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3화 (173/210)

# 173화.

죽음, 세금. 그리고(6)

“아하하!! 그래 이거지!! 레예스 너 이 자식!! 형은 네가 해낼 줄 알았다고. 내가 오늘 당장 네 도루가 영양가 없다고 올렸던 게시글 내려주마.”

형석의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형석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연속되는 고의사구. 밀어내기 고의사구. 그리고 8회 초 1점차의 상황에서 그림 같이 돌아온 두 번째 만루. 형석의 머리 한쪽에 진호의 연속 안타에 대한 걱정이 잠시 스쳤지만, 그 걱정은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응원해 온 강진호라면 여기서 피할 리 만무했다. 또한, 강진호라면 여기서 한 방 날려줄 것이 분명했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리듯 돌아가는 형석 자신의 지루한 인생과는 달랐다. 강진호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슈퍼 히어로는 언제나처럼 그가 꿈으로만 꾸는 무언가를 현실에서 보여줄 것이다.

“여봇!!! 화장실 청소한다고 들어가더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어!! 자기야. 잠깐만, 지금 음악 들으면서 청소하다가 MP3가 주머니에서 빠져서.”

1년 반 전 맞선에서 만날 때만 하더라도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던 천사는 임신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일요일 곰팡이가 피려고 하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30대의 가장뿐. 귓구멍이 이어폰을 다시 꼽은 형석이 한 평 반짜리 좁은 화장실을 마치 이등병 시절처럼 치약 묻은 칫솔로 박박 문대기 시작했다.

***

마운드로 올라오는 마이클 바렛을 향한 매덕스의 시선이 마뜩잖았다.

‘멍청한 자식.’

도무지 요즘 포수라는 것들은 정이 가지 않는다. 그저 덕아웃에서 지시하는 공을 받아내는 기계일 뿐.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공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컵스의 포수인 마이클 바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수아비한테 마스크를 씌워도 저 자식보단 낫겠지. 허수아비는 최소한 가만히라도 있으니 말이야.’

“헤이, 그렉. 지금 점수 차이 알고는 있는 거죠?”

“위클리의 전광판이 거지 같기는 해도 점수판을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라고.”

“그런데 지금 밀어내기 볼넷을 또 하자고요? 아까 3:1에서야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그렇게 되면 동점이라고요.”

“배운 지 30년쯤 돼서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2에서 1을 더하면 3이 되는 걸 그렇게 장황하게 강의 해 줄 필요는 없다고. 그러니까 가서 닥치고 공이나 받아.”

6피트(183cm)의 자신보다 4인치(10cm)쯤 더 크고 20파운드쯤 더 나가는 마이클 바렛에게 으르렁거리듯 이야기하는 그렉 매덕스. 그런 매덕스의 기세에 바렛이 움찔했다.

‘진짜 성질 하고는. 어휴, 진짜 투수라는 놈들은 왜 죄다 이런 놈들뿐인지.’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마이클 바렛 자신만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컵스의 감독 더스티 베이커의 지시였다. 마이클 바렛에 애써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 지시예요.”

“베이커 감독이?”

이름값 없는 그저 그런 감독이라면 매덕스 자신의 권위로 찍어누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감독이 더스티 베이커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메이저에서 현역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독들 가운데 유일하게 바비 발렌타인에게 비벼볼 만한 커리어를 지닌 감독이 바로 더스티 베이커였다. 그는 93년 97년 2000년 세 차례나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으며, 시즌 중반에 바비 발렌타인이 실직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현역감독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매덕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을 이만큼이나 믿는다는 것 한 가지 만으로도 그는 그 명성에 어울릴 만큼은 유능했다. 애초에 5회 만루에서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했던 것 자체가 더스티 베이커 감독이 매덕스라는 투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그리고 강진호라는 타자의 위험성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의 유능함도 결국 여기가 한계인 듯 싶었다.

매덕스의 시선이 덕아웃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는 베이커 감독에게 향했다. 근심으로 가득해 보이는 까만 얼굴에 서린 단호함이 보였다. 지금 승부를 강행시키는 것은 지금 여기서 그렉 매덕스가 강진호를 막아낼 확률이 컵스가 남은 이닝 중에 추가점을 낼 확률보다 높다는 판단에서 나온 더스티 베이커 감독 나름의 승부수였다.

물론 매덕스의 판단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젠장.”

“오늘 그렉씨 컨디션 좋아요. 그건 공을 받는 제가 보장합니다. 그러니까 자신 있게 던져도 괜찮을 거예요.”

자기 딴에는 투수를 격려한다고 지껄이는, 하지만 매덕스가 듣기에는 개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야기를 늘여놓는 마이클 바렛. 그를 바라보던 매덕스가 짜증으로 가득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은근히 속삭였다.

‘이봐, 마이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고의사구로 밀어내자고. 이번 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고 다음 공격에서 1점만 더 만들어주면 오늘 경기 내가 책임지고 가지고 와줄 테니까 말이야.’

‘죄송해요.’

물론 그딴 말이 통할 리는 만무했다. 올 시즌 갑자기 기량을 폭발시킨 메츠의 계투요원 아론 하일맨. 그리고 벌써 몇 년째 최정상급의 마무리로 활약 중인 옥타비오 도텔은 절대 만만한 투수들이 아니었다. 그들을 상대로 점수를 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했다. 마이클 바렛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젠장. 하여간 죄다 멍청이들뿐이라니까.’

덕아웃의 더스티 베이커에게 한 번, 그리고 홈플레이트 너머 마이클 바렛에게 두 번. 매덕스가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어줬다. 어찌 됐건 이미 강진호와의 승부는 피할 수 없어졌다. 매덕스가 가볍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별수 없는 건 별수 없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매덕스 자신의 전설적인 커리어에 정점을 찍을 날일지도 몰랐다. 라이브 볼 시대 최고의 투수 그렉 매덕스. 39세 그리고 107개의 투구 수. 그리고 상대는 앞서 세 차례나 볼넷으로 보내버렸던 현역 최강, 아니 어쩌면 2차대전 이후 최강이 될지도 모르는 타자. 매덕스가 자신의 위대한 전설의 끄트머리를 장식 할 수 있는 최악최흉의 맹수를 향해 야구공을 겨눴다.

***

[아, 메츠 대타를 내놓지 않습니다. 타석에 강진호, 우리 강진호 선수가 그대로 들어옵니다.]

[와, 이건 강진호 선수라고 해도 좀 부담스럽겠는데요? 솔직히 기록이라는 것이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게다가 정확하게 프랜차이즈 신기록 달성이라는 타이틀이 딱 걸린 순간입니다.]

[글쎄요. 물론 연속 경기 안타에 고작 한 타석의 기회만 주어진다는 것은 확실히 부담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우리 강진호 선수가 기록했던 여러 가지 기록들에 비하면 이건 그다지 부담스러운 기록도 아니거든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안타 하나면 그대로 역전이 가능한 상황. 그렉 매덕스 선수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만루 상황. 매덕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글러브 안에 감춰져 있던 손이 머리 뒤에서 빠져 나와 귀를 지나는 순간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인다.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은 동작. 던진다기보다 때린다는 느낌의 손끝에서 공이 날아들었다.

‘바깥쪽.’

바깥쪽 높은 코스. 존을 슬쩍 벗어나는 높은 공이였다. 때려내려고 한다면 충분히 때려낼 수 있는 공. 하지만 아직 볼카운트는 0-0. 지켜볼 여유가 충분한 카운트였다. 반쯤 돌아간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스트라잌!!”

‘응?’

[그렉 매덕스!! 바깥쪽 높은 속구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방금 이건 조금 높지 않았나 싶은데요.]

[제가 보기에도 조금 높은 코스의 공이었습니다만, 심판이 이걸 잡아주는군요.]

그리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약간 벗어난다고 판단하긴 했지만, 충분히 스트라이크를 선언할 수 있는 범위의 공이기도 했다. 볼카운트 0-1. 매덕스가 곧바로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공이 향한 곳은 아슬아슬한 귀퉁이. 서른아홉의 나이에 100개가 넘는 공을 던졌음에도 살아있는 구위와 커맨드에 역시 매덕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뻐엉!!

[2구째!! 몸쪽 높은 공!! 살짝 빠진 공입니다.]

게다가 나에 관한 연구 역시 확실했다. 타율로만 본다면 나의 핫존은 온통 빨간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타구의 질로만 따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현재 나의 스윙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어퍼스윙. 현재 시점에서 대부분 투수가 미덕으로 생각하는 낮은 코스의 공을 공략하는데 최적화된 스윙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장 약한 곳은 몸쪽 높은 코스 그리고 그다음은 바깥쪽 높은 코스였다. 물론 어찌어찌 배트는 가져다 댈 수는 있었고 기본적으로 스윙에 힘이 있는 만큼 안타가 생산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높은 땅볼 안타 비율을 보이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높은 코스 공을 못 치는 건 아닌데 말이지.’

조용히 매덕스의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그의 손을 출발하는 빠른 공. 이번에도 역시 빠깥코스 빠른 공이였다. 나의 타격 매커니즘 상 가장 불리한 코스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투수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존의 중심에 영점을 맞추고 있기에 그런 것뿐. 애초에 높은 코스를 대비하고 있다면 질 좋은 타구를 만들지 못할 이유 따윈 없었다.

힘차게 돌아가는 방망이. 하지만 배트가 1/3 정도 돌아간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말이다. 안쪽으로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오는 야구공. 매덕스의 세 번째 공은 속구가 아닌 슬라이더였다. 돌아가던 배트를 힘껏 멈춰 세웠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클 바렛이 손가락을 들어 삼루심의 판정을 요구했다.

“스트라잌!!”

[아!! 삼루심이 배트가 돌아갔다고 판정하네요.]

[이렇게 되면 벌써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앞선 타석들에서 배트를 휘둘러볼 기회도 없어서 타격감이 떨어진 걸까요? 강진호 선수 위기입니다.]

특별한 기록을 앞에 둔 인간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기록이 무산되기 직전의 순간에 더더욱 그러하다. 프랜차이즈 신기록이 무산되기까지 고작 1개의 스트라이크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신기하리만큼 긴장이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상황을 이렇게 만든 매덕스에 대한 감탄이 먼저 튀어나왔다.

‘역시 그렉 매덕스라고 해야 하나?’

그의 현재 실력에 대한 감탄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렉 매덕스라는 투수가 쌓아 온 커리어에 대한 감탄이었다. 앞선 스트라이크, 그리고 이번의 스윙판정. 모두 나의 기준에 의하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렉 매덕스라는 투수가 쌓아 올린 커리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그의 손을 들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야구의 일부였다.

볼카운트 1-2. 그렉 매덕스가 네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한 코스로 날아드는 공.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긴 몸을 반의 반 박자 더 당긴다. 어차피 85마일 전후의 느린 공이다.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무지막지한 힘이 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내야수의 키를 넘기는 그런 공이면 충분하다.

몸쪽 높은 코스.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공. 하지만 그렉 매덕스이기에 이 공은 스트라이크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나의 몸이 번개처럼 돌아갔다.

언제나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선수들은 결정적인 순간 가장 극적인 형태로 심판마저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위대한 커리어의 전설들을 넘어선다. 그렇기에 야구는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런 극적인 순간은 시시한 법이 없었다. 야구의 신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화끈한 법이니 말이다.

[넘어갑니다!! 강진호 홈런! 홈런입니다!! 시즌 세 번째 만루 홈런!!]

[주자를 일소시키는 강진호의 밀어 친 홈런!! 3:2로 뒤지던 메츠가 단숨에 역전에 성공합니다.]

[역시 강진호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슬쩍 건드린 것 같은데 이게 또 이렇게 넘어가네요.]

[날씨도 강진호 선수를 돕습니다. 이건 정말 순풍이 돕지 않았다면 넘어가기 힘든 타구였습니다. 그 정도로 정말 아슬아슬한 홈런이에요.]

[프랜차이즈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홈런으로 경신하는 강진호!! 이건 마치 90년대를 지배했던 투수에게 21세기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 같습니다.]

-경기를 결정짓는 시즌 29호 홈런. 강진호 25경기 연속 안타. 메츠 프랜차이즈 기록 경신!!-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4타석 1타수 1안타 1홈런 3볼넷. 강진호의 완벽한 승리!!-

-인생을 살다 보면 죽음. 그리고 세금 말고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종종 있다. 켄 그리피의 골드 글러브라던지 매덕스의 15승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우리는 Kang의 안타라는 새로운 피할 수 없는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어제 경기를 보기 전까지의 본 필자는 고작 24경기째에 The hitting streak를 논하는 그 패기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단 한 번의 기회에 홈런을 만들어내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쩌면 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본 필자뿐 아니라 메이저리그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아, 물론 양키스의 팬들은 제외해야겠지만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