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6화 (176/210)

# 176화.

왕조의 조건(3)

6피트 6인치(198cm)의 큰 키에 어울리는 길쭉길쭉한 팔, 다리에서 나오는 호쾌한 피칭. 크리스 카펜터의 공이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뻐엉!!

전광판에 기록되는 구속은 90마일. 큰 키와 시원한 동작치고는 영 시원찮은 구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구속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카펜터의 공은 매서웠다. 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제구력과 속구와 그리 크게 차이나지 않는 변화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것은 역시 그의 커브였다. 6피트 6인치의 키에 완벽한 오버 핸드 스로잉이 겹쳐진 릴리스 포인트는 6피트 10인치의 키에 스리쿼터로 던지는 랜디 존슨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높은 지점에서 들어오는 빠른 종무브먼트의 변화구는 무서웠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메이저 최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진의 개수는 리그 평균보다 훨씬 적었고 그중에 스윙 삼진은 더더욱 몇 되지 않던 리키 헨더슨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젠장, 무슨 놈의 커브가 내 머리보다 높은 곳에서 무릎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야.”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리키 헨더슨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안 그래도 타석보다 높은 마운드다. 2미터에 가까운 키가 주는 위압감은 상당했다. 하지만 크리스 카펜터의 표정 역시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긴장하고 있다.

[22이닝 무실점의 에이스 크리스 카펜터. 그리고 서른여섯 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 중인 타자 강진호의 맞대결입니다.]

[꾸준히 메이저리그를 지켜봐 온 팬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저 크리스 카펜터 선수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하반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을 견인했던 바로 그 투수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작년보다 한층 더 매섭습니다. 그야말로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입니다.]

[물론 구속만 본다면 140초 중반으로 메이저리그 투수치고는, 그리고 저렇게 커다란 체구치고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투구라는 것이 구속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강진호 선수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서른여섯 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1987년 폴 몰리터 선수의 서른아홉 경기 연속 안타 이후 최장기록이거든요. 단일시즌 기록으로 한다면 역대 8위. 두 시즌에 걸친 기록을 포함해도 역대 9위의 기록입니다. 기록으로 인정은 되지만 그래도 조금 별개로 취급되는 데드볼 시대의 기록을 제외한 라이브 볼 시대의 기록만으로 따진다면 역대 6위의 기록이고요. 당연히 현역선수를 기준으로는 최고 기록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상 이제 강진호 선수 위로는 조 디마지오라던지 타이 콥, 피터 로즈같은 이미 메이저에 전설로 남아버린 선수들 몇몇밖에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직 8년 차밖에 되지 않은 선수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이른 것 같긴 합니다만, 현지에서도 강진호 선수에 대해 저런 놀라운 전설들에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1986년 빌 제임스가 주창한 Similarity Scores(유사 지수)로 본다면 강진호 선수는 역사상 유일한 메이저리그 양대 MVP인 프랭크 로빈슨 선수나 현역 최고의 커리어를 보여주고 있는 켄 그리피 주니어 선수, 그리고 미키 멘틀 선수와 아주 흡사합니다.]

[정말 대단한 커리어입니다. 아, 그런데 이건 그냥 순수하게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메이저리그에서 진짜 대단한 선수들이라면 조 디마지오, 테드 윌리엄스, 베이브 루스 같은 선수들인데 아무리 강진호 선수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 선수들과 비교될 수준까진 아닌 건가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Similarity Scores라는 게 동나이 대를 기준으로 측정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28세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프랭크 로빈슨 선수, 켄 그리피 주니어 선수, 미키 멘틀 선수 쪽이 앞서 말씀하신 선수들보다 성적이 더 좋아요. 루스 선수의 경우는 타자 데뷔 자체가 좀 늦었고 조 디마지오 선수나 테드 윌리엄스 선수는 딱 그 나이대에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커리어가 단절됐었거든요. 물론 저 선수들은 이후 30대에 무서운 기세로 성적을 올리기는 했습니다만 강진호 선수도 지금 성적이 앞으로 10년만 유지된다면 말씀하신 선수들에 비교해 절대 부족하지 않은 성적으로 커리어를 마감할 확률이 높습니다.]

크리스 카펜터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생소함은 언제나 투수에게 유리한 법이다. 내 키보다 높은 곳에서 출발하는 공이 나의 시각을 교란했다.

뻐엉!!

배트는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심판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방금 공이 스트라이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속구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이 떨어졌다. 방금 공의 궤적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넣는다. 카펜터가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피칭폼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을 떠나는 야구공을 보는 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커브!!’

올 시즌 내셔널리그의 모든 커브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커브로 손꼽히는 공이다. 하지만 나 역시 커브라면 이골이 날 만큼 잔뜩 상대해왔다. 마이너 시절 처음 만났던 메이저 정상급 투수인 타파니의 커브부터 데뷔 초창기 나를 고생시켰던 데릴 카일의 위력적인 커브까지. 물론 크리스 카펜터의 커브는 그들의 커브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커브를 상대하는 나 강진호는 그 이상으로 발전해있었다.

딱!!

[쳤습니다!! 강진호!! 잡아당긴 타구!! 이루수 키를 훌쩍 넘기는 우전안타!! 강진호 선수 여유롭게 1루를 밟습니다.]

[연속안타 기록을 1회 초 여유롭게 경신하는 강진호 선수!! 이걸로 서른일곱 경기 연속안타입니다.]

[보통 이렇게 기록 경신이 이어지면 부담감 때문에라도 점점 힘들어지기 마련인데, 강진호 선수는 그런 게 전혀 없어 보여요. 아니 오히려 그런 부담감을 즐긴다는 느낌입니다.]

보호장비를 벗어 1루 코치에게 넘기고 도루 장갑을 손에 끼었다.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왔다. 크게 심호흡하며 자세를 잡는 피아자. 덕아웃의 조 매든 감독이 약속된 사인을 보내왔다.

마운드의 크리스 카펜터가 나를 힐끔 바라본다. 약간의 경계심. 하지만 조 매든 감독의 부임 이후 거의 도루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작년까지 1루에 서있던 나를 경계하던 투수들의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내야수들의 눈빛 역시 그러했다.

부웅!!

[1루 주자 달립니다!! 강진호의 단독 도루!!]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강진호의 기습적인 도루 플레이!! 최근 도루를 거의 하지 않고 있던 강진호 선수였는데요. 지금 이게 하반기 첫 번째 도루 아닌가요?]

[맞습니다. 시즌 21호. 무려 스물아홉 경기만의 도루입니다.]

[물론 고액연봉자에 팀 타격의 중심이고 여러 가지 기록들도 달린 만큼 몸을 사리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만, 그래도 강진호 선수 하면 이런 훌륭한 주루플레이를 빼놓을 수가 없었던 만큼 그간 아쉬워하는 팬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 이 도루로 그분들의 아쉬움이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저도 강진호 선수가 도루를 자제하는 것이 좀 아쉬운 사람 중 하나입니다. 강진호 선수가 한국 나이로는 서른이지만 6월을 기준으로 당해 나이를 결정짓는 빅리그의 관행상 메이저리그식으로는 고작 스물여덟에 불과하거든요. 아직 충분히 더 뛸 수 있는 나이예요. 물론 리키 헨더슨 선수처럼 무지막지한 수준의 도루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총 도루가 325개로 재작년 배리 본즈 선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500-500을 넘어 어쩌면 600-600에도 도전할 수 있었거든요. 실제로 도루 페이스를 보면 강진호 선수 쪽이 배리 본즈 선수보다 일 년 반 가깝게 빠른 페이스였고요.]

[그렇군요. 하지만 앞으로 강진호 선수의 커리어도 창창한데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통산 500도루만 하더라도 연평균 20개씩 9년을 더 달려야 하는데 이게 삼십 중반을 넘게 되면 정말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면 도루를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그러니까 최소 연평균 30개씩 6년은 더 해줘야 하는데 글쎄요. 물론 능력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만 올해처럼 이렇게 의도적으로 도루를 제한한다면 조금 빠듯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파운드가량의 감량 덕분일까? 2루까지 도착하는 것이 상당히 여유로웠다. 물론 달리는 것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도루는 체중이 조금 덜 나가는 쪽이 더 편한 느낌이었다.

‘이번 시리즈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네의 발을 활용할 생각이야. 다만 사인이 나왔다고 무조건 달리지는 않아도 좋아. 마음대로 달리는 것은 허락할 수 없지만 마음대로 달리지 않는 것은 허락한다는 의미야.’

오래간만의 짜릿한 도루 성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의 안전을 생각해서 도루를 자제시키는 것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제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카디널스와의 1차전. 나의 머릿속에 아드레날린이 샘솟기 시작했다.

***

1966년 이후 지금까지 MLBPA(Major League Baseball Players Association.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협회)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세계최강의 노조였다. 미국 철강 노조의 수석 고문 겸 협상 대표였던 마빈 밀러가 MLBPA의 노조 위원장으로 추대된 이후 지금까지 메이저리거들의 연봉 상승 폭은 전 세계 모든 산업(스포츠가 아닌 모든 산업)을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높았으며 여러 가지 복지 제도 역시 완벽하게 갖춰졌다. 물론 그 정도로 MLBPA가 세계최강의 노조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세계최강의 노조임을 증명한 것은 지난 1994년 8월부터 1995년 4월까지 진행됐던 메이저리그의 파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선수단은 총 여덟 차례의 파업을 결행했고 4번의 시즌 중단이 있었지만, 시즌의 잔여 경기와 월드 시리즈가 통째로 취소되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 세계최강의 노조 MLBPA의 노조 위원장을 맡은 도널드 페어. 지난 1994년 대파업의 중심인물인 그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그래서 지금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허,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일단 설명을 좀 들어 보라고.”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자인 도널드 페어였지만 눈앞의 노인, 양키스라는 제국의 황제. 조지 스타인브레너 역시 도널드 페어 못지않은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터무니없는 개소리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는 없었다. 도널드 페어가 가슴 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겨가며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이야기에 반문했다.

“그러니까, 약물복용 혐의선수들의 선수자격을 정지시키는 것이 선수 협회에도, 그리고 저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라는 그 헛소리를 설명하겠다 이 말씀이신 거죠?”

“이것 참, 헛소리라니. 일단 들어보면 자네도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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