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1화 (171/210)

# 171화.

죽음, 세금. 그리고(4)

호세 레예스가 분노로 이를 갈았다.

‘젠장!!’

진호가 대단한 선수인 것은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저 늙어빠진 투수가 하는 꼴을 좀 보라. 진호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눈에 차지 않는다는 저 오만함에 이가 갈린다. 최근 스물여덟 경기 평균 6.18점의 득점이 증명하듯 현재 메츠의 타선은 그야말로 최고라는 말이 어울렸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것은 저 늙어빠진 투수의 짓거리가 매우 효율적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 마이크 피아자!! 스윙 삼진!! 그렉 매덕스 정말 절묘한 몸쪽 체인지업이었습니다.]

[3회 초. 잔루 1, 2루. 점수는 여전히 3:1. 메츠의 공격이 끝났습니다.]

물론 스물여덟 경기 평균 6.18점의 득점에는 41개의 안타를 기록한 진호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짜증이 난다. 게다가 이 짜증에 정점을 찍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호세 레예스 자신이었다.

혹시라도 레예스 자신이 출루에 성공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당장 1회에도 자신이 출루했더라면 프레스톤의 홈런이 석 점 홈런이 됐을 것이고, 방금도 자신이 출루에 성공했더라면 만루가 되어 투수를 더 압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호세 레예스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괴롭건 뭐건 일단 당장 할 일은 해야 했다. 글러브를 챙겨 들고 그라운드로 향하려는 레예스의 엉덩이를 리키 헨더슨이 툭 건드렸다.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레예스를 향해 리키 헨더슨이 웃으며 말했다.

“이봐, 루키. 어깨에 힘 풀어. 타자는 원래 10번 나가서 7번 지는 직업이라고. 질 때마다 그렇게 신경질 내다가는 아무것도 못 한다.”

항상 팀원 전체와 섞일 생각 따윈 하지 않은 채 한 걸음쯤 물러나 있던 팀 내 최고참의 충고에 레예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도 잘 알거든요.”

“알면 됐고.”

자기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듯 시크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리키 헨더슨.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훅하고 들어온 리키 헨더슨의 조언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흐려진 레예스의 시야를 돌려주었다. 비록 커리어의 끝에 선 선수들을 영감, 퇴물이라 깔아뭉갰지만 호세 레예스 자신도 그들이 쌓아 올린 커리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 나이까지 빅리그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레예스는 저들이 자신의 나이에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당대의 저물어가는 전설들을 밟고 올라선 자만이 시대의 지배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

스티브 칼튼과 게일로드 페리를 이겨낸 저 리키 헨더슨처럼. 로저 클레멘스와 그렉 매덕스를 이겨낸 강진호처럼.

호세 레예스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매덕스를 바라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영감, 그렇게 계속 무시해보라고.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여줄 테니까.’

***

매사에 진지한 만큼 성실한 제이슨 바틀렛. 성급하지만 친화력 있는 호세 레예스. 베테랑들에게 가장 깍듯한 신종운. 각자 뚜렷한 특색들을 가지고 있는 메츠의 젊은 피들 가운데 데이비드 라이트는 가장 무난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플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대부분의 툴이 준수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특출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클럽하우스의 베테랑들은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만약 저 중에 진호의 다음 세대를 이끌 녀석이 있다면 거기에 가장 가까운 녀석은 저 녀석이다.’

5회 초. 타석에 메츠의 7번 타자. 데이비드 라이트가 올라왔다.

[자, 5회 초 메츠의 공격. 타석에 7번 타자 데이비드 라이트 선수가 올라옵니다.]

[작년 확장 로스터를 통해 메이저에 데뷔했던 데이비드 라이트 선수. 작년 시즌에는 그리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만 올 시즌 올스타급 삼루수인 에드가르도 알폰조 선수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워주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타격도 수비도 모두 에드가르도 선수에게 조금씩 부족한 모습입니다만 그래도 22살 사실상 메이저 1년 차의 루키가 풀타임을 소화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는 건 정말 훌륭합니다.]

데이비드 라이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오늘 경기 전 미리 숙지해둔 몇 가지 정보들이 머릿속을 오간다.

‘기온 32도. 투구 수 72개. 땅볼 타구를 처리한다고 뛰어다닌 거리도 상당해.’

그렉 매덕스의 88년 포텐셜을 터트린 이후 02년까지 그렉 매덕스의 커리어 평균자책점은 2.68이었다. 게다가 02년 만 36세 시즌에도 매덕스의 평균자책점은 2.62로 노쇠화 따위는 모른다는 피칭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03년 그의 평균자책점은 3.96으로 급상승했고 04년에는 포텐셜 폭발 이후 처음으로 4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05년 올해 지금까지 매덕스의 평균자책점은 3.47. 얼핏 보면 만 39세 시즌에 회춘이라도 한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드는 성적이다. 하지만 그럴 리 만무했다. 자연은 냉정한 법이고 나이를 먹은 인간은 약해진다. 작년과 재작년 같은 시기를 기준으로 매덕스의 평균자책점은 2.98 그리고 3.41이었다. 즉 지금의 매덕스는 시즌을 풀로 치를 체력이 되지 않았다.

뻐엉!!

매덕스의 투심이 날카롭게 존을 공략했다. 심판의 손이 올라온다.

“스트라잌!!”

전광판에 찍히는 숫자는 86. 경기 초반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구속이었다. 묵묵하게 배트를 쥐고 다시 타격자세를 잡는 데이비드 라이트. 슬슬 지쳐야 하는 투수의 건재함에도 그의 얼굴에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마운드의 그렉 매덕스가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방망이를 움켜쥔 데이비드 라이트의 손에 힘이 실린다.

뻐엉!!

반쯤 돌아간 배트를 멈춰 세운 라이트. 존 밖으로 슬쩍 빠지는 체인지업이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잠시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한 라이트가 타석 밖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헬멧을 고쳐 쓰고 침을 한번 탁 뱉은 그가 다시 타석에 들어와 타격자세에 들어갔다.

제3구.

데이비드 라이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딱!!

[데이비드 라이트 쳤습니다!! 잡아당긴 타구!! 빠르게 2, 3루 간을 뚫어냅니다!!]

[몸쪽 체인지업을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받아칩니다!!]

[와, 이 선수 오늘 정말 잘 치는데요? 첫 번째 타석 내야 안타에 이어 두 번째 안타입니다.]

그렉 매덕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뭐야, 설마 저 애송이도 또 그 종류인가?’

엿 같은 토니 그윈, 그리고 마찬가지로 엿 같은 강진호. 평생에 걸쳐 딱 두 번 마주쳤던 구속의 차이를 감지하는 아주 엿 같은 타자들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면 두 인간 모두 지금 타석에 있던 녀석처럼 별다른 특징 없이 수수하게 전부 다 잘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매덕스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잘했어.”

현재 팀에서 나온 세 개의 안타 중 두 개가 이 데이비드 라이트의 손에서 나왔다. 비록 프레스톤 윌슨의 홈런과 달리 점수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데이비드 라이트의 안타를 칭찬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타석으로 들어오는 바틀렛을 향해 가슴을 두 번 두들겼다. 데이비드의 응원에 대한 답변일까? 바틀렛 역시 데이빗을 향해 자신의 가슴을 두 번 두들긴다.

그 꼴을 구경하던 매덕스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공을 뿌렸다. 초구 몸쪽 투심 패스트볼. 87마일의 빠른 공이 존을 공략했다.

뻐엉!!

“스트라잌!!”

한때 메이저 최고의 투심으로 손꼽혔던 매덕스의 투심이다. 제이슨 바틀렛이 바깥 코스 공 반개 걸치게 들어간 투심 패스트볼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1루의 애송이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피칭을 망가트릴 만큼 매덕스의 경험은 녹록하지 않았다. 볼카운트 0-1. 매덕스의 두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몸쪽 체인지업. 이번에는 튀어나온 제이슨 바틀렛의 배트가 공을 스쳤다.

따악!!

빗맞은 타구가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 0-2. 그럭저럭 타자의 배트 타이밍이 맞은 것이 거슬리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투수에게 완벽하게 유리한 볼카운트라는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망설일 이유 따윈 없었다. 빠르게 공을 건네받은 매덕스가 그대로 세 번째 공을 뿌렸다. 몸쪽 체인지업에 이은 바깥쪽 체인지업. 비록 전성기의 구위는 아니라고 하지만 하위 타순의 애송이가 쳐낼 만한 공은 아니었다.

따악!!

제이슨 바틀렛의 완벽한 스윙.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돌아간 배트가 매덕스의 체인지업을 두들겼다.

[제이슨 바틀렛, 1, 2루 간을 뚫는 강한 타구!!]

[1루 주자 2루에!! 2루 지나 3루까지!!]

주자 1, 3루. 데이비드 라이트와 제이슨 바틀렛이 시선을 교환했다.

‘데이빗, 네 말이 맞았어. 체인지업 쪽이 팔 높이가 더 낮아.’

토니 그윈 혹은 진호와는 달랐다. 데이비드 라이트에게는 그들처럼 구속의 가감을 0.01초의 시간 안에 감지하는 능력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렉 매덕스 역시 달랐다. 오직 토니 그윈과 진호에게만 공략당하던 시절의 완벽한 폼은 체력이 떨어진 시즌 후반. 32도의 무더위와 78개의 투구 수 속에 망가져 있었다.

‘빌어먹을. 문제가 있던 건 내 쪽이었나?’

하지만 미세하게 망가진 폼과 달리 매덕스의 두뇌는 여전히 영민했다. 두 타자 연속 완벽하게 자신의 체인지업을 공략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깨닫지 못한 버릇이 들통났음을 깨달았다. 타석에 9번 타자 알 라이터가 들어왔다. 내셔널 리그 대부분의 투수 타석이 그러듯 알 라이터의 타석 역시 매덕스에게 한숨을 돌릴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삼구 삼진.

5회 초, 원 아웃 주자 1, 3루의 상황에서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던 호세 레예스가 들어왔다.

[5회 초 3:1 상황. 원 아웃 주자 1, 3루. 메츠에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습니다.]

[큰 것 한방이면 역전. 그게 아니더라도 1루 주자가 매우 빠른 주자인 만큼 2루타 하나 정도면 동점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타석에는 1번 타자 호세 레예스. 오늘은 2타수 무안타이지만 그래도 한 방이 있는 타자입니다. 오늘 경기 여기서 충분히 뒤집힐 수 있습니다.]

마운드 뒤편 로진백을 두들기는 매덕스의 손길이 차분했다.

‘체인지업은 존 밖으로 완전히 빠지는 유인구로만 사용한다.’

상대방의 노림수를 알아낸 이상 또다시 넘어갈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는 이전 두 번의 타석을 통해 치고 싶다는 욕심을 여실하게 드러낸 22살의 애송이다. 살살 성질만 긁어 준다면 제풀을 참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공에 배트를 휘둘러 병살을 만들어줄 것이다.

넓은 스탠스. 한껏 세운 배트. 큰 것 한 방으로 담장을 넘겨버리겠다는 의지로 가득해 보이는 레예스를 향해 매덕스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볼 반개 차이로 존을 빠져나가는 속구. 레예스의 배트가 움직이지 않았다.

뻐엉!!

‘역시, 체인지업만 노리는 건가?’

두 번째 바깥쪽 높은 체인지업. 존 밖으로 공 두 개는 빠지는 터무니없는 공이였다.

부웅!!

호세 레예스의 시원한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얼굴에 가득 차오르는 아쉬운 표정에 매덕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뭐야, 이 멍청이는. 너무 티가 나잖아.’

이렇게 된 이상 망설일 이유 따윈 없었다. 87마일의 날카로운 투심이 존을 공략했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1-2. 네 번째 아슬아슬하게 존을 긁어 주는 슬라이더.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배트를 움직이지 않는 호세 레예스를 보며 한층 더 확신할 수 있다. 파악된 것은 오직 체이지 업뿐. 녀석들이 노리는 공 역시 체인지업뿐이다.

다섯 번째, 초구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존 밖으로 빠지는 체인지업. 호세 레예스의 배트가 힘차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체인지업의 느린 구속 탓일까? 아니면 초구를 통해 교훈을 얻은 것일까. 반쯤 흘러나온 레예스의 배트가 멈춰섰다.

[호세 레예스, 빠지는 공을 잘 참아냅니다.]

[풀카운트!! 레예스 선수가 생각보다 많은 공을 끌어내며 끈질기게 승부를 이어가네요.]

[자, 호세 레예스 여기서 정말 신중해야 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안타를 쳐서 점수를 만드는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 볼만 골라내더라도 만루에서 강진호 선수에게 찬스를 건네주는 겁니다. 아무리 매덕스 선수가 강진호 선수와의 승부를 피하더라도 3:1상황 만루에서까지 고의 사구를 던질 수는 없거든요.]

‘공 한 개,’

몸쪽 낮은 코스. 매덕스의 체인지업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호세 레예스의 배트가 움직이지 않았다.

뻐엉!!

[볼넷!! 볼넷입니다!!]

[대단한 참을성!! 풀카운트에서 호세 레예스가 완벽하게 공을 골라냅니다.]

호세 레예스가 방망이를 내려놓고 1루를 향해 천천히 뛰어갔다.

‘어때, 영감. 머리는 당신만 쓰는 게 아니라고.’

5회 초. 원 아웃 만루.

2타석 0타수 2볼넷. 타석에 현역 최강의 타자 강진호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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