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왕조의 조건(1)
따악!!
[쳤습니다!! 강한 타구!! 담장!! 담장!! 담장 넘어갑니다. 9회 말 카디널스의 역전승!! 알버트 푸홀스가 카디널스의 승리를 가져옵니다.]
[바깥쪽으로 크게 빠지는 공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받아넘기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알버트 푸홀스, 지난 01년 데뷔 때부터 꾸준히 대단했습니다만 올해야 말로라는 느낌입니다.]
[이 선수를 보면 참 안타까워요. 01년 데뷔 이후로 Kang과 배리 본즈에게 번번이 고배를 마시더니 작년의 경우에는 FA를 앞두고 갑자기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한 벨트레 선수에게 아깝게 밀렸어요. 5년간 MVP 3위 3번에 2위 2번입니다.]
[배리 본즈 선수의 재판 결과에 따라 2002년의 기록이 말소된다면 당해 MVP는 차점자였던 푸홀스 선수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습니다만 그래도 MVP를 직접 수상하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올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올해도 메츠 Kang 선수 활약이 만만치는 않습니다. 시즌 초반만 해도 푸홀스 선수에 비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었는데 시즌을 한 달 반 남긴 지금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시 치고 올라왔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홈런 수에서는 푸홀스 선수가 우세합니다. 최근 이주일동안 강진호 선수가 홈런을 추가하지 못한 반면에 푸홀스 선수는 무려 5홈런을 추가했습니다.]
[지금 Kang 선수가 36경기 연속 안타 중인가요?]
[네, 오늘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함으로써 루이스 카스티요 선수가 지난 2002년 기록했던 현역 최다 연속 안타인 35경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요즘 Kang과 푸홀스를 보고 있자면 마치 과거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가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잘했어. 알버트.”
홈런을 쳐낸 푸홀스가 동료들의 환호 속에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9회 말의 대역전극. 하지만 푸홀스는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이야.’
데뷔 이후 단 한번도 차지하지 못했던 MVP. 시즌 중반 까지만 해도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던 그것이 또다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제 남은 경기는 약 50경기. 이미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을 메츠의 강진호를 향해 푸홀스가 전의를 불태웠다.
***
왜소한 체구에 까만 얼굴. 전형적인 운동 부족을 상징하는 ET 체형의 몸매. IIT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온지 4년 째. 리테시 라즈풋이 초조하게 사무실 안을 서성였다.
딸깍
사무실 문이 열리고 리테시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의 백인 사내가 들어왔다. 바로 사무실의 주인 프리드먼이였다.
“단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 말 없이 프리드먼의 고개가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 그걸 본 라테시의 까만 얼굴이 검붉게 물들었다.
“망할, 그 개자식은 대체 뭐 하는 겁니까!! 그 자식이 지난 5년간 배당해간 금액의 절반만 토해내도 충분하잖아요. 게다가 이게 실패하면 기업가치 자체도 어마어마하게 흔들리고요. 애초에 그 야구단에서 선수는 노동자라기보다는 감가상각이 어마어마한 자산에 가깝다면서요.”
“말해봐야 통하질 않더군. 지금 우리가 최대한 쥐어 짜낸다면 얼마나 할 수 있지?”
피곤으로 가득한 프리드먼의 음성에 라테시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마이크 피아자한테 연 700만 2년짜리 제의하려던 거 취소하고 선발 보강계획도 취소하고 로스터를 증명된 것도 없는 유망주들로 가득 채우고 거기에 강진호 선수 하나 달랑 넣어두는 계획이면 연평균 2천5백만이 뭡니까? 3천만도 거뜬하죠.”
“지금 장난 칠 기분 아니니 비꼬지 말고”
라테시가 한숨을 크게 내쉰다.
“어휴, 피아자를 포기한다면 2천300만까지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기간을 길게 잡고 최대한 디스카운트를 시도한다고 해도 어쨌든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기준으로 할 테니 연 300만에서 400만은 더 필요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자금 운용이 굉장히 빡빡해집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라테시 라즈풋의 이야기에 프리드먼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결국 돈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니. 양키스의 그 막강한 재력과 구단주의 적극적인 투자가 오늘따라 너무 부럽군.’
그리고 같은 시간 양키스의 단장 브라이언 캐시맨 역시 마찬가지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무지 되는 일이 없어.”
6년째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비싼 선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그를 볼 때마다 캐시맨은 속이 배배 꼬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재작년 겨울 텍사스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며 무려 연 900만 달러라는 연봉보조를 받고 그를 데리고 올 때만 하더라도 브라이언 캐시맨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었다.
비록 팀에 이미 데릭 지터라는 걸출한 유격수가 있긴 했지만,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단순히 유격수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내야 어디에 데려다 놔도 자기 몫을 할만한 선수였으며 그 화끈한 방망이를 고려한다면 설사 지명타자에 넣어둔다고 해도 1,600만 달러의 돈이 아깝지 않을 대단한 선수‘였’다.
0.267/0.341/0.412
일루수를 제외한 내야수로는 절대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하지만 메이저 최고의 연봉을 받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성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성적이었다. 그의 96년 첫 풀타임 데뷔 이후 커리어 평균 성적이 0.308/0.385/0.582였다. 당장 작년 0.284/0.371/0.509의 성적만 하더라도 커리어 최악의 성적이었는데 올해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망가졌다. 그래도 작년에는 뉴욕으로 팀을 옮기고 익숙하던 유격수 대신 3루로 자리를 옮긴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성적이 급락한 선수는 그만이 아니었고 그들 사이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PED(Performance Enhancing Drugs. 경기력 향상 약물).
물론 본인이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었지만, 정황상 너무나도 확실한 상황이다. 즉 지금과 같은 빡빡한 검사가 이어지는 한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성적이 반등할 가능성 따윈 없었다.
‘젠장, 차라리 확 걸리기라도 하면 오히려 나을 텐데.’
문제는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약물복용을 부인하고 있고, 선수 본인이 저렇게 완벽하게 부인하는 상황에서 증거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계약의 파기는 불가능했고, 그것은 양키스는 앞으로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년 1,600만 달러의 돈을 2할 중반 타율에 OPS 0.753의 타자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텍사스의 뒤통수를 찰지게 후려치며 알렉스 로드리게스라는 메이저 최고의 내야수를 1,600만 달러의 싼값에 써먹는 최고의 계약이 졸지에 텍사스가 써야 할 독박의 70%를 대신 부담해주는 호구딜이 돼버렸다.
-존재감 없던 양키스의 단장 브라이언 캐시맨이 두각을 드러내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1,600만 달러에? 베이브 루스 이후 양키스 최고의 트레이드!!-
-땡큐 보스!! 땡큐 캐시맨!! 우리가 양키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하여 04년 초만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나오던 기사들의 논조도 크게 바뀌었다.
-21세기 최악의 트레이드 1위.-
-양키스가 2010년까지 암담할 이유.-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성격 더럽고 입도 험하고, 단장 자르기를 무슨 파리 잡는 수준으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캐시맨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던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건강이 크게 악화 되면서 장남인 행크 스타인브레너가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이 행크 스타인브레너가 캐시맨 자신을 굉장히 고깝게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자신의 아들인 행크보다 캐시맨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장님.”
스피커폰을 통해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지금은 생각할 게 많으니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을 끊어달라고 했잖아.”
“빌어먹을 말똥 같은 자식아. 나다.”
닫혀있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휠체어에 탄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
“망할 자식.”
노환으로 몸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았음에도 그 성격만큼은 전혀 죽지 않은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캐시맨을 향해 잡지 하나를 집어 던졌다. 물론 캐시맨 역시 그걸 호락호락 맞아줄 사람은 아니었다. 가뿐하게 잡지를 받아내는 캐시맨.
“웃차!! 이게 뭡니까?”
“눈깔이 달려있으면 직접 보던지.”
잡지의 표지에는 메츠의 유니폼을 입고 멋지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진호의 모습이 있었다.
-마침내 1942년 양키스의 조 고든이 기록한 29경기 연속 안타를 경신!! 30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는 Kang!! 역대 뉴욕의 모든 선수중 조 디마지오에 이은 두 번째 기록!!-
-뉴욕의 왕. Kang과의 독점 인터뷰!!-
“이거 나온 지 일주일쯤 된 잡지네요? 이 친구 지금 36경기째 연속 안타잖아요.”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뉴욕의 왕이란다. 뉴욕의 왕!!”
“잡지가 조금 요란하네요. 뉴욕의 왕이라니. 그건 제이지죠.”
“젠장, 지금 내가 그깟 힙합쟁이가 뉴욕의 왕인지 아닌지를 따지자고 온 것 같아? 네 놈이 무려 1,600만 달러짜리 똥 덩어리를 들고 온 동안 빌어먹을 메츠 자식들은 고작 1,000만 달러에 저런 타자를 써먹고 있다고.”
“그 1,600만 달러짜리 똥 덩어리가 처음 팀에 왔을 때 개막전에서 양키스 팬들이 보스를 환호했고, 보스가 울먹거렸던 건 혹시 기억 안 나시나요?”
“내가 울먹거렸다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마디 더 뱉는다면 그 부끄러움은 그대로 분노가 되어 자신을 덮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캐시맨은 기어코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그거 동영상으로도 남아있습니다. 아마 양키스 직원이라면 누구나 다 들고 있을걸요?”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턱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캐시맨의 생각과 달리 노호성은 터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노호성을 대신해 나온 미래에 대한 질문. 그것은 질책보다 날카롭게 캐시맨의 가슴에 꽂혔다. 1,600만 달러짜리 똥 덩어리, 코어 4 이후로 특별히 터지지 않는 유망주, 뉴욕의 화제와 인기를 점점 흡수하고 있는 메츠. 양키스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한둘이 아녔다. 캐시맨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여간, 이 말똥 같은 자식은 내가 그렇게 가르쳐도 도무지 나아질 생각을 않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던 보스가 캐시맨의 배를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우린 양키스야. 부족한 건 사오면 그만이지.”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그래서 사온 게 엉망이잖습니까.”
“물건 한두 개 잘못 샀다고 위축되는 건 저기 구멍가게들이나 그러라고 해. 잘못된 물건은 버리고 새로 사오면 그만이야. 내가 40년이 넘도록 구단주 생활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 뭔지 아나?”
자신의 두 발로는 걷지 못할 만큼 약해진 몸도 그의 영혼을 구속할 수는 없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순간도 식지 않은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뜨거운 열정이 캐시맨을 자극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뿐.”
“그래, 잘 아는군. 역시 아무리 말똥이라도 한 십 년 정도 굴리면 사람 같아진다니까.”
뉴욕의 진정한 왕이 웃었다.
“아, 그리고 뉴욕의 왕은 오직 비기 뿐이라고. 제이지 같은 애송이가 그걸 논하기에 아직 10년은 이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