직였다.

뻐엉!!

“스트라잌!!”

제리 헤어스톤이 심판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스트라이크일 수 있냐는 어필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알 라이터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판정번복이야 당연히 없으니 괜찮다. 하지만 항의의 형태에 따라서 가끔 심판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보상적인 콜을 부를 때가 있는데 지금 제리 헤어스톤이 하는 꼴을 봐서는 보상은커녕 다음에도 비슷한 코스로 공이 들어간다면 스트라이크 판정을 부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알 라이터의 두 번째 공이 이번에도 바깥쪽을 공략했다. 살짝 높은 코스. 제리 헤어스톤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부웅

“스트라잌!!”

전성기 구위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의 커브였지만 다행스럽게도 타자를 무사히 속여 넘길 수 있었다. 이제 볼카운트는 0-2. 3할의 타자조차 1할대로 만들어버리는 최고의 카운트였다. 피아자가 사인을 건네왔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 답게 피아자가 보내오는 사인이 알 라이터의 마음에 꼭 들었다.

몸쪽 낮은 코스 투심 패스트볼. 제리 헤어스톤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따악!!

호세 레예스가 가볍게 공을 받아 처리했다. 막는 것이 당연한 타구였지만 알 라이터가 가볍게 호세 레예스에에게 감사를 표했다. 알 라이터가 느끼기에 현재 수비적인 부분에 있어서 메츠의 내야는 99년 레이 오도네즈라는 최고의 유격수가 있던 때만큼이나 훌륭했다. 제이슨 바틀렛은 오도네즈 만큼은 아니었지만 견실한 유격수였고 다른 자원들은 수비에서만큼은 당시의 존 올러루드, 로빈 벤츄라, 에드가르도 알폰조 이상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급격하게 구위가 줄어든 알 라이터가 그래도 아직 선발로 뛸 수 있는 것은 이런 내야수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 라이터의 감사를 받은 호세 레예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참을성이 부족하고 할 말과 못할 말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악동 녀석이지만 저런 솔직한 웃음 만큼은 나이에 걸맞게 보기 좋았다.

컵스의 두 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첫 번째 타자인 제리 헤어스톤이 중견수 평균 미만의 타자였다면, 그 뒤를 잇는 토드 워커는 이루수라고 하기에 너무 강력한 타자였다. 커리어 통산 장타율이 0.441. 올 시즌의 경우 무려 0.474라는 장타율을 기록 중인 강타자였다. 언제나 그렇듯 한방이 있는 타자를 상대할 때에는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 알 라이터가 최선을 다해 공을 뿌렸다.

따악!!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타구. 알 라이터가 화급히 몸을 돌렸다. 두둥실 떠오른 야구공. 그리고 그 공이 향하는 끝에는 언제나처럼 진호가 서 있었다.

[강진호 선수의 좋은 수비!! 이제 이런 건 놀랍지도 않습니다. 그냥 당연하다는 느낌이에요. 토드 워커 선수가 굉장히 발이 빠른 선수였거든요. 만약 중견수 자리에 있는 것이 강진호 선수가 아니었다면 방금은 3루타였어요.]

[수수해보이는 수비. 저게 바로 제가 강진호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 강진호 선수는 어려운 수비를 참 아무렇지 않게 해내요. 양키스의 데릭 지터 선수가 화려한 수비로 유명한데 그 선수는 사실 어려운 수비를 어렵게 해내서 화려한거거든요. 반면 우리 강진호 선수가 정말 어렵게 해내는 수비는 강진호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비들이예요. 그러니 쉽게 나오지않고 그만큼 수비가 수수해보이는 거죠.]

알 라이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고마움을 표현하면 어쩔줄 몰라하던 애송이에서 이제는 메이저 전체를 호령하는 선수로 자라난 메츠의 캡틴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8년째, 한결같이 자신의 감사에 어색해하는 캡틴의 얼굴이 듬직하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보자.’

지금까지 무려 일곱 개. 양키스의 전설 요기베라의 열 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개수의 반지였다. 커리어에 비교하자면 과분하기까지 한 반지들.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반지에 대한 욕심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알 라이터가 여덟 번째 반지를 위해 한번 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타석에 컵스의 중심타자 데렉 리가 들어왔다.

***

[아!! 홈런!! 홈런입니다. 아르미스 라미네즈의 2점 홈런. 1회 말, 시카고 컵스가 3: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두타자를 땅볼과 플라이로 잘 잡아냈던 알 라이터 선수. 데렉 리 선수에게 2루타를 내준것에 이어 제로미 버니츠 선수에게 1타점 적시타를. 그리고 아르미스 라미네즈 선수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합니다.]

[방금 공은 알 라이터 선수 답지 않은 안일한 공이였습니다. 라미네즈 정도의 선수에게 저런 공은 배팅볼이나 다름 없죠.]

이제는 여러 투수들에게 밀려 에이스라는 말이 무색한, 메츠의 친절한 에이스 알 라이터.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에이스로 기억 될 그 남자가 홈런을 바라보는 얼굴이 낯설다. 그것은 투수에게 홈런이란 세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옥타비오에게 자신있게 이야기하던 에이스의 듬직한 얼굴이 아니었다. 에러를 범한 야수들에게 괜찮다고. 위축되지 말고 더 과감하게 움직이라고 격려하던 리더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기력함에 슬퍼하는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야구를 잃어버렸던 타임슬립 전의 내가 짓고있던 바로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의 가슴 한켠이 욱씬했다.

딱!!

3루쪽 높게 뜬 파울볼을 데이빗이 완벽하게 처리하면서 이닝이 종료됐다. 돌아온 덕아웃.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구석에서 어깨가 식지 않도록  투수용 점퍼를 걸치고 앉아있는 알 라이터의 얼굴이 땀범벅이다. 그에게 마른 수건 하나를 건넸다. 고맙다 이야기 하며 자신의 얼굴을 닦아내는 알 라이터. 새삼스래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선명했다.

‘3점······.’

이제 고작 1회에 불과했지만, 저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는 절대 적지 않은 점수였다. 게다가 오늘 알 라이터와 컵스의 타자들을 봤을 때 점수가 3점으로 그칠것이라고 믿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승리하고 싶었다. 오늘 알 라이터에게 시즌 일곱 번째 승리를 안겨주고 싶었다.

딱!!

[홈런!! 초구 홈런입니다!! 프레스톤 윌슨!! 프레스톤 윌슨이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시즌 27번째 홈런을 기록합니다!!]

[와우, 방금 이건 정말 대단했습니다. 존을 살짝 빠져나가는 체인지업을 그대로 잡아당겼어요. 이건 처음부터 체인지업을 노렸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군요.]

[2회 초, 메츠의 프레스톤 윌슨이 메츠에게 정말 천금같은 홈런을 선물합니다. 3:0과 3:1은 느낌부터가 다르거든요. 전자가 압도당하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따라잡는 느낌이예요.]

내야를 한바퀴 천천히 돌아온 프레스톤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를 환영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 역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손을 프레스톤이 덥썩 잡아 끌었다.

‘진호야, 우리 오늘도 꼭 이기자.’

8년의 시간동안 알과 함께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눌러담아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시선이 덕아웃 구석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알 라이터에게 꽂혀있다.

‘그래. 이기자.’

그리고 3회 초 나의 두 번째 타석. 2아웃 주자 1루의 상황. 마운드의 그렉 매덕스가 나를 보며 웃었다.

뻐엉!!

[그렉 매덕스!! 3:1 주자 1루의 상황에서 강진호에게 또 다시 고의 사구!!]

[매덕스, 동점 주자를 그냥 내보내버립니다.]

[피아자 선수 다음 바로 첫타석 홈런을 쳤던 프레스톤 윌슨이거든요. 자칫 잘못하면 정말 빅이닝이 될 수도 있는데 그렉 매덕스 이건 너무 과감합니다.]

방망이를 내려놓고 1루로 향했다. 2루에는 내야 안타로 출루한 데이빗이 서있다. 주루가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3루 도루는 꿈꾸기 힘든 상황.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왔다.

***

1루에 선 진호가 보내는 분한 눈빛에 매덕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니까 자연재해님 오늘은 조용하게 있다 가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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