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왕조의 조건(2)
뉴욕의 한 병원. 가장 화려한 1인실에서 30년대에 태어나 현재의 메이저리그를 만들어낸 위대한 두명의 거인이 만났다. 양키스의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파업 그리고 NBA의 대두로 망해가던 MLB를 부활시킨 버드 셀릭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조지, 몸은 좀 괜찮아?”
“젠장, 버드 네 녀석이 병문안을 다 올 줄이야. 이제 정말 내가 죽을 때가 되기는 됐나보군.”
“그 지저분한 입은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바뀔 생각을 않는군.”
“사람이 죽는 날까지 초지일관해야지.”
제국을 건설하려는 뉴욕 양키스의 구단주와 고향 야구팀을 만들어낸 밀워키의 구단주로. 그리고 영구제명을 당했던 뉴욕의 보스와 그를 복권시켜줬던 메이저리그의 커미셔너로. 이제는 늙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와 오랜 악우를 찾아 온 면회객으로. 험악한 말을 주고 받던 70대 노인 두 사람의 입가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터져나오는 웃음.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내민 오른손을 버드 셀릭이 강하게 움켜쥐었다.
“망할 자식!! 뒷골잡고 쓰러졌다고 해서 찾아왔더니만 여전하군. 아직 십년은 끄떡없겠어.”
“당연하지. 빌어먹을. 양키스가 왕조를 건설하기 전까지 떠날 생각은 없다고.”
“이거 오늘 아주 영생을 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리는구만.”
“글세 너희 머저리 같은 밀워키 브루어스가 지구 우승을 차지할 확률보단 높을 것 같은데?”
악담을 나눌 수 있는 친우. 인생 말년에 닥쳐온 위기 속에서 골머리를 썩고있는 두 사람의 마음이 모처럼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야?”
“어쩌기는. 아주 골치 아프지. 여론 좀 보라고. 그나마 내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서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을 거야.”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나갈 생각이야?”
“로드리게스로 화난 건 알겠는데 별 수 없어. 지금 약물검사를 다시 느슨하게 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고.”
버드 셀릭이 스타인브레너의 이야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영구제명까지 풀어줬던 그였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약물검사를 느슨하게 하는 것은 감히 시도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미국 스포츠 업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지 스타인브레너라고 해도 말이다.
“아냐, 아냐. 약물검사를 느슨하게 하다니. 그래선 안되지. 스포츠는 공정해야 하는 법이잖아.”
“영감탱이가, 뒷목잡고 쓰러지더니 갑자기 노망이라도 난 건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스포츠맨십을 준수하자는 아주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지.”
“허튼소리 그만하고. 무슨 속셈인지 솔직히 말해 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은근하게 웃었다.
“공정해야 하는 스포츠에서 공정하지 못한 똥만도 못한 녀석이 있다면 역시 제재를 좀 가하는 편이 옳은 것 아니겠어? 예컨대 명확한 의혹이 제기된 선수가 재판장에서 이의를 제기한 상황에서는 출전이 잠시 정지된다든지 하는 그런 것 말이야.”
“이런 미친!! 안돼. 절대로 안 돼. 이봐 70, 80년대와 지금은 달라. 너도 94년 일을 경험했잖아. 선수노조 놈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고. 안 그래도 지금 기록말소와 관련해서 아주 난장을 부리는 판국인데 절대로 안 돼. 게다가 그거 무죄 추정에도 어긋나는 짓이잖아.”
“무죄 추정은 무슨. 어차피 그 자식들 약 빤 거야 누구나 다 알고 있잖아. 지금 리그 돌아가는 꼴을 보라고. 그 약쟁이 놈들이 리그 전체의 자금을 쭉쭉 빨아들이고 있어. 덕분에 정작 제대로 된 소득을 얻어야 하는 정당한 선수들은 그 약쟁이들의 장기계약 덕분에 손가락이나 빨고 있고, 그런 약쟁이들에게 거액을 주는 빅마켓들은 모두 죽을 쑤고 있다고.”
그의 말처럼 05시즌 메이저리그 팀들의 전체적인 성적은 격변하고 있었다. 당장 평균자책점만 하더라도 근 10년 가까이 리그 평균 4점 중반대를 유지하던 것이 3.91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연봉 1억 달러 전후의 빅네임들 상당수의 성적이 급락했다. 그 결과 고액연봉자 다수를 감당할만한 메가 마켓 팀들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올 시즌 페이롤 기준 상위 다섯 개 팀 가운데서 지구 1위를 유지하고 있는 팀은 오직 메츠뿐.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남은 팀 역시 양키스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범위를 상위 10개 팀으로 확대한다고 해도 카디널스 정도만이 추가될 뿐이었다.
“지금 우리 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캐나다 촌놈들이랑 우리 연봉 차이가 무려 다섯 배야 다섯 배!! 우리 팀에 똥만도 못한 약쟁이 놈들 연봉만 합쳐도 블루 제이스 두 팀 분량이라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겠어. 나도 역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야. 물론 언더독의 반란도 좋지. 하지만 그것도 한두 곳이어야지. 흥행을 위해서는 탑독은 탑독다워야 한다고.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 빅리그는 선수노조와의 협의 없이 그런 것을 막무가내로 진행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어.”
버드 셀릭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메이저리그의 부흥뿐이었다. PED를 사용한 선수들로 인해 리그가 활성화됐기에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을 뿐, 지금처럼 그것이 리그의 부흥에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94년 리그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그 파업으로부터 고작 1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최근 약물 파동으로 인해 삐걱거리는 리그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선수노조가 반대할 거라 이 말이로군.”
“당연하지. 애초에 자신들의 권리에 누구보다 민감한 놈들이야. 약물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선수의 임금 지급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터무니없는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선수노조의 반대만 무마하면 된다 이 말이로군.”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음흉한 표정에 버드 셀릭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말이다.
***
98년 데뷔 이후 벌써 빅리그도 8년 차. 어지간한 일들에는 모두 적응이 된 지 오래였지만 보름 이상의 원정일정은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었다. 지난 이주 간 네 개의 도시를 돌며 총 12번의 시합을 치렀다. 이동 거리만 약 4천 마일(6,400km). 단 한 경기도 거르지 않고 치렀던 만큼 몸의 피로는 상당했다.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그럭저럭. 넌 좀 괜찮은 것 같네?”
“이틀이나 쉬었더니 아주 근질근질하다.”
다저스와의 3차전에서 하루 휴식을 부여받았던 프레스톤이 웃으며 답했다. 물론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말과는 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즌도 7부 능선을 넘어가는 현재, 지금까지 세 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출전했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딱!!
힘껏 쳐낸 배팅볼이 담장을 크게 넘어갔다. 피곤한 몸이지만 타격감은 여전히 괜찮았다. 물론 근력 적인 부분은 상당히 저하됐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카페인을 뇌에 들이붓기라도 한 것 같은 날카로운 인지력만큼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너 근데 살이 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어, 원정 시작되기 전보다 한 5파운드(2.3kg) 정도 빠졌어. 날이 더워서 그런지 입맛이 통 없네.”
“어휴, 진짜 휴식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타격감은 떨어질 생각을 않으니 휴식을 주기도 그럴 테고. 이번에 뉴욕 돌아가면 우리 집이나 놀러 와. 아버지가 고기랑 이것저것 좀 보내두셨다니까.”
프레스톤의 염려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의 연습배팅이 끝났다. 미리 입장한 팬들에게 30분 정도 사인을 해주고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약간의 휴식. 그리고 간단한 식사가 이어졌다.
어제 이동일, 하루의 휴식으로 인해 원정의 피로가 몰려온 탓인지 선수들이 널부러져 있는 라커룸은 고요했다. 평소 재잘거림을 담당하던 루키들 마저도 입을 다물고 쉬고 있었다. 이것은 열두 번의 원정에서 10승 2패. 최근 7연승을 거둔 팀의 라커룸답지 않은 분위기다. 이제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10여 분. 가라앉은 라커룸의 분위기 속에 내가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이제 내셔널리그 전체 1위까지 한 경기 남았다. 오늘 경기에서 카디널스를 이기면 드디어 우리가 내셔널리그 전체 1위로 올라서는 거야. 물론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동부지구 지구 1위만 하더라도 포스트시즌을 나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 여기서 한 번 정도 더 진다고 해도 지구 우승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잠시 말을 멈추고 선수들을 바라봤다. 오랜 기간 함께 뛰어온 동료들.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동료들. 마이너에서 박박 구르다 올라온 1년 차의 애송이들까지. 예외는 오직 말년 병장 같은 리키 헨더슨뿐. 마이크 피아자를 비롯한 최고의 베테랑들까지도 나의 말에 호응하며 늘어져 있던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 와중에 호세 레예스 녀석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캡틴!! 캡틴!! 질문 있습니다.”
“뭔데.”
“대체 지는 게 뭡니까?”
녀석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몇몇 사람들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쁘지 않았다. 가장 진지한 순간이야말로 가장 농담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래,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알게 되는 건 최소한 오늘은 아닐 것 같다. 오늘 그 답을 알게 되는 놈들은 저기 저 카디널스 놈들이 될 테니 말이야.”
“카디널스 자식들 엉덩이를 걷어 차주러 가 보자고!!”
적절한 타이밍에 프레스톤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무기력해 보이던 동료들의 기세가 사납게 달아오른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끄러운 멘트를 꾹 참고 뱉은 보람이 있었다. 덕아웃으로 가는 길, 피아자가 기특하다는 듯 나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도 종종 라커룸에서 이런 멘트를 뱉곤 했었다. 들을 때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는데, 직접 하고 보니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 줄 알 수 있었다. 이런 부끄러운 짓을 무려 7년이나 해왔다니. 피아자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뉴욕 메츠의 시리즈 1차전!! 이곳은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입니다.]
[올 시즌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두 팀입니다. 양 팀 모두 최근 7연승을 달리고 있죠?]
[사실 내셔널리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팀들이라고 봐야죠. 현재 양대리그를 통틀어 70승 고지를 밟은 팀은 카디널스와 메츠밖에 없습니다.]
[71승 37패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그리고 70승 38패의 뉴욕 메츠. 최근 나란히 7연승을 거둔 두 팀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최근 기세만 본다면 메츠 쪽이 조금 더 매섭죠?]
[그렇습니다. 카디널스의 경우는 전반기부터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둔 데 반해서 메츠는 하반기 바비 발렌타인이 경질되고 조 매든 감독이 부임한 이후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거든요. 하지만 카디널스 역시 최근 기세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고 더군다나 메츠는 지금 14일 동안 열두 번의 원정을 치르고 지금 열세 번째 원정경기거든요. 아무래도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카디널스 쪽이 유리하다고 봐야 할 겁니다.]
[자, 마운드에 카디널스의 에이스 크리스 카펜터 선수가 올라옵니다. 올 시즌 리그에서 가장 도미넌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크리스 카펜터 선수. 지금 3경기 21.2이닝째 무실점을 기록 중에 있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크리스 카펜터.
비록 유리 몸의 대명사이긴 했지만, 스카우트들에게 건강하기만 한다면 리그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던 그였다. 97년 데뷔 이후 9년 차. 커리어 사상 최초로 부상 없이 시즌을 치르고 있는 그는 스카우트들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하게 증명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