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2화 (172/210)

# 172화.

죽음, 세금. 그리고(5)

[5회 초, 원 아웃 만루 상황. 점수는 3:1. 타석에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오늘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모두 볼넷으로 출루했던 강진호!! 그렉 매덕스가 오늘 강진호를 철저하게 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겠는데요?]

[그렇죠. 만루에서 볼넷을 준다는 건 그냥 1점을 준다는 거거든요. 지금 점수라도 넉넉하면 모르겠습니다만 3:1의 빡빡한 상황. 1점도 쉽게 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1루, 2루, 3루 베이스 위에 서 있는 녀석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녀석들이.’

하지만 우습게도 녀석들의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다. 나 자신조차도 지금의 나라면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루틴을 실행하고 가장 편안한 상태로 타석에 올라왔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그렉 매덕스가 짜증 가득 섞인 표정으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크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팀의 루키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이 여간 분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로진백을 몇 번 탁탁 두들긴 매덕스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3:1이라.’

이미 루상에 역전주자까지 나가 있는 상황. 세 명 모두 발이 느린 주자들도 아니다. 특히 1루의 호세 레예스 같은 경우 현재 리그에서 손에 꼽을 만큼 빠른 주자였다. 외야로 향하는 적시타 하나면 충분히 역전까지 나올만한 상황.

그렉 매덕스가 공을 뿌렸다.

[어?]

‘이런 미친?’

[고의사구!! 5회 초. 원 아웃 만루. 3:1 상황에서 그렉 매덕스가 또 강진호를 볼넷으로 내보냅니다.]

[와, 이건 정말 뭐라고 말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건 이번 경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강진호 선수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 같은데요? 그래도 그렇지 점수를 주면서까지 승부를 피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렉 매덕스의 선택이 옳을 수도 있긴 합니다.]

[지금 이 고의사구가 옳다고요?]

[지난 캔자스 시티 로얄스와의 1차전 이후 강진호 선수의 타율이 0.418 장타율은 0.857이거든요. 이 말은 4할이 넘는 확률로 2점 혹은 3점을 내준다는 의미예요. 지금 매덕스 선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1점을 내준 셈이거든요. 기댓값으로 따지면 오히려 지금 이 선택이 싸게 막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강진호 선수의 위대함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2차 대전 이후로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낸 선수는 98년의 배리 본즈 선수 이후 강진호 선수가 처음입니다. 2차 대전 이전의 기록까지 다 한다고 해도 오늘 이 기록까지 여섯 번밖에 되지 않는 기록이고요. 그야말로 2차 대전 이후, 라이브 볼 시대 가장 강력하게 시대를 지배한 타자의 증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군요.]

설마 매덕스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를 거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타석으로 마이크 피아자가 올라온다. 베테랑답지 않게 살짝 흥분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만루에서 앞선 타자에게 고의사구를 내주고 자신을 상대하겠다는데 화나지 않을 타자는 없다. 심지어 마이크 피아자는 역사상 가장 뜨거운 방망이를 지닌 포수로 불릴 만큼 대단한 타자다. 모욕도 이런 모욕은 없었다. 하지만 타석에서 흥분이란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다.

‘피아자 씨, 흥분 가라앉히고 제발 침착하게!!’

내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피아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말하지 않고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흥분한 마이크 피아자는 능구렁이 같은 그렉 매덕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딱!!

[쳤습니다!! 낮게 깔린 땅볼 타구. 그렉 매덕스 잡아서 2루에!!]

“아웃!!”

[이루수 토드 워커 그대로 1루까지!!!]

“아웃!!”

[깔끔한 병살타. 그렉 매덕스가 만루에서 1점만을 내준 채 무사히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와, 이렇게 되면 매덕스의 작전은 성공적인 작전이었다고 봐야 하는 거겠죠?]

[글쎄요, 강진호 선수의 타석이 없었던 만큼 뭐라 확신하긴 힘듭니다만, 매덕스로서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그대로 실행했으니 이건 성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군요.]

***

“젠장!!”

마이크 피아자가 헬멧을 집어 던졌다. 무언가 부딪히고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스키틀즈를 담은 통이 데구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 요란함 속에서 덕아웃의 그 누구도 피아자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지금 이 자리에 피아자가 없다는 것 같은 외면이자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팀원들의 배려였다. 그 사소한 배려 속에서 한바탕 신경질로 분노를 덜어낸 피아자가 무거운 포수의 장비들을 착용했다.

그런 피아자의 어깨를 알 라이터가 툭 한번 두들기고 마운드로 올라간다.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 같은 왕년의 에이스. 그리고 05시즌 메츠의 다섯 번째 선발의 등이 이상하게 듬직했다.

딱!!

바닥을 세 번 튕겨 날아드는 타구를 호세 레예스가 반쯤 몸을 날려가며 맨손으로 잽싸게 잡아냈다. 그대로 반쯤 몸을 틀어 가볍게 던진 송구. 약간 삐뚤게 날아드는 그 송구를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가볍게 잡아낸다.

“아웃!!”

자신만 믿으라는 것처럼 멋지게 나선 것 치고는 조금 모양 빠지는 형태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닝이 종료되고 마치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땀으로 범벅이 된 알 라이터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런 알 라이터에게 조 매든이 다가왔다.

“수고했다.”

알 라이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괜찮습니다.”

“벌써 97개야. 마음은 알겠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하지만!!”

알 라이터의 항변에 조 매든이 말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오른손을 힘껏 움켜쥐는 알 라이터. 조 매든의 두꺼운 손이 알 라이터의 손을 더 강하게 옥죄였다. 자신의 손을 누르는 조 매든의 악력을 느끼는 순간, 알 라이터는 자신의 악력이 심각하게 저하됐음을 깨달았다. 알 라이터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콘티!! 여기 아이싱 좀 부탁하지.”

6이닝 3실점 투구 수 97개. 알 라이터가 퀄리티 스타트를 달성했지만, 승리 요건은 채우지 못한 채 강판당했다.

***

알 라이터에게 승리를 챙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승리를 챙겨주는 것은 무리가 돼버렸다. 남은 것은 그를 패배하지 않게 하는 일뿐.

‘하지만 어떻게.’

부웅

“스트라잌!! 아웃!!”

타석에서 큰 것 한 방을 노리던 프레스톤이 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알 라이터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프레스톤 녀석 역시 알 라이터에게 승리를 챙겨주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만루에서조차 나에게 고의사구를 던질 만큼 철저하게 승부를 피하는 투수를 상대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빠르게 나를 찾아왔다.

[매덕스!! 연속 안타!! 천하의 매덕스도 지친 걸까요? 매덕스가 두 타자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합니다.]

[메츠와의 점수 차인 고작 1점. 위험한 순간입니다.]

[자, 타석에는 1번 타자 호세 레예스. 오늘 2타수 무안타 1볼넷. 바로 직전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냈었습니다.]

[오늘 수비에서는 연달아 좋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타석에서는 영 부진했거든요. 보통 수비가 잘되는 날에는 공격도 잘 풀리기 마련이에요. 호세 레예스의 타석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 사실 여기서 호세 레예스 선수가 또다시 볼넷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지금 1점이 더 나면 동점이 되는 건데, 만약 만루에서 또 강진호가 올라온다면 매덕스가 어떻게 나올지 하는 궁금증 말이죠.]

[글쎄요, 저도 좀 궁금하긴 하군요.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된다면 오늘 같은 상황에서 강진호 선수가 또다시 타석에 들어온다고 확신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네? 어째서죠? 지금 메츠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가 강진호인데 절호의 찬스에서 강진호 선수가 올라오지 않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아직 시즌 중반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메츠가 승수에 여유가 조금 있거든요. 그런데 연속경기 안타를 이어가는 타자에게 굳이 딱 한 타석만으로 그 기록이 깨질 환경을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좀 의문이란 말이죠.]

[아! 오늘 경기 강진호 선수의 경우 3타석 0타수 3볼넷이었으니 강진호 선수 타석에서 대타를 올리게 되면 기록 자체는 깨지지 않는다 그 말씀이로군요.]

[네, 그렇죠. 솔직히 기회라고 딱 한 타석을 주고 안타를 못 쳐서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중단되는 건 좀 그렇죠. 아마 강진호 선수가 나간다고 해도 오히려 프런트에서 말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프랜차이즈 신기록이니까 말이죠.]

마운드의 매덕스가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포수 마이클 바렛이 마운드로 올라가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연신 고개를 젓는 매덕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마이클 바렛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든 연결해 드리죠.’

대기 타석을 떠나기 전 호세 레예스가 나에게 건넨 이야기. 매덕스라는 투수의 이름값에 억눌리지 않는 저 신인들의 패기가 보기 좋았다.

몇 개의 공이 오갔다. 존을 통과하고 커트하고 쳐내고 빗나가는 공. 그리고 여섯 번째 공이 매덕스의 손을 떠났다.

뻐엉!!

뭐라 판정해도 이상하지 않은 코스로 들어온 아슬아슬한 공이다. 매덕스라는 이름값, 그리고 타석에 선 타자가 루키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트라이크를 주는 것이 당연한 공. 하지만 오늘 야구의 신은 아무래도 가장 극적인 순간을 원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맙소사!! 볼넷!! 볼넷입니다.]

[호세 레예스가 또 다시 볼넷을 얻어내며 출루에 성공합니다.]

[5회에 이은 두 번째 만루. 이제 타석에 우리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과연 메츠에서 대타를 기용할까요?]

나를 바라보는 조 매든 감독의 표정이 험상궂었다. 그리고 덕아웃에 앉아있는 알 라이터의 등은 왜소했다. 나를 바라보는 조 매든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가 힐끔 마이크 제이콥에게 향했다. 강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자신이 욕을 뒤집어쓰고 나의 기록을 유지해주겠다는 눈빛이다. 그런 그를 향해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차례입니다.’

10번을 나서면 7번을 지는 것이 타자다. 그리고 그런 확률을 고려할 때 24경기 연속 안타를 쳐내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남은 커리어 속에 다시는 오지 못할 일일지도 모른다. 1할에 가까운 커리어 타율과 커리어 출루율의 차이가 말해주듯이 기본적으로 나는 좋지 않은 공까지 억지로 배트를 휘두르기보다 최대한 출루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 타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사람들은 종종 대단한 기록에 열광하고 그 기록을 신성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기록이 갖는 의미는 기록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조 디마지오가 위대한 것은 56경기 연속으로 안타를 쳤기 때문이 아니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의 의미는 그가 56경기 내내 위대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방망이를 움켜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프랜차이즈 신기록. 3번의 볼넷과 3:2 1점의 점수 차이. 만루. 그리고 마운드에는 라이브 볼 시대 가장 위대한 투수인 그렉 매덕스까지. 지금이야말로 타자가 위대해질 수 있는 모든 재료가 갖춰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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